개인적으로 좀 관심을 갖고 있어서 몇몇 글들을 스크랩함.


http://ppss.kr/archives/18339

http://www.amazon.omwww.workingus.com/v2/gnu/bbs/board.php?bo_table=job&wr_id=13202&page=511

http://jung9nee.blogspot.jp/2013/11/blog-post.html

http://liveandventure.com/2012/12/21/rank/





한자와 나오키의 명대사 「倍返しだ!」(배로 되갚는다!)

드라마의 히트에 힘입어 2013년 일본 유행어 대상에 선정되기도 한 임팩트있는 대사.

 

2013년 홍백가합전에 나온 칸쟈니 8의 마루야마가 이를 흉내냈는데 

표정도 목소리도 상당히 비슷해서 다들 감탄함...


 웹에서 찾은 가톨릭의 기원과 다른 종파들에 대한 자료를 정리해 보았다.


출처 :

http://mirror.enha.kr/wiki/%EC%95%84%EB%B8%8C%EB%9D%BC%ED%95%A8%20%EA%B3%84%ED%86%B5%EC%9D%98%20%EC%A2%85%EA%B5%90

http://mirror.enha.kr/wiki/%EA%B8%B0%EB%8F%85%EA%B5%90

http://mirror.enha.kr/wiki/%EC%98%A4%EB%A6%AC%EC%97%94%ED%83%88%20%EC%A0%95%EA%B5%90%ED%9A%8C

http://mirror.enha.kr/wiki/%EA%B0%80%ED%86%A8%EB%A6%AD

http://ko.wikipedia.org/wiki/%EB%8F%99%EC%84%9C_%EA%B5%90%ED%9A%8C%EC%9D%98_%EB%B6%84%EC%97%B4



1. 기원 - 셈 족의 종교


 그리스도교의 성서 창세기에 등장. 노아의 맏아들이고, 오늘날의 유대인과 아랍인의 조상이라고 여겨지고 있는 인물. 이 사람의 이름을 따서 흔히 아랍인이라고 부르는 중동 지역의 사람들을 셈 족이라고도 일컫는다. 이들 셈 족의 신앙으로부터 출발한 종교에 크게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가 있으며, 보다 마이너한 드루즈교, 만다이교, 바하이교 등도 포함된다. 


 애초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시작되어 이슬람 지역에 한정된 민족 종교였던 야훼 숭배는 다곤, 바알 등 다른 경쟁자들을 제치고 근동과 지중해 연안으로 확대되었으며, 313년에는 로마 제국의 공인을 받아 4세기에는 로마의 국교가 되고 유럽을 지배하게 된다.유럽 이외의 대륙에 소개될 때에는 다른 대륙 고유의 문화를 침범하는 데에 악용되기도 하였으나, 평등과 박애를 중시하는 범인류적 교리 덕분에 도태되지 않고 오히려 발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개신교계에서는 이슬람교 등과의 공통점을 지적받으면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많지만, 에큐메니컬 계열의 통합 운동을 예로 들 수 있듯, 공통된 하나의 신 - 야훼를 경배한다는 거시적 차원에서 본다면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에큐메니컬 운동에 대해서는 여기 : http://bit.ly/1h1qqZH) 


 시기적으로 차후에 등장한 종교는 대체적으로 이전 종교의 내용을 포용하려고 한다. 그것이 실질적으로 보다 영향력을 넓힐 수 있는 쉬운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독교는 구약을 인정하고 이슬람교는 예수를 인정하지만, 유대교는 예수도 무함마드도 인정하지 않는다. 이슬람교에서는 유대교와 기독교인들을 "성서의 백성들"이라 부르며 인정하고, 성모의 처녀수태와 예수의 존재를 인정하고 중요한 예언자 '이사(يسوع)'로 부르며 다룬다. 쿠란과 성경에서 가브리엘이 나오는것 또한 그 예시다.


 이 3개 종교의 인구 수를 살펴보면, 우선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기독교가 22억, 그 다음을 차지하는 이슬람교가 13억(2010년도 통계 기준)이므로, 이들 종교의 인구 수는 전 세계 인구 수 65억 명의 절반을 넘어선다. 


 서구 사회에서는 특정한 종교로서의 의미도 있지만 전반적으로 자연스럽게 배여있는 생활, 문화라고도 할 수 있겠다. 특히 미국의 경우 개국 당시 청교도 의회 같은 기독교 공동체가 기반이 된 바가 크기 때문에 국가 전체적 이념에 기독교적 사상이 깊게 배어들어 있다. 참고로 기독교라는 단어는 그리스도의 한자 음역인 기리사독(基利斯督: Jīlìsīdū)에서 유래하였다. 개화기 문헌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야소기독'이라고 부르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종교는 모두 기독교에 해당한다.



2. 기독교


 기독교는 위에 설명했듯 유대교, 이슬람교와 함께 셈족 종교 가운데 두번째이자 아브라함교 중의 하나이다. 다른 셈족 종교와 구별되는 기독교만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메시아로서의 예수의 존재와 그의 희생으로 말미암은 구원을 믿는 것이며, 종파마다 내용이 다를지라도 기독교라는 분류에 들어가는 이상 이 내용만큼은 결코 변할 수가 없다. 마치 이데아론을 빼고는 플라톤의 철학을 논할 수가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때문에 만일 이 내용이 빠지거나, 혹은 예수를 대신해 어떤 다른 존재가 등장한다면, 그것은 기독교 계통조차 아닌 어떤 다른 종교, 혹은 이단이라고 보면 된다.


 크게 가톨릭과 정교회의 보편교회와 제 4차 칼케돈 공의회때 동의하지 않은 오리엔탈 정교회 그리고 이후 가톨릭에서 분리되어 나온 개신교로 분류할 수 있다.그러나 한국에서 말하는 기독교는 대부분 개신교를 지칭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개신교인들이 한 일을 기독교인들이 했다고 표현하는 경우가 많아서 주의가 필요하다. 사실 기독교에 속하는 분파들 끼리도 차이가 크며, 개신교 내부에서도 분파에 따라 분위기가 매우 다른 경우가 있으니 구분하여 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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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대인들의 유대교중 시한부종말론과 메시아의 재림을 강력하게 믿었던 에쎄네파, 기원 원년 부근에 예수 그리스도는 소외받은 자들, 그리고 자신을 따르는 자를 규합하여 기독교를 만들었다. 초기 전파자들 중엔 예수 그리스도, 베드로, 사도 바울 등이 있다. 또한 325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기독교 공인 전까지는 우리가 아는 기독교의 모습이 아니라 오히려 영지주의 등의 여러 종파들이 이단, 정통 구별 없이 존재했었다.


 기독교의 시작은 로마와 함께하는데, 예수는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티베리우스 시대의 사람이었으며, 로마황제가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 공인하기 전까진 지도적 위치에 있지 않았다. 초기 기독교가 사이비로 불린 것은 기독교가 로마에 전파되던 당시, 기독교도는 피와 살을 먹는다는 속설이 있어 초기 기독교에 대한 반감의 한 원인이 되었기 때문인데 이것은 '최후의 만찬' 때의 "빵은 내 살, 포도주는 내 피."라던 예수의 말이 비 기독교도들 사이에서 와전되어 퍼진 것으로 여겨진다. 


 재미있는 사실은 비슷한 시기의 미트라교에서도 "내 살과 내 피."라는 말로서 성찬례를 했지만 미트라교는 전혀 핍박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다음의 이유로 판단 가능하다. 미트라교는 이미 상당수의 로마군인들 사이에 퍼져있는 정말 메이져급 종교였다. 군인은 물론 로마 고위 관직자들과 심지어는 로마 황제들도 이 종교를 좋아했다. 특히 고대로부터 전해져오는 군신의 이미지와 계약과 중보의 이미지로서 미트라교는 로마에서 기독교보다 인기가 좋았다. 


 그리고 유일신교인 기독교는 다른 신을 섬길 수 없다는 이유로 신격화된 황제 숭배가 포함된 로마의 국가적 의례를 거부하였다. 이는 로마인에게 있어서 바로 반역으로 여겨졌다. 이로 인하여 64년부터 네로 황제부터 시작하여 기독교를 금지하기 이른다. 전체적으로 로마인들이 기독교인의 문제라고 생각한 것은 황제 앞에 충성을 맹세하는 국가적 의례를 거부하는 모습이었다.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의례를 거부하면 바로 처벌을 받게 되었다. 그 이외에는 딱히 문제로 여겨지지 않았고, 기독교 자체를 국가의 문제로 여기는 생각은 적었다. 원래 로마는 다신교이며, 기독교 이외에도 많은 종교가 공존했기 때문에 종교 자체보다는 '개인의 행동'을 문제로 삼았다. 공공연한 기독교인이라 해도 의례를 거부하지 않으면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그러나 이를 거부할 경우 법적조치에 취해지게 되었다. 


 따라서 기독교인에 대한 탄압은 간헐적이었다. 기독교인의 순교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반응은 잘 알 수 없다. 감명을 받아 귀의했을지도 모르고, 그냥 어리석은 멍청한 사람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탄압 때문에 기독교 세력은 그다지 뿌리를 박지 못했는데, 예를 들어 신약 성서 초기에 등장했던 교회들은 그 뒤의 행방이 묘연해지는 경우도 많았다. 


 다신교의 로마에서 기독교만 유일하게 간헐적이나마 종교를 이유로 탄압받는 이유는 기독교인들이 유난히 미움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이들이 미움을 받는 이유는 수많은 축제나 스포츠 행사에 일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로마는 일년에 3분의 1 가량이 축제로 도배를 할 정도로 많은 축제가 있었다. 이는 국가적인 레벨이거나 혹은 지방적인 레벨의 축제들이었다. 많은 종교를 믿는 사람들 중 기독교인들 만은 이런 축제들에 일절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으며 이러한 태도는 다른 로마인들에게 '자기네가 뭐 그리 대단한가?' 라는 생각을 품게 했던 것이다.


 사실 기독교의 박해가 처음 시작된 것은 네로였는데, 그가 대화재의 책임을 기독교인들에게 돌리는 이유는 그들이 종교적인 문제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그 사회에서 미움받는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즉 기독교에 대한 탄압은 기독교인들이 스스로 생각한 것처럼 종교를 믿었다고 탄압받은 것이 아니라, 그들이 로마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다양한 축제와 행사에 일절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에 대해 미움을 받아 탄압을 받은 것이었다. 


 그런데 서기 110년 트라야누스 황제는 기독교들의 행방을 밝히지도 캐지도 말라는 명령을 내린다. 종교 조직으로서의 기독교는 탄압할 생각이 없다는 의미로, 공공연하게 로마의 국가적 의례를 거부하는 개인의 행동만을 문제로 삼은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로마의 신을 거부하는 기독교는 불법요소였다. 지도자들도 곧 세계가 멸망할 거라고 생각해서 순교와 죽음을 장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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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세기 로마 제국은 사회적 불안정 때문에 종교적 욕구가 늘어나서 기독교 세력이 크게 팽창하였다. 이와 더불어 많은 황제들이 기독교에 대한 탄압을 시도하였는데 군인 황제 중엔 데키우스, 발레리아누스 황제등이 대표적으로 탄압하였다. 이들이 탄압한 이유는 기독교인들의 사회적인 단합을 망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기독교인들은 국가적인 행사등 에 일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며 로마인들이 3세기의 위기 때 신전에 가서 울고 불고 했을 때 역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군인 황제들은 이들이 사회적인 단합을 해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을 탄압하고, 이로 인해 다른 로마인들이 단결하길 바랐다. 


 군인황제 시대가 끝난 후에 정권을 잡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역시 전례없이 강경한 탄압을 시도하였다. 사실 전임 황제였던 데키우스나 발레리아누스 황제도 강도는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비슷했는데, 문제는 전임 두 황제는 일찍 비명횡사하는 바람에 탄압이 중단되었던 것. 반면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오래 살았으므로 오랫동안 강력한 탄압을 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목적도 전임황제와 비슷하여 로마 사회의 단합 그리고 황제의 권위의 강화하기 위한 탄압이었다. 디로클레티아누스는 트라야누스처럼 "국가의례를 거부하는 기독교인 개인"만을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조직 자체"를 겨냥해서 파괴하려 하였다. 그 결과 기독교는 굉장히 큰 타격을 입었다. 하지만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중도에 퇴위하였고 그 결과 기독교 탄압도 애매하게 중단된다. 


 콘스탄티누스 1세가 사회, 정치적 요인으로 기독교를 공인한다. 그가 공인한 목적은 기독교의 유일신을 섬기게 하고 로마 황제를 그 유일신과 신도의 중간에 위치한 존재로 만들어 대중들에게 숭배받게끔 하기 위해서였다. 황제를 신으로 숭배하는 것은 당시엔 낮선 것이 아니었는데 이는 이집트의 파라오나 페르시아 제국의 황제들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런데 로마 황제는 특이하게도 제국민들에게 신으로써 숭배받는 전통이 약했고 따라서 조금만 실책을 저지르면 즉시 암살당하고 내전이 발발하는 패턴이 계속되었다. 콘스탄티누스는 따라서 로마 황제를 아예 유일신인 야훼를 지키는 종교의 수호자로 만듦으로써 오리엔트에서 황제를 신으로 섬기는 것과 비슷한 효과를 내고자 한 것이었다. 


 사실 이러한 시도는 군인황제 시대 때의 아우렐리아누스가 최초로 시도하였었다. 그는 기독교의 신이 아닌 태양신을 내세우고자 하였다. 하지만 태양신보다는 기독교의 유일 신앙이 콘스탄티누스의 목적에 더 걸맞았는데, 그 이유는 기독교는 오랜 전통의 유태교의 영향으로 인해 상당히 정교한 이론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콘스탄티누스의 어머니가 기독교신자였기 때문에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에 대해 꽤나 친숙하였고 따라서 기독교야말로 그의 목적에 걸맞다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다. 사실 콘스탄티누스의 이 방식은 그의 예상을 뛰어넘을 정도의 대성공을 거두어 100년간 지속된 황제 암살 → 내전 → 승자의 황제계승의 패턴이 거짓말처럼 중단된다. 그 뒤 매우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테오도시우스 1세가 기독교를 제국의 국교로 선포해버렸다. 


 콘스탄티누스는 죽을 때쯤 가서야 세례를 받았는데 그 이유는 자신이 저지른 모든 죄를 씻을 수 있고, 살인등의 죄를 지어야 하는 황제라는 점 때문이었다. 물론 현대 교리상으로는 저런 이유로 세례 받기 전에 뭘 해도 괜찮다는건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4세기 당시에는 세례가 모든 죄를 씻어준다고 여겼기에 최대한 늦게 받는 것이 유행이었다. 이로 인해 기독교는 피탄압종교에서 순식간에 지배종교로 변모한다. 하지만 도리어 로마에 적대적인 국가들은 그 이전 관용을 배풀던 기독교를 탄압하게 된다. 이 때부터 자신들의 지위상승을 잃고 싶지 않았던 종교지도층은 본격적으로 정치에 개입, 기독교에 적대적인 국가들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독실한 이교 신자였던 율리아누스 황제가 기독교의 입김을 정치에서 완전히 제거하려 했으나 사산조 페르시아에 대한 원정 중 병사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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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독교의 분열의 기준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면, 기독교의 공인 이후 혼란이 심해지자 이를 정리하기 위해 니케아 공의회가 열려 이단세력(아리우스파)를 구별하고, 결국 아리우스파는 게르만족으로 주 표교를 옮기게 된다. 동지중해에서 출발한 수도원 운동은 초기 중세 유럽 문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고전 문화의 보존 및 전달, 이교도들의 개종이 그들의 주요 임무였다. 이교도들의 침입으로부터 고전 문화를 보존하면서 동시에 그들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전도 사업이었던 것이다. 


 동지중해와 이집트의 사막에서 출발한 엄격한 수도원 운동은 갈리아로 전파되었다. 이집트 출신의 수도사들은 주변이 온통 이교도로 넘쳐났으므로 그들의 개종에 나섰던 것이다. 갈리아에 전파되었던 수도원은 다시 잉글랜드와 아일랜드로 건너갔다. 6세기와 7세기에 걸쳐, 이 두 섬에서는 믿을 수 없을 만큼의 전도 활동과 수도원 운동이 전개되었다. 사실상 7세기와 8세기에 들어가면서 아일랜드와 잉글랜드에서의 선교 사업은 큰 성공을 거두었고, 거꾸로 그들이 보존한 여러 고전 문화들이 대륙으로 역수출되는 일까지 발생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라틴어로, 아일랜드 수도사들은 고전 문법책을 구해 그것을 완벽하게 재현했다. 반면, 대륙의 라틴어들은 지방 속어들과 융합되면서 본래의 모습을 잃어가고 있었던 것이다(오늘날의 유럽 대륙 국가들의 언어가 형성된 시기이다). 


 그들은 단순히 고전문화만을 보존하고 전파한 것이 아니었다. 초기에 대륙에서 섬나라로 들어갔던 기독교가 이제는 다시 섬나라에서 대륙으로 퍼지게 되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아일랜드 출신 수도사인 보니파키우스(Boniface, 680년 ∼ 755년)이다. 그의 별명이 ‘독일인의 사도’(또는 게르만 사도) 였으니, 그의 활동 무대와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는 서로마 교회가 위기에 처했을 때 프랑크 왕국과의 제휴를 위해 정략적으로 파견되었으며, 프랑크 왕국의 새로운 왕조인 카롤링거 왕조의 첫 번째 왕 피핀 3세에게 왕으로서 자격을 부여하는 세례식을 한 장본인이다. 


 아일랜드와 잉글랜드 출신의 수도사들은 농촌 지역의 미개하고 원시적인 농민 대중을 대량 개종시켜 유럽을 기독교 대륙으로 만들었다. 참고로 여기서 말하는 기독교는 삼위일체설을 주장하는 아타나시우스 계열의 기독교로, 그의 출발지는 로마를 중심으로 한 이탈리아 반도였다. 대륙의 기독교 수도원들은 대부분 보니파키우스의 영향을 받아 아일랜드 베네딕토계의 계율을 받아들였다. 특히 보니파키우스의 업적은 두 방향에서 이후 서방 교회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친다. 첫째는 그의 전도 사업으로 대부분의 게르만족이 최초로 기독교 세계에 편입되었으며, 둘째로 갈리아 지방에서 그의 활약으로 프랑크 국왕과 로마 교황 간의 관계가 전례없이 밀접해지게 되었다.


 이 상태에서 서로마가 멸망해 중세가 시작된다. 서로마를 멸망시킨 게르만 인들 중 고트족은 아리우스 파를 신봉했으나, 나중에 세력을 잡게 된 프랑크 족은 아타나시우스 파를 받아들였고, 결국 아타나시우스 파 기독교가 정통파 교회가 되었다. 5세기에는 안티오키아의 네스토리우스와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로스 간의 신학 논쟁으로 인해 네스토리우스파와 단성론파의 종파가 정통파에서 갈라져 나왔다.


  이후 정통파 교회는 후에 신학적, 정치적, 문화적 문제들이 뒤얽혀 두 거점인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세력이 나뉘게 되었다. 양대 교회는 중세 초에는 서로 협력하는 관계였으나 점점 상황이 안정되면서 소원해져가기 시작했고, 그리스-헬레니즘적 동방과 게르만-라틴적 서방의 문화적, 정치적 차이가 심해지면서 양대 교회의 관계가 악화되어가기 시작했다.


 동서 로마가 분리되었지만, 제국의 중심은 동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있었다. 서로마 제국은 476년 공식적으로 막을 내렸을 뿐만 아니라, 이교도와 야만인들이 설치는 폐허나 다름없는 상태였으므로, 동로마 제국이 중심을 이루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5세기와 6세기를 통틀어 동로마 제국의 황제들은 자국을 지켜내기에도 버거운 형편이었다. 간신히 동방 지역에서 황제권을 수호할 뿐, 서방 속주의 탈환은 꿈도 꾸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6세기 중엽 이후,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등장하고서야 겨우 타개된다. 게다가 그는 라틴어를 사용하는 등 라틴 문화를 고수했던 황제였다. 그 이후에 동로마 제국은 급속히 그리스화 하였다. 7세기 들어 동로마 제국의 관심사는 동지중해 지역에 집중되었다. 게르만계열의 야만족들에게 유린당한 서유럽의 속주들은 그들에겐 더 이상 관심사가 아니었다. 이미 그리스화 한 그들은 서방보다는 동방에 관심을 더욱 집중시켰고, 강력한 적인 이란의 사산 왕조와 맞부닥치게 되면서 그러한 경향은 더욱 강해졌다. 중요한 점은, 동로마 제국이 동방에 관심을 집중하면서도 계속 이탈리아 반도에 대해 간섭하고 있었다는 것과 그러면서도 이탈리아 반도에 대해 아무런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러나, 로마와 이탈리아가 갖는 역사적 중요성, 그리고 사도 베드로가 가지는 의미 등으로 인해 동로마는 여전히 8세기에 들어서면서도 이탈리아 반도를 수중에 넣고자 끊임없이 시도하고 있었다. 


 동지중해에서 옛 대제국의 영광을 되찾으려던 동로마 제국은 새로운 적과 마주치게 되었다. 새로운 적은 이슬람 세력이었고, 동로마 제국은 이들과 오랜 투쟁에 들어가야 했다. 8세기 초, 동로마 제국은 이슬람 세력의 침략을 격퇴하는 데 성공했으나, 그로 인해 심각한 재정 위기를 맞게 되었다. 


 630년, 메카 시(市)의 정복을 시작으로 전 아라비아 반도와 북아프리카, 그리고 동지중해를 장악하고 동로마 제국을 노린 이슬람, 그리고 거의 동시대에 서유럽을 통일한 프랑크 왕국. 이슬람이 우상파괴령에 영향을 미쳤다면, 프랑크 왕국은 우상파괴령을 둘러썬 동서 교회의 대립에 서로마 교회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이미 이란과 이슬람을 상대로 한 오랜 전쟁에 지쳐 있던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서로마 교회가 독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거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프랑크 왕국은 두 개의 새로운 서로마제국을 만들어냈다. 800년의 서로마제국과 962년에 신성로마제국의 수립이다. 서로마교회는 프랑크 왕국 덕분에 동로마로부터 독립할 수 있었고, 새로운 서유럽을 본격적으로 만들어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7세기에 상대적으로 안정을 되찾은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교구는 자신의 우월성을 입증하려고 했다. 로마 교회는 이전부터 총대주교구들 중 첫 번째 지위를 가지고 있었으나, 서방에서의 교황권 강화를 계기로 삼아 로마 교황이 전체 그리스도교 교회를 지배한다고 천명했다. 그러나 동로마 황제가 비호하는 콘스탄티노플에서는 로마 교황이 단지 다섯 총대주교 중 한명이라고 반박하며 자신의 칭호에 전 그리스도교 세계의 총대주교를 덧붙였다. 


 8세기 초 이슬람의 침략을 물리친 동로마 황제 레온 3세는 심각한 문제에 처했다. 하나는 성상 공경이었고, 다른 하나는 대토지 소유에 의한 조세 수입의 격감이었다. 새로 개종한 지역일수록 우상 숭배는 심했다. 여기서 '성상'(이콘(icon))이라 함은 성인들을 그린 그림, 조각, 모자이크 등을 총칭하는 것이다. 그것들은 문맹인 야만족들을 개종하는 데에 제법 짭짤한 효과가 있었지만, 기독교 자체보다는 오히려 지나치게 그 성상들을 공경하는 경향이 심해지고 있던 것이다. 성상 공경에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던 황제 레온 3세는 이런 폐단을 제거하고자 하였다. 


 다른 문제는 소토지 보유 자유농의 몰락과 대토지 겸병의 증대였다. 소규모 자영농은 제국군의 주력을 이루었으므로 제국 정부로서는 그들의 몰락을 방치할 수 없었다. 그대로 방치하게 되면 동로마 제국은 이슬람에게 넘어갈 지도 몰랐다. 대토지 소유자들 중에서도 레온 3세가 적대시한 것은 수도원과 교회가 소유한 대영지였다. 게다가 이 양자는 면제의 특권을 누리고 있었던 것이다. 레온 3세는 성상파괴령을 이용하여 토지 개혁을 달성하고자 했다. 토지 개혁이 이뤄지면, 소규모 자영농이 증대하고, 조세 수입도 증대될 것으로 기대한 것이다.


 이런저런 이유와 목적으로 726년에 첫 성상파괴령이 내려졌다. 이 파괴령은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결정적으로 갈라놓았다. 이전까지는 교리상의 논쟁에도 불구하고 로마 교황들은 동로마 황제의 충성스런 신하로 자처했으며, 황제를 자신들의 군주로서 존경과 예의를 갖추었다. 그러나 교황 그레고리오 2세는 레온 3세의 성상파괴령을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황제에게 도전하기까지 하였다. 그는 이제 막 개종한 북방 야만족들의 힘을 빌려 무력을 행사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던 것이다. 이러한 도전에 격분한 레온 3세는 라벤나 총독에게 그레고리오 2세의 체포를 명령했고, 동로마 제국의 라벤나 총독은 황제의 명을 받아 그레고리오 2세를 체포하고자 군대를 이끌고 출동했다. 그러나 그들은 롬바르드군에 의해 격퇴되었고, 격분한 레온 3세는 남이탈리아와 일리리쿰에서의 교황의 권리를 모두 몰수하여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에게 넘겨주었다. 동로마 제국에서 한 세기가 넘은 내전 끝에 843년 동방에서 성상이 재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두 교회의 결합은 요원해 보였다. 거기에 동로마 제국이 내전에 시달리는 동안 로마 교황 레오 3세가 프랑크 왕국의 왕 카롤루스를 서방황제로 등극시킨 것은 두 교회 중심지의 골을 더욱 깊게 파는 결과가 되었다. 


 사건에 영향을 미친 마지막 요인은 롬바르드족이었다. 기독교를 신봉하였기에 교황에게 우호적이던 롬바르드족이었으나, 아이스툴프 왕이 들어서면서 이탈리아 전체를 제패하려는 야망을 드러냈다. 그는 로마 교회를 새로운 이탈리아의 중심 교구로 삼을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성 베드로의 유지를 이어받아 전 서방 세계의 기독교를 다스린다는 체면이 있던 로마 교황은 로마와 그 주변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포기하면서 롬바르드 왕국의 최고 성직자에 불과한 존재가 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렇다고 동로마 제국의 보호를 청할 생각도 더더욱 없었다. 결국 새로운 보호자를 찾아야 했고, 이때 등장한 인물이 피핀이었다. 


 751년, 왕이 되고자 했던 피핀 3세는 보호를 약속하는 대신, 그의 왕위 계승에 대한 재가를 로마 교황에게 요구했고, 교황 자카리아는 즉시 보호를 댓가로 그를 새로운 프랑크 왕국의 군주로서 인정하였다. 피핀은 752년에 로마를 위협하던 아이스툴프를 완전히 패배시키고, 중부 이탈리아와 라벤나를 차지했다. 이를 가만히 보고만 있던 동로마 제국은 라벤나를 제국령으로 귀속시키라고 요구했으나, 피핀은 이를 거부했다. 그는 자기가 롬바르드족과 싸운 것은 어디까지나 성 베드로를 위한 것이며, 따라서 성 베드로에게, 즉 그의 후계자인 교황에게 넘긴다고 선언하였다(이것이 교황령의 시초이며, 그 중에 일부 남은 것이 오늘날 바티칸이다). 이로써 서로마 교회는 프랑크 왕국과 밀접하게 결합되었으며,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하게 된다.

 

 그리고 1054년, 양대 교회는 최종적으로 분리되었다. 이 사건을 교회의 대분열(Great Schism)이라고 한다. 대분열의 주요 쟁점은 필리오케 논쟁이었다. 필리오케 논쟁이란 즉 성령의 이중발현 문제이다. 이는 얼핏 간단해 보이지만 삼위일체의 위격 정립과 직결되는 중요한 문제였다. 초기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앙고백에서는 성령이 성부 야훼에게서만 나온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서방교회의 톨레도 대주교구에서는 이렇게 되면 성자의 위격이 성부에 비해 뒤쳐진다고 생각하였고, 성령이 성자 예수에게서도 발현한다고 수정하였다. 동방 교회에서는 이를 두고 신성모독이라고 할 정도로 불쾌해 하였으며, 이전부터 소원했던 사이가 결국 돌이킬 수 없게 되어 1054년 로마 추기경들과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가 서로를 파문하여 양 교회는 영원히 분리되었다.




3, 정교회


 본래 가톨릭 - 공교회에 속하지만, 11세기의 동서대분열과 그후 종교개혁 등으로 가톨릭, 개신교 등의 서방교회가 많은 변화를 겪자 이들에 비해 자신들은 변치 않는 정통성을 지키고 있다는 뜻으로 정교회라 한다. 사실상 정교회 전례는 초대교회와 동로마 제국 시대로부터 거의 변화가 없다. 다만 대성당 양식의 화려한 전례는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 시기에 더 이상 유지할 수가 없어 사멸하였고, 수도원에서 이루어지던 상대적으로 간소한 전례만이 남았다.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은 서로 간 차이점이 많긴 하지만 서로를 정통으로 인정하는데, 정교회는 정통성을 더 강조하고 로마 교회는 보편성을 더 강조할 뿐이다.


 이 두 보편교회들은 정교회와 가톨릭 외의 다른 교단을 모두 분열되어 나간 교회라는 뜻의 '열교' 또는 '종교 공동체'로만 언급하고 있다. 보편교회와 달리 만민 제사장론을 주장하는 개신교들은 완전한 교회의 구조를 이루고 있지 못하다고 보기 때문에 한지붕 아래의 기독교인이긴 하되,교회로는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정교회 신자들의 경우 자신들은 서구의 가톨릭이나 개신교 같은 세속화 되지 않은 정통교회를 유지하고 있다는 자부심에 가득 차 있고, 이 점은 타 종파들도 인정한다(정교회는 유일하게 초대 교회가 생성한 교회의 개념을 보존하고있는 기독교 종파다.) 하지만 정교회나 카톨릭이나 엄밀히 말하면 초대 교회에서 세속화되지 않은 직통 후신라 하긴 어렵다. 정교회는 그리스 현지화가 되면서 교회가 변형되어 생성되었고, 카톨릭은 서로마 멸망이후 게르만 현지화가 되면서 정교회에서 변형되어 떨어저나갔다. 둘다 현지화를 거치면서 변형되었으며, 진짜 초대 교회와는 다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교회의 원본 구조를 흔적이나마 보존하고 있는 것이 정교회기 때문에 초대 교회에 가장 근접해 있는 것이다.


 옛 교회의 본산인 콘스탄티노폴리스(현재의 이스탄불)이나 다른 총대교구들은 로마가 망했어요가 되면서, 전부 이슬람권에 넘어갔다. 현실적인 교세로는 가톨릭에 밀리는 편이나, 형식적으로는 동등한 위치에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정교회는 스스로를 칭할 때 Orthodox라고 하기 보다는 Ecumenical Church(라틴어: Ecclesiae oecumenicum)라고 칭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정교회는 엄밀히 말해 정교회가 아니라 그냥 교회다. '에큐메니컬'은 단순히 '세계의, 세계적인' 이란 뜻 외에도 상당히 복잡한 개념인데, 교회, 즉 에클레시아(Ecclesia)가 본디 어떤 뜻인지를 이해해야 한다. 에클레시아는 불러내어 만나다란 의미, 나아가 하느님 앞에 불러 모여진 성도의 모임이란 뜻이다. 에큐메니컬이라는 것은 '세계적인', '하나됨', '하나된 공동체', '하나된 교회'를 모두 아우르는 말이다. 정교회는 초대 교회의 교회 개념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며, 그 개념이란 Ecclesiae oecumenicum이란 말 그대로 '세상 만국의, 불러모인 성도들의 공동체', 즉 교회다. 본디 가톨릭과 정교회는 한 몸이었고, 동서대분열 이전에는 세계에 단 하나의 교회만이 있었다. 당연히 기독교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정교회는 문자 그대로 교회인 것이다. 동서 대분열이 없었다면 정교회(Orthodox)란 말 자체가 없었을 것이다.


 총대주교는 영어로 Patriarch라고 하며, 뜻은 파트로네(아버지)다. 가톨릭의 교황(본래는 주교)과 마찬가지로 아버지란 뜻이며, 로마 제국에 있었던 파트로네스 개념을 반영하고 있는 셈이다. 총대주교란 표현은 원어와 좀 많이 동 떨어젔다. 가톨릭의 주교와는 달리, 정교회는 초대교회에서 생성된 개념을 그대로 달아두었기 때문에 한국어로 번역하면 뜻이 좀 많이 빠져버린다. 마찬가지로 세계 총대주교도 에큐메니컬의 다소 모호한 뜻이 빠져버리기 때문에 완전하게 번역할 수는 없다. 세계 총대주교는 대략 세상 만국에서 불러모여진 성도들의 아버지(겸 파트로네스)인 것이다.


 실시간으로 쉴 새 없이 이성의 발전에 따라 두들겨 맞은 가톨릭이나, 그 사이 올라와서 나름의 포지션을 잡은 개신교와 다르게 현대 서구문명의 영향권을 벗어난 위치에 있기 때문에 저 두 종교에 비하면 해당 사회 내에서는 종교적 영향력이 더 강하다. 사회발전 대신 치고받은 이슬람교와 비슷한 정도. 정교회가 이토록 사회에 대한 영향력이 강한 이유는 교회의 게르만 현지화에 반발한 반카톨릭 운동과 별 관계가 없었으므로 교회에 대한 비판이 적고, 또 까일 점이 비교적 적은 편이며, 무엇보다도 정교회 특유의 "독립 교회"(Autocephaly) 구조의 영향이 크다.


 정교회는 교회들의 집합체이기 때문에 어느정도 규모가 커진 교회는 각 나라별로 "독립"된 교회가 되게 되어있다. 옛날 초대 교회의 구조를 꽤 보존하고 있는 것으로, 지금은 문화권을 따라서 독립 교회들이 있는 경향이 크지만, 옛날에는 아예 왕국마다 교회가 따로따로 있었다. 따라서 각 지역들이 카톨릭에 비해 훨씬 적은 통제하에 알아서 교회를 꾸려나가기 때문에 각 지역의 문화 그자체인 것이 정교회다. 이 영향력은 중세때 서방세계에서 카톨릭이 가지는 입지의 그것을 방불케할 정도다. 러시아 정교회는 러시아 문화 그 자체이며, 그리스 정교회도 그리스 문화 그 자체이고, 기타 비 칼케돈파 정교회 계열 교회들도 마찮가지다.


 동유럽이나 중동의 가톨릭 교회 중에서는 외견이 정교회 같은 종류도 있는데, 이는 로마 교황의 수위권 아래로 들어간 옛 정교회 소속 교회들이다. 그 외 콥트 정교회나 시리아 정교회 등 단성론적 교리를 가진 오리엔탈 정교회나 아시리아 동방교회등 네스토리우스파 교회들도 외견상 정교회와 유사한 경우가 많다.


 네스토리우스파 및 단성론 교리를 유지하는 오리엔탈 정교회와는 다르다. 이들 초기 분리교회는 공의회에서 의견차로 갈려 나갔기 때문에 정교회라는 명칭을 쓸 수 없지만, 자신들이 정통이라는 논지로 정교회를 자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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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 가톨릭과는 원래 하나의 교회였지만, 초대 교회의 다섯 총대주교구(로마, 콘스탄티노폴리스,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들 중 동방의 세 총대주교구(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가 이슬람의 세력권하에 들어감으로써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가 2강으로 부상했다.


 이 때부터 로마 교황은 '그리스도의 대리인'를 자칭했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는 '전 세계의 총대주교'를 자칭했다. 그 이후로 계속 뭔가 이상한 타이틀이 계속 덕지덕지 붙어가기 시작하는데,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아무튼, 이 두 교구의 수장들이 관할하는 교회들이 지금의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의 시초이다.


 두 교회는 중세 초의 혼란기에는 서로 협력하고 있었지만, 상대적으로 시대가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그리스-헬레니즘적인 동방과 라틴-게르만적 서방의 이질적인 정체성과 국제 정치 알력 등으로 점점 사이가 멀어졌다. 그 이후 성상파괴론과 삼위일체론 등 신학적 문제, 그리고 현실적인 세력권 문제로 격하게 치고받고 싸웠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가 허수아비인 다른 세 총대주교들의 서명을 받아 로마 교황에게 파문장을 날리거나, 교황이 서방 주교들만이 참석한 공의회를 열어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를 파문하거나... 물론 파문당한 장본인들은 서로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동방과 서방 교회간의 쟁점은 수도 없이 많았지만 가장 중요한 것들만 뽑자면 대략 세 가지 정도이다.


 첫 번째는 교황의 수위권. 로마 제국 시절에 다섯 총대주교좌에는 서열이 매겨졌는데, 이는 순서대로 로마, 콘스탄티노폴리스,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이었다. 이 서열에 관해 동방과 서방에서는 격한 논쟁이 오고갔다. 로마에서는 서열을 근거로 로마 교황이 모든 교구를 지배할 권리가 있다고 보았고, 콘스탄티노플에서는 로마의 교황이 베드로부터 교황직을 이어왔으며 예수의 후예라는 점은 인정하나, 다섯 대주교 중 한 명이며 그들과 동등한 위치에 있다고 주장했다. 로마정교회는 교황도 그 서열이 단지 명예에 해당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는 신학적이라기보다는 정치적인 쟁점으로, 현실적으로 보았을 때 가장 중요한 갈등이었다.


 두 번째는 성상 논쟁이다. 이슬람과 접해 있는 소아시아의 귀족들은 성상을 우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후 8세기에 권력을 잡은 소아시아 출신의 레온 3세가 성상을 거부하면서 성상파괴주의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의 아들 콘스탄티노스 5세가 신학적인 사유를 동원하여 나름대로 논리적으로 성상숭배론자들을 열심히 까댔으나 신학적 지반은 이슬람과 단성론의 논지를 거의 그대로 따온지라 매우 빈약했다. 이후 무수한 박해와 동시에 수많은 문화재가 파괴되고, 결국은 다시 성상을 인정하게 되었다. 성상파괴주의는 내적으로는 유럽 및 소아시아 해안지대 속주들과 대립하는 소아시아 내륙 속주 간의 알력, 비잔티움 제국의 세속 권력과 교회 권력 간의 내부 투쟁이 얽혀들어 전개되었다. 대외적으로는 콘스탄티노플 교구를 굴복시키려는 로마 교황의 세력까지 합세하였고, 이는 결국 한세기 반에 걸친 내전으로 치달았다. 이 논쟁은 서기 787년 레온 4세의 부인으로서 아들 눈알 뽑고 여제가 된 아테네의 이레네가 니카이아 공의회에서 성상파괴파를 이단으로 간주하였고, 서기 843년 섭정 황후 테오도라에 의해 종식되고 성상이 다시 인정받게 되었다. 그렇다 해도 성상파괴파에 대한 양보로 정교회권에서는 되도록이면 성상 중 성화(그림)만을 사용하도록 권고하였고, 정교회권에서는 이 날을 축일로 지정하였다. 맥락 상 많이 다르긴 하지만 어떻게 보면 정치적으로 이용된 자문화 파괴적 사건이라는 점에서 중국의 문화대혁명과 비슷한 면이 있기도 하다.


 세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쟁점은 삼위일체론이다. 7~8세기 경 톨레도 대주교구에서는 니케아 신경에 수정을 가했다. 기존에는 성령이 성부에게서 발현한다고 되어 있었으나, 톨레도에서는 성자의 위격 또한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래 '성령께서는 성부에게서 발하시니'라고 되어있던 것을 '성령께서는 성부와 또한 성자에게서 발하시니'라고 수정하였다. 라틴어 신경에서 '또한 성자에게서'를 뜻하는 것이 'filioque('filio(아들에게서)'+'que(또한)')'라는 단어이기 때문에, 이것을 필리오케 문제라고도 부른다. 한 세기가 지나자 전체 서방교회가 이를 받아들였으나, 동방교회에서는 당연하게도 이 수정을 서방 교회의 독단적인 결정으로 여겨 크게 분노했다. 서로의 입장이 팽팽히 갈리는 가운데 타협안은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었고, 두 교회간의 사이에는 불화만이 오갔다.


 그러다 결국 1054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미카일 케룰라리오스와 로마의 사절단의 상호 파문으로 최종적으로 두 교회가 분열되었다. 이는 동로마 제국의 특이한 상황과 남부 이탈리아에서의 엇갈리는 이권에서 기인하였다. 전통적으로 동로마 황제는 너무나 거대하고 강력한 자국의 교회를 견제하기 위해 항상 로마와 제휴하곤 했다. 11세기 동로마 제국은 내부의 세력 다툼으로 약해져 있는 상태였고, 황제의 권력 또한 매우 약해져 총대주교의 권력이 황제를 압도할 정도로 강해져 가고 있었다. 따라서 당시 황제였던 미카일 7세는 로마 교황에게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를 찍어눌러달라는 의미의 서한을 보냈다. 당시의 교황 레오 3세는 즉각 황제의 요구에 부임하여 로마 교회에서 가장 완고하며 호전적인 세 추기경을 사절로 보내 공의회를 개최하도록 했다.


 그러나 당시 총대주교였던 미카일 케룰라리오스 또한 만만치 않은 인물로, 황제를 구워삶아 황제로 하여금 로마 추기경들을 오히려 적대하게 했다. 11세기에 노르만인들은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를 정복하여 이곳의 정교회 교구를 강제로 교황에게 복속시켰는데, 이를 구실로 삼아 오히려 교황을 비난하게 한 것이다. 이 기간 중 내내 격렬한 논쟁이 오갔으며 양자간 합의는 없었다. 결국 열이 단단히 뻗친 세명의 추기경들은 어느날 밤 성 소피아 대성당의 제단 위에 총대주교에 대한 파문장을 올려놓고 로마로 떠나버렸다. 다음날 아침 이것을 보고 격노한 총대주교는 그 세명을 파문하고 로마 교황의 이름을 제단에서 지워버렸다. 당시 동서 교회간의 파문 사건들은 위에 말했듯 무척이나 빈번했지만, 이번 사건은 꽤나 양측이 격노할 만한 일이었기에 학자들은 이 날 이후로 동서 교회가 최종적으로 분열되었다고 본다. 재밌는 점은, 당대인들은 이 사건들에 대해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만큼 동서교회 간의 불화와 분리가 이미 놀랍지 않은 일이었다.


 이후 교회 분열은 십자군 전쟁 시기에 더욱 심화되었다. 동로마 제국은 1차 십자군 때부터 십자군들을 적으로 규정하였다. 즉, 십자군 세력으로는 동로마의 지원이 절실한 상황이었으나 동로마는 동방의 십자군 세력들을 이이제이의 장기말 중 하나로 취급하였다. 이 때문에 십자군과 동로마 제국 간의 사이에는 깊은 골이 파이게 되었다. 이 불신은 제4차 십자군 전쟁 중 일어난 1204년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으로 이어졌고, 이후 동방과 서방은 돌이킬 수 없는 불화에 빠져들게 되었다. 그리스의 한 역사가는 십자가를 내미는 악마보단 초승달을 내세우는 이교도가 훨씬 낫다고 기록할 정도였다.


 십자군 이후로도 많은 신학적 차이들이 발생했다. 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14세기의 수도사 그레고리오스 팔라마스가 주창한 헤시카즘이다. 헤시카즘은 인간의 이성으로 신을 이해하자는 골자의 당시 서방 신학 주류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이론이다. 이는 간단히 말해 인간의 인지능력으로는 신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전제 아래에 논리적인 생각을 거부하고, 단순한 기도와 묵상을 통해 신을 영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평신도들에게는 호응을 얻었으나, 당연하게도 당대의 지식인들과 신학자들에게 큰 반발을 샀다. 헤시카즘은 고대 그리스부터 이어진 학문적 전통상 받아들이기에 매우 불쾌한 것이었고, 결국 팔라마스는 교회에 의해 파문되었다. 하지만 그의 사상은 당시 동로마 제국 내부의 정치적 투쟁에 이용되었고, 결국에는 세력의 방향추가 돌아가 교회가 팔라마스의 파문을 철회하고 헤시카즘을 정식 교리로 인정하게 되었다. 이로써 삼위일체론 이외에도 서방과 동방의 신학에 큰 괴리가 생겨났다.


 15세기 초반에는 동로마 제국의 황제들이 멸망 직전의 국가를 구하기 위해 교황에 굴복하였다.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는 피렌체 공의회 이후로 교황의 수위권을 따를 것을 선언하였으나, 전체 정교회 세계에서 극심한 반발이 있었고 이를 인정하는 국가는 동로마 제국 뿐이었다. 하지만 동방교회 내에서도 반발이 대단해서 황제 따라간 통합 찬성파 일부는 돌아가면 맞아죽을까봐 이탈리아에 눌러앉았다. 이들 성직자들과 학자들은 르네상스의 촉진제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예컨대 그리스 출신의 베사리온 추기경이 베네치아에 기증한 장서가 교황청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던 장서의 수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어쨌든 결국 정교회는 당시의 총대주교가 사임하고 10년도 되지 않아 피렌체 공의회의 결정을 무효화하였다. 그렇지만 동로마 제국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는 다시 교회 통합을 선언했다. 대체 뭐 어쩌란 거야. 하지만 교회 통합은 말뿐인 것이었고, 실질적으로는 동로마 제국을 친통합파와 반통합파로 분열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거기에 동유럽의 정교회권이 반발하여 정교회 측에서도 각 교회 간 연결이 크게 약해지게 되었다.


 이후 양대 교회의 관계는 20세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에큐메니컬 운동에 양 교회가 참여하고서야 어느정도 회복되기 시작했다. 1965년 교회 분열 이후 1400년 만에 교황 바오로 6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문해,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아테나고라스가 역사적인 만남을 이루었으며 1054년의 상호 파문을 철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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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흔히들 가톨릭에서 정교회가 분리되었다고 이해하나, 그렇게 간단히 규정짓기는 힘들다. 정확히는 똑같이 강력한 두 중심지 사이의 연결이 끊어진 것이지, 한 쪽에서 한 쪽이 떨어져 나왔다고 하기에는 명확한 계기가 되는 사건도 시기도 찾기 어렵다. 상호파문도 한두 번 한 게 아니니(…).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은 고대 로마 제국 이래로 기독교 세계의 두 중심지로 기능해 오고 있었으며, 상호간의 위계는 세속권과 성직권이 서로 얽혀 복잡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처음에 세속권은 동로마 황제가 우위에 있었으나, 9세기 초반 동방 제국의 황제인 미카일 1세가 샤를마뉴를 프랑크인의 황제로 인정하여 형식적으로는 두 황제가 존재하게 되었다. 교회 서열로는 교회법 상 교황이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보다 우위에 있었으나, 이 우위를 전체 교회에 대한 지배력인지 아니면 그저 같은 총대주교들 중 첫 번째의 지위인지에 대해서는 전 세기를 막론하고 의견이 팽팽히 갈리고 있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서열이나 권위 같은 것이 아니라, 5세기 말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후 동방과 서방 교회가 서로 아무런 간섭을 받지 않고 관할 교구들에 대해 영향력을 유지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어느 한 쪽에서 다른 한 쪽이 떨어져 나갔다고는 볼 수 없다.


 이 당시 황제가 교황의 직위까지 대신하는 황제교황주의가 있었다고 여겨지고 있으나, 사실 황제교황주의는 없었다. 황제교황주의라는 말은 당대 동로마 황제의 전제권력을 비유해서 나타내는 단어이지, 황제가 교회까지 장악하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어째선지 한국에선 황제가 교황까지 겸한다고 왜곡되어 있는데, 아마 먼나라 이웃나라 탓이 클 것이다. 그런데 수능 교과에서도 황제교황주의라는 용어가 사용된다.(…) 과학교과서도 그렇고 대체 왜 이 모양이야. 황제는 그리스도교 세계의 보호자이며 총대주교 선출 동의권을 가지지만 결국은 평신도이다. 황제는 교회의 수호자이며 사도들과 동격으로 여겨지긴 했으나, 교회 내부에 관련된 것은 건드릴 수 없었다. 물론 13세기까지는 황제가 총대주교에 비해 우위를 점하고 있으며, 교회가 대체적으로 황제의 입김을 받았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총대주교들 또한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을 토대로 열심히 황제들을 꺾어누르려고 시도했으며, 어떤 때는 총대주교가 황제를 폐위시키기도 했다.


 가톨릭에서 부제(Deacon)라고 하는 직위를 정교회에서는 보제라고 한다. 하지만 한국어 번역상의 문제로 '받들다'라는 의미의 그리스어 '디아코노스(Διάκονος)'에서 나온 것은 같다. 결혼한 이가 사제가 되는 건 가능하나 주교는 결혼하지 않은 이에서만 뽑고, 서품 뒤의 사제는 결혼, 재혼이 불가능하다.


 성체성사는 성체(빵)만을 주로 모시는 가톨릭과 달리 양형 영성체(빵+포도주)를 주로 한다. 가톨릭의 양형 영성체는 빵을 포도주에 적셔 입에 넣어주지만, 정교회의 양형 영성체는 포도주가 담긴 성작에 빵을 넣어 수저로 떠먹이는 방식을 취한다. 성찬예배의 예식은 가톨릭의 미사와 비교해도 화려하다. 가톨릭에서는 부득이한 경우 정교회에서 예배를 볼 수 있게 하고 있으며, 이론상 정교회의 성찬례는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의 적법한 성사이므로 여기에 참석하여도 미사참례의 의무를 충족한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가톨릭 교회가 공심제 전통을 성찬례 당일에서 성찬례 1시간 전으로 완화하였고, 현실적으로 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단식 및 금육 등의 의무를 소홀히 하고 있기 때문에[7] 가톨릭 신자가 정교회의 성체성사를 하면 정교회의 입장에서 독성이 될 위험이 매우 높다. 결국 신자 개인이 정교회 성당에 찾아가서 성찬 전례까지 포함하여 예배에 참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가톨릭과는 달리 완전한 중앙통제가 아니라 그리스 정교회, 러시아 정교회 식으로 지역별로 분산되어 있다는 특징이 있다. 원래 독립 교구는 서열 상으로 로마, 콘스탄티노폴리스,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의 다섯 총대주교구 뿐이었으나 이후 다른 교구들이 독립적인 위치를 획득하면서 몇몇 교구가 총대주교좌로 격상되었다. 이 중 대표적인 경우가 모스크바 총대주교좌.


지금의 정교회의 각 국가별 독립적 위치는 동로마 제국 시대에서 유래하였다. 슬라브족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과정에서 동로마 제국 정부가 불가리아, 러시아 등의 슬라브족 교구들에 독립적인 지위를 보장해 준 것이 독립수장교회의 시초이다. 이후 동로마가 몰락하면서 총본산인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구가 마비되었기 때문에 정교회 각 교구들은 각각 독자적인 행보를 걷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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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의 교구 목록들은 모두 정교회 세계에서 공인받는 교회들로 전례 중 이 순서대로 주교들에 대한 축복을 기원하는 '딥디크(Diptych)'라는 기도문을 읊을 때 나온다. 하지만 첫 타자인 로마 교회는 1054년의 교회 동서분열 이후 삭제되어 버렸다.


초대 교회에서 이어온 5개 총대주교구: 서열 순서로 정리되었다.


로마 총대주교구 - 서방 교회의 총대주교, 보편 교회의 최상주교, 사도들의 으뜸인 사도 베드로의 후계자, 그리스도의 대리인

교회 분리 이전의 공식 칭호로만 칭한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로마도 엄연한 초대 총대주교구 중 하나이다. 이러한 이유로 서로 인정한 이후에도 가톨릭에서는 정교회의 교구들을 로마 교황청 산하의 교구들로 보며, 정교회에서는 로마 교황청 역시 총대주교구의 하나로 본다. 이것은 애초에 교회 분열의 가장 큰 이유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구 - 새로운 로마인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이자 전 그리스도교 세계의 총대주교, 사도 안드레아의 후계자

전성기의 관할구역은 전 발칸 반도와 소아시아,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 그리고 조지아와 러시아였다. 원래의 서열은 4위로 안티오키아 다음이었으나 중세 초에 2위로 격상되었다.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구 - 알렉산드리아와 전 아프리카의 총대주교

안티오키아 총대주교구 - 안티오키아와 전 중근동의 총대주교

초기 명칭은 전 동방의 총대주교였으나, 아시아가 워낙 넓은 대륙인데다 당시의 로마 제국 국경 밖에서는 관할권을 행사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중근동으로 수정되었다.

예루살렘 총대주교구 - 예루살렘과 전 팔레스타인의 총대주교

예루살렘과 팔레스타인이 기독교에 있어서 성지 중의 성지이기 때문에 총대주교구가 되었으나 관할범위가 가장 작다. 

주의해야할 점은, 칼케돈 공의회에 따른 비칼케돈파 교회가 분열되어 나갔을 때, 비칼케돈파가 우세했던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 총대주교구의 대다수 교회공동체들은 자기네들의 비칼케돈파 교계제도를 계속 유지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설명하고 있는 정교회의 세 총대주교좌 중 두 곳은 엄밀히 말하면 비칼케돈파 성직자들이 해임된 이후 콘스탄티노플에서 후임으로 임명한 성직자들의 후계인 것이다. 즉, 위의 두 총대주교좌는 해당 지역의 기독교도 중에서도 극소수인 칼케돈파 교회만의 총대주교좌라는 것이다. 예컨대 안티오키아 총대주교좌는 시리아 기독교도들의 다수를 차지하는 비칼케돈파 시리아 정교회의 총대주교좌와, 극소수인 칼케돈파 정교회의 총대주교좌가 따로 있다. 덤으로 마론파 총대주교좌도...


10개의 독립교회: 이하는 따로 서열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스 정교회 - 아테네와 전 그리스의 대주교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구의 몰락 이후 오스만 제국의 지배 시절에도 기독교 신앙을 유지하여 정교회의 신앙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 사회 및 전체 정교회에 상당한 영향을 주고 있다. 이 때문에 한때 정교회를 '그리스 정교회' 또는 '희랍 정교회'라고 표현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리스 정교회의 수장이 왜 총대주교가 아닌가 하면, 형식상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의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본래는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구에 소속되어 있었지만, 그리스가 독립한 뒤에도 이스탄불=콘스탄티노플은 계속 오스만 제국의 영내에 있었으므로 정치적인 문제로 아테네에 대주교구를 설치하여 분리한 것이다. 단, 그리스 영토 내에 있는 '아토스 산'의 수도 공동체, 그리고 크레타섬과 도데카네스 제도는 총대주교구 직할이다.

러시아 정교회 - 모스크바와 전 러시아의 총대주교

세르비아 정교회 - 세르비아의 총대주교이자 베오그라드와 카를로비치의 수도대주교

루마니아 정교회 - 왈라키아의 수도대주교이자 루마니아의 총대주교

불가리아 정교회 - 소피아와 불가리아의 총대주교

알바니아 정교회 - 티라나와 전 알바니아의 대주교

폴란드 정교회 - 바르샤바와 전 폴란드의 수도대주교

체코와 슬로바키아의 정교회 -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도대주교

조지아 정교회 - 트빌리시와 므츠헤타의 대주교이자 조지아의 총대주교. 카톨리코스(Catholicos)라는 명칭으로 불린다.

키프로스 정교회 - 신 유스티아니아와 키프로스의 대주교

자치독립교회

시나이 정교회 - 예루살렘 총대주교구 소속, 수장은 시나이와 라이트의 대주교이자 성 카타리나 수도원의 대수도원장 겸임

일본 정교회 - 모스크바 총대주교구 소속, 수장은 도쿄의 대주교이자 전 일본의 수도대주교.

핀란드 정교회 -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구 소속이며 수장은 카렐리야와 전 핀란드의 대주교.

에스토니아 정교회 -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구 소속이며 수장은 탈린과 전 에스토니아의 수도대주교.

우크라이나 정교회 - 모스크바 총대주교구 소속이며 현재 키예프 총대주교구와 키예프 수도대주교구로 분열 상태로 모스크바 총대주교구 소속의 우크라이나 자치교회가 공인되고 있다.

중국 정교회 - 청과 러시아가 수교할 때 중국에 전래되었다. 베이징 대교구, 상하이 대교구가 존재했고 1956년 모스크바 총대주교구에서 자치권을 얻었으나... 문화대혁명으로 작살났다. 안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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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 정교회의 경우 10세기에 키예프 대공국이 국교로 받아들였고 11세기 러시아 전역에 확고히 자리를 잡았다. 초기에는 동로마 제국에서 파견된 그리스인 수도대주교의 지도를 받았으나, 동로마 제국이 멸망한 15세기를 기점으로 독자적인 대주교구를 가지게 되었다. 이후 로마노프 왕조 시대에 모스크바 대주교구가 총대주교구로 격상되었으며, 지금까지도 러시아인의 70% 가량이 믿고 있다.


 러시아에서는 정교회를 받아들인 시점이 늦었기에 몇몇 왜곡된 정보들도 있었고 이것이 러시아의 민속 신앙과 어우러져서 상당히 미신적인 성향을 많이 보인다. 예를 들자면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심은 전통적인 슬라브 신앙의 대지모신과 결합되었고, 이런 경향은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죄와 벌》에서도 나올만큼 대중적이다. 17세기의 대주교 니콘이 이를 바로잡기 위해 가톨릭과 그리스 정교회의 전례를 도입하여 교정 운동을 펼친 적도 있었지만, 오히려 교회가 심각하게 분열된 데다가 정치적 논리 때문에 피만 잔뜩 보고 교회가 국가에 완전히 종속되는 결과를 빚었다. 심지어 황제가 총대주교를 임명하지 않아서 러시아 제국이 몰락할 때까지 약 250년 간 총대주교좌가 공석이었다. 이 구도는 러시아 제국이 해체되고 소련 시기까지도 계속되었다.


 키예프 러시아에서 국교를 정할 당시 블라디미르 공은 정교회, 가톨릭, 이슬람교, 유대교 4개 중에서 선택하려고 했는데, 이슬람교는 술과 돼지고기를 못 먹게 하니 아웃, 유대교는 블라디미르 공이 "왜 유대인이 선택받았다는데 당신네는 나라 없이 떠돌아 다닙니까?"라는 질문에 랍비가 아무 말 못해서 아웃. 그래서 두 기독교가 남아서 두 쪽 다 사절을 보냈는데, 가톨릭측 사절이 갔던 독일은 거의 암흑시대로서 야만족과 다름없는 안습이었기 때문에 아웃, 정교회측에서는 휘황찬란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대성당에 데려가서 그 화려함에 당장 정교회를 선택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런데 사실 그보다는 접근성과 당시 권력의 차이 문제가 있었다. 러시아는 로마보다는 비잔티움과 훨씬 가까우며 당장 직접적인 무역루트나 영향력 면에서 여러모로 정교회를 택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 크기만큼 신자 수도 많지만, 소비에트 연방 당시 극심한 탄압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제2차 세계대전 때 스탈린은 나치 독일의 침략을 막는 데에 종교적 열의를 이용하기 위해 다시 정교회 신앙을 부활시켰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위험한 곳에는 정교회 이콘(성화)을 갖다놓을 정도. 러시아의 도시전설에 의하면 스탈린이 꿈을 꾸다가 정교회가 부활되면 전쟁에서 이길 것이라는 계시를 받았다고.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스탈린 치하에서 어느정도 정교회가 복원되기는 하지만, 다음에 집권하는 흐루쇼프의 탄압을 받았다.


 소련이 붕괴된 이후에는 거의 국교화되어, 보리스 옐친이나 블라디미르 푸틴은 예배에도 자주 참여했다. 특히 공산당 붕괴 이후 러시아에서는 아노미 상태에 빠진 국민들이 사이비 종교에 홀리는 예도 적지 않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대비로서 정교회를 밀어주는 정책이 강화되었다. 실제로 옴진리교가 한 때 러시아에서 크게 세력을 떨쳤으며 러시아인 신도들은 아사하라 쇼코 교주가 체포되자 무력으로 아사하라 교주를 탈환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소비에트 연방 몰락 이후 각 국가별 교회문제 때문에 대판 다투기도 하였다. 우크라이나 등 구 러시아 영토의 교회는 각 국가의 교회이나 그 교회 건물의 소유권을 러시아 정교가 소유하고 있었는데, 각 국가들의 독립 이후 러시아 정교회가 이를 바탕으로 수위권을 주장하면서 독립교회를 인정하지 않아 갈등을 빚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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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정교회는 구한말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성당 부지(지금의 경향신문 자리)를 수여한 것으로 시작된다. 이후 1900년에 입국한 러시아 정교회 소속 흐리산프 솃콥스키 신부의 주도로 이해 2월부터 선교가 시작되었고 1903년에는 성당을 건립했으나, 러일전쟁으로 선교사가 모두 추방되는 바람에 1906년 재입국이 허용될 때까지 제동이 걸렸다. 게다가 1910년에는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그래도 1912년에는 첫 조선인 사제인 강탁 신부를 배출했고 이어 자체교육기관인 보정학교를 세우기도 했지만, 러시아 본국에서 1917년에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면서 해외 선교부가 폐쇄되는 등 복잡한 사정으로 인해 한국을 신경쓸 수가 없게 되었다.


 한국 정교회는 강탁·김희준·김의한 신부 등 3명의 사제를 배출하면서 러시아인 선교사와 교인이 간신히 명맥을 이어나갔고 1946년에는 교구도 개설했다. 하지만 1947년에 서품을 받은 한국인 김의한 신부가 한국전쟁 중 납북되어 처형되고 성당도 파괴되고 말았다.


 교회의 핵이 되어야 할 성직자의 부재로 인해 맥이 끊어질 위기에 처했던 한국 정교회는 한국전쟁 당시 그리스군의 종군 신부로 입국했던 안드레아스 할키오플로스 신부가 선교에 힘쓰고 한국인 문이춘 신부가 일본에서 신부 서품을 받도록 도와주면서 점점 교세가 확장되었다. 참전한 그리스 병사들이 월급에서 1달러씩 갹출하여 성당 재건 기금으로 보태기도 했다. 현재 성당에 걸려 있는 종 5개 중 2개는 러시아 정교회 시절부터 남아있는 종이고 3개는 한국전쟁 후에 제작한 것인데, 이 종 제작에도 그리스 참전군인들의 성금이 들어갔다고 한다.


 이로 인해 한동안 괴멸 상태나 마찬가지였던 한국정교회의 소속은 러시아 정교회 관할에서 그리스 정교회로 넘어갔고, 1956년부터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구 소속의 그리스 정교회 관할로 들어가 지금에 이르렀다.


 규모가 작은 한국 정교회는 한동안 다른 나라 정교회의 교구에 속했다. 1956년에서 1970년까지는 미국 대주교구, 1970년부터 2004년까지는 뉴질랜드 대주교구 소속[13]으로 뉴질랜드를 거쳐야만 콘스탄티노플과 소통할 수 있었다. 하지만 교회 규모의 확대를 인정받아 2004년 6월 20일부로 총대주교좌 소속의 독립 대주교구가 되어 콘스탄티노플과 직접 오갈 수 있게 되었다.


 2010년 현재 그리스 출신의 암브로시오스 아리스토텔리스 조그라포스 대주교가 제2대 한국교구 대주교로 재임하고 있으며, 초대 교구장인 소티리오스 트람바스 대주교는 첫 그리스 출신 주임사제로서 1975년 12월 1일부터 2008년 7월 20일까지 30여 년 이상 한국에서 성직자로 재임하였다. 한국에서 선박 제작 주문을 많이 한 그리스인들이 한국에서 선박을 만들고 인양식을 할때는 그리스 정교 사제가 축복을 해주는데, 특히 돈이 많은 그리스 부자들은 아무래도 체면상 한국에서 모실 수 있는 최고위 사제이신 트람바스 대주교를 많이 모셔와서 배에 축복을 내렸다. 조선소 근처에서 살았거나 근무한 사람들이라면 볼 기회가 있었을 수 있는데, 검은 수단을 입고 검은 길다란 사각형 모자에 나무 구슬로 이루어진 목걸이를 착용한 백인 노인이 이상한 나뭇가지에 물을 적셔 새로 제작된 배에 뿌리면서, 저울 같은 것에 향을 태우는 걸 봤다면 트람바스 대주교였을 가능성이 높다.


 현재 한국 내의 신자 수는 대략 2~3천명 (최대 4천명 예상) 정도이며, 한국 정교회의 중앙성당인 성 니콜라스 성당은 서울 마포구 아현동에 소재한다. 주로 재한 러시아인을 비롯한 동구권 신자들이 많이 미사를 드리고 있다. 이 성당은 돔 양식으로 건축되어 있으며, 그리스 정부에서 건물을 지어주었다. 한국 정교회 대교구 다만 이 건물이 지어진 부지를 과거 러시아 정교회가 있던 바로 그 자리를 팔아서 마련한 돈으로 구입했던 탓에, 한러수교 이후 러시아 정교회 측에서 자기들 거니 돌려달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물론 들어줄 리가 없는 소원이라 할 수 없이 한국 주재 러시아인들은 러시아 정교회가 아닌 그리스 정교회 예배에 나가고 있다. 한국 정부에다가도 옛 부지에 대한 보상 요구를 한 모양인데 한국 정부가 들어줄 기미는 없는 듯하다.


 러시아 정교회 측에서 다시 한국에 관심을 보이는 듯, 한국러시아정교회라는 정교회가 생겼다! 말 그대로 러시아 정교회 교구 현재 강원도 삼척에 성안나 성당이라는 성당이 하나 있다. 하지만 이는 한국 내 정교회 신자들에게 전혀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이와 별도로 한국 내 러시아인들을 위한 고려인 신부가 파견된 상태이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러시아 정교회 교구에서 러시아정교와 해외러시아정교를 구분하는 것인데, 전자는 러시아 본토의 정교회이고 후자는 소비에트 당시 공산정권에 협력하던 정교회에 반발해 몇몇 주교들과 신부들이 미국으로 망명해 세운 교구이다. 이 두 교구는 현재 통합되었으나 운영은 따로 하고 있다. 한국러시아정교회는 해외러시아정교 소속이다.


 바르톨로메오스 세계 총대주교가 2005년에 방한, 직접 정교회 한국대교구 총대주교청 관할 50주년 기념 대영광식을 집례하기도 했다. 1995년과 2000년에도 방한한 적이 있으며 2005년에는 환갑을 맞이한 바르톨로메오스 총대주교는 그리스계 터키인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감독 출신이다. 정확한 칭호는 새 로마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대주교 및 세계 총대주교 바르톨로메오스 1세 성하로서, 터키에서는 '이스탄불의 그리스 정교회 총대주교 바르톨로메오스 1세'로만 인정한다.


 북한 지역은 엄밀히 말하면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구와 모스크바 총대주교구가 미묘하게 겹친다. 우선 콘스탄티노폴리스 측 정교회 한국대교구의 관할권은 대한민국 전체가 정식이다. 그러나 평양에 세워진 최초의 정교회 성당인 '성 삼위일체 성당', 일명 정백사원은 모스크바 총대주교구에서 세워준 성당이므로 사실상 북한 지역은 모스크바 총대주교구가 관할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아무래도 정치적으로 그나마 가까운 나라이기 때문에 가능한 점으로 보인다. 더군다나 같은 보편교회이자 북한선교로는 훨씬 오래되고 융성했던 가톨릭이 사제조차 없어서 공소예절로 겨우 버티는 와중에 이쪽은 신부가 한 명도 아니고 둘, 그것도 북한인 신부로 상주하면서 성사를 집전한다. 역시나 러시아와의 교류가 그래도 많다는 점에서 기인한 듯, 국가차원에서 조직한 '조선정교위원회'라는 신자 단체가 존재한다. 조선그리스도교연맹, 조선가톨릭교연맹과 비슷한 집단이지만, 진짜 북한인 신자 수는... 아무도 모를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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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동방 정교회'라고 불리지만 그냥 '정교회'라고 해야 옳다. 동방 정교회라는 호칭은 서로마 지역에 있던 교회, 즉 로마 가톨릭에 대응한 호칭일 뿐이다. 정교회를 그리스 정교회니 러시아 정교회니 하기도 하는데, 이는 한국 천주교라는 종교가 따로 있지 않는 것처럼 해당 정교회가 속한 교구명을 붙인 호칭일 뿐으로 독립된 분파가 아니다. 예를 들어 '불가리아에 있는 그리스 정교회' 같은 말이 나오는데 역시 있을 수 없는 말. 마찬가지로 정교회의 한국교구는 한국 정교회라고 부른다. 한국 그리스 정교회 이렇게 부르지 않는다.


 다만, 정교회란 정확히는 각 지역들의 독립된 교회들을 세계만민의 하나된 공동체로 묶어둔 것이며, 따라서 개별 교회들이 있다. 이런 구조를 Autocephaly라 한다. 그리스 정교회나 러시아 정교회처럼, 총대주교구별로 교회가 분리되어있으며, 이 모든 교회들을 묶은 Ecumenical Church가 바로 정교회다. 모든 교회들의 총대주교인 Ecumenical Patriarch 를 통해 이 독립 교회들이 묶여있는 것이다. 각 교회들은 기본적으로 스스로 교회를 꾸려나가야한다.


 따라서, 대부분의 정교회들은 그냥 Ecumenical Church라고 하지만, 개별 정교회에 소속된 신도들을 위해 해외에 설립된 교회의 경우에는 지역명을 정교회 앞에 붙여서 표현하기도 한다. 주로 이민자들이 중심이 된 미국의 정교회들이 이렇게 하는 경우가 많다. 그 이유는 미국의 정교회의 경우 이민자들의 출신 지역의 정교회에서 파견된 선교사들에 의해 설립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각각의 독립 교회들과 총대주교구들은 신앙의 큰 틀에서는 같지만 전례나 의식 등에서 다소의 차이를 보이기 때문에[15], 각각의 독립 교회들의 해외 신자들을 위한 교회를 설립하게 되어 이러한 형식이 된 것이다. 위의 한국 러시아 정교회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미국에 지어진 교회들도 그냥 Ecumenical Church라고 하고 딱히 독립 교회 이름을 안 붙이는 일도 많다. 이게 더 에큐메니컬하기도 하다.(...)


 한국은 각 이민자들의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지 않아, 외국인 신자들과 한국인 신자들이 모두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으며, 오리엔탈 정교회 신자들이 일부 참석하기도 한다. 이 중에는 에티오피아인들도 가끔 있었으며, 콥트 기독교인들도 있었으나 신촌에 새로이 그들의 성당을 만든 이후엔 나오지 않게 되었다. 또한 조금은 여러가지 면에서 다른 모습을 보이는[16][17] 러시아 교인들을 위해 모스크바 총대주교청에서 고려인 신부를 파견하여 러시아어 전례를 실시하기도 했었다. 이 신부가 2011년까지 봉직하다가 러시아의 투바 공화국의 주교로 서품되어 한국 정교회를 떠난 이후, 러시아인들을 위한 성직자는 공석이었다가 우크라이나인 신부가 파견되어 이르고 있다.


 한국러시아정교회는 해외러시아정교회 소속인데 이 해외러시아정교회의 위치가 다른 교회들과의 관계 속에서 꽤 애매하게 처리되었기 때문에 사실 보편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공동체였다. 다만 해외러시아정교회와 본토러시아정교회의 통합이 이뤄졌기 때문에 향후 이 공동체에 대한 위치는 변동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의 정교회에서는 이른바 '살아있는 교회'라 일컬어진 본토 모스크바 총대주교청을 비록 공산당에 공식적으로 순종한다고 해도 적법한 공동체로 인정해주었다. 일단 남아있는 대다수 러시아인들을 위해 갖은 수난을 당하는 공동체라는 점을 높이 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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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톨릭과 달리 이슬람교의 공세에 직접적으로 노출되어 있었다. 물론 가톨릭 역시 이베리아 반도측으로 공격을 받았지만, 프랑크의 샤를마뉴 이후 공세가 적어진 반면 정교회측은 이슬람의 중심권 바로 옆이였기에 훨씬 엄청난 공세를 받았다. 그래서 이슬람교와 유대교의 영향을 받았는데, 그 중 하나가 성상파괴주의. 그러나 결국 이 성상파괴는 동로마 제국 내부의 교권과 황제권 투쟁에서 나온 것이고, 두 세력이 합의함에 따라 폐기되었다. 다만 성상파괴주의자들에 대한 양보로 정교회권에서는 성상 중 이콘만을 쓰도록 권장하고 있다. 따라서 지금은 기독교 정파 중에서도 가장 많이 이콘(성화)를 이용한다. 이콘은 아무렇게나 그려지는 게 아니라 내려오는 규범이 있다.


 위치가 위치인 만큼 이슬람교와의 사이가 매우 나쁘지만 가톨릭과의 접경지는 가톨릭하고 사이가 나쁜 편. 대표적인 예가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로서 제2차 세계대전 동안 크로아티아는 독일의 위세를 등에 업고 악랄하게 정교도를 잡았고, 세르비아는 보복으로 더 강하게 가톨릭을 공격했다. 독일이야 개신교 국가에 가깝지만 나치 독일은 종교적 성격이 기독교와 다르기에 아쉽게(?) 기독교 3종파전은 되지 못했다. 이 사이에 끼인 이슬람 교도들은 양측 모두에게 학살당했다(...).


 더불어 아랍권에선, 과거 십자군 전쟁 같이 전쟁 규모가 컸던 가톨릭이나 지금 가장 미워하는 나라인 미국하면 떠오를 개신교에 비하면 그나마 이미지가 나쁜 편은 아니다. 그러나 카프카즈 지방이나 체첸의 이슬람교 신자들은 정교회라면 치를 떤다. 이곳을 정복했던 러시아 제국의 국교가 정교회였고, 정복의 이유도 정교회를 퍼트리기 위함이라고 공식적으로 천명했기 때문에.



4. 오리엔탈 정교회


 Oriental Orthodox Church, Oriental Orthodoxy. 오리엔트 정교회 또는 동양 정교회라고 한다. 기독교의 한 분파로서, 에페수스 공의회, 칼케돈 공의회에서 결의된 교리를 거부한 서아시아, 이집트, 에티오피아의 전통 기독교 교회들이다.


 이에 속하는 교회로는 이집트의 "콥트 정교회", 시리아와 인도의 "시리아 정교회", 아르메니아의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 에티오피아의 "에티오피아 테와히도 정교회"등을 들 수 있다.


 오리엔탈 정교회라는 명칭때문에 동방정교회와 혼동할 수 있는데, 오리엔탈 정교회는 3차 공의회인 에페수스 공의회에서 결의된 교리까지만 인정하며 4차 칼케돈 공의회부터 결의된 교리를 거부한다. 흔히 아시리아 동방교회와 더불어 취급되나, 아시리아 동방교회의 네스토리우스파가 예수의 인성과 신성을 분리한 데에 비해서 오리엔트 정교회는 예수에게는 신성만이 존재한다고 천명한다. 오리엔탈 정교회 중 하나인 시리아 정교회, 단성론 교회로 불리는 것을 매우 싫어한다. 왜냐하면 단성론이라는 말 자체가 이들을 이단으로 규정하는 정통파 측의 입장에 가깝기 때문. 애초에 단성론이라는 낙인자체가 이들에게는 표현상의 문제나 다름이 없었다. 어떠한 표현방식이던 이들 역시 신성이 육화했으니 인성을 수용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때문에 단성론이라는 낙인자체를 싫어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 자세한 내용은 후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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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교회들은 451년 칼케돈 공의회에서 결의된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은 한 위격 안에서 나누이지도 섞이지도 않으면서 서로 간의 속성을 공유한다.'라는 교리를 거부하였다. 대신에 이들은 '육화하신 하나의 본성'이라는 키릴로스의 주장을 그대로 밀고나가 하나의 본성이 육신을 취해 두 개의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는 뭔가 조금 다른(?) 형식의 표현을 하였고 결국 그로인해 갈라서게 된 것이다. 이들은 키릴로스의 주장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였던만큼 키릴로스가 관광보내버린(...) 네스토리우스파와는 구분해야 하며, 실제로 오리엔탈 정교회에 속하는 많은 교회들은 비칼케돈파이면서 동시에 네스토리우스의 양성론 역시 이단으로 취급한다.


 현재는 칼케돈파 교회(동방 정교회, 로마 가톨릭 교회, 개신교회)와 신학적 대화가 활발히 이루어져 칼케돈-비칼케돈 교회들 사이에서 많은 분야의 교류가 이뤄지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완벽한 성사교류가 이뤄지지는 않고 있으며 일부가 동방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 교회, 심지어 신교로 귀일하는 경우는 있다.


 이들 교회의 본고장은 아르메니아, 에티오피아를 제외하면 이슬람교가 거의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기 때문에 사회에서 소수자로 여겨지고 있다.


 다른 기독교 종파와 사이는 별로 좋지 않다. 이슬람의 발흥때는 정통파와 하도 사이가 나빠서 자진해서 항복했을 정도. 그러나 이후의 이슬람 통치는 전보다 오히려 상황이 나빴기에, 자기들이 자진해서 이슬람에 항복했음에도 불구하고 동로마 제국이 알렉산드리아를 잠시 탈환했을 때는 오히려 쌍수를 들고 환영하기도 했다. 십자군 전쟁 당시에는 처음엔 십자군을 해방자로 보았으나 이슬람 통치때나 마찬가지로 차별받았기 때문에 가톨릭과도 사이가 좋은 편은 아니다. 그러나 당시 남아있던 유일한 단성론 독립국 에티오피아는 십자군 전쟁 당시 십자군과 손잡고 북아프리카에서 이슬람군과 싸웠다.


 소수가 된 이슬람권 정교회들은 차별이나 여러 모로 어렵게 지내지만, 다른 기독교 종파의 접근을 더 싫어한다.


 그런데 서방 계열 선교사들은 아랍권에 기독교 형제라고 괜히 기대를 하고 왔다가 그들의 능멸어린 눈빛과 대접에 실망하기 일쑤이며, 원리주의적인 선교사들은 이단이라서 이슬람이나 마찬가지로 개종시켜야 한다는 주장이나 하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의 정교회 신도들은 온갖 탄압과 차별이란 배경 속에서 굳건히 정교회를 믿고 지내기에 (그리고 상당수는 이슬람으로 개종한 척 하고 몰래 정교회 기도나 세례를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개종하기에 무척 어렵다고 한다. 대다수 정교회에선 다른 다수 기독교 종파인 가톨릭이나 개신교에 대하여 이슬람보다 더 오래되었던 역사를 자부심을 가지기에 가톨릭이나 개신교를 나중에 생긴 종파가 괜히 유럽이나 미국 힘을 믿고 우쭐거린다고 비웃는 반응을 보인다.


 참고로 정교회 소수층이 있는 나라에선 다른 기독교 종파의 출입국을 금지하고 있는 것을 정교회 측도 찬성하고 있으며 정교회가 다수인 아르메니아에서도 정교회와 이슬람을 제외한 다른 기독교 종파 선교를 법으로 금지하고 있을 정도로 다른 기독교 종파의 접근을 거부하고 있다.


 이슬람권의 차별을 견디지 못해서 미국같은 곳으로 이주하는 콥트교도들도 일부 있는데 이들은 자유로운 미국에서 이슬람에 대해 극단적인 증오를 드러내고 있고 이들에 의해 무슬림의 순진함이라는 반 이슬람 동영상이 제작된걸로 보인다. 그로인해 중동은 반미바람으로 불바다가 된 상황. 게다가 이들은 자신들의 존재를 숨기기 위해 제작자가 유태인이라고 거짓말까지 한걸로 보여 이 사실이 아랍권에 전해지면 정교회 신도들은 더 고난의 가시밭길을 걸을걸로 보인다. 이건 뭐 팀킬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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콥트 정교회


 콥트 정교회는 "알렉산드리아와 전 아프리카의 총대주교"를 수장으로 하는 교회로 이 교회에서는 고대 이집트 교회가 가지고 있던 전통을 많이 지니고 있다. 이슬람의 전개 이전까지는 단성론 계열 교회의 총본산이었으며[1] 현재도 이집트 인구의 5~10%가 믿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 교회에서 사용하는 콥트어는 고대 이집트어를 연구하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콥트 정교회 역시 그리스 정교회의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처럼 '교황'이라는 직함을 사용하며, 알렉산드리아 전례 문화를 바탕으로 독자적인 콥트어 전례를 사용한다. 이집트에서 차별을 엄청 받기로 유명하다. 직업도 제대로 가지지 못하여 상당수가 쓰레기 마을에서 살면서 쓰레기 재활용품 수거일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무슬림의 순진함 영화 덕분에 더 고난이 커질 듯.


재밌는 사실은 2012년 새로이 착좌한 콥트 교회의 교황 이름이 '타와드로스 2세' 즉, 그리스식으로 명명하면 '테오도로스 2세'인데, 현재 정교회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의 이름 역시 '테오도로스 2세'이다. 각기 역사적 이유로 갈라져 동일하게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좌를 잇는다고 하는 양 교회 수장이 모두 같은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미 착좌해 있던 정교회 테오도로스 2세도 타와드로스 2세에게 보내는 축전에 '이름이 같은 우리 두 사람이 같이 잘해보자'하는 식으로 축전을 보내기까지했다.


시리아 정교회


 시리아 정교회는 "안티오키아와 전 중근동의 총대주교"를 수장으로 하는 교회[2]로 이 교회에서 단성론 신학을 크게 발전시킨 사제 "야코부스 바라데스"의 이름을 따서 흔히 "야코부스 교회(Jacobite Church)"라고 불렸다. 그러나 현재 시리아 정교회에서는 이 명칭으로 불리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으며 자신들을 "Syrian(Syriac) Orthodox"라고 불리길 원한다. 이곳의 총대주교는 1445년 이래로 모든 총대주교들의 이름이 '이그나티우스'로 통일되어 있으며, 다만 '이그나티우스'외에 자신의 부가명칭에 따라서 총대주교를 구분한다.[3] 예를들면 현 총대주교의 이름인 '이그나티우스 자카 1세'도 '자카'라는 명칭으로 '~세'를 구분하는 것이다. 선임 총대주교 중 '이그나티우스'를 공경하는 의미에서 만들어진 전통이며 마치 베네딕토회의 아빠스나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같은 고유명사화가 된 이름이다. 안티오키아 전례에서 유래한 서 시리아 전례를 사용하고 있다. 


 또한 사도 토마스 이래 뿌리를 내려 온 인도의 기독교 교회들 중 가장 오래된 집단들도 시리아 정교회 계열로 분류된다. 아르메니아 학살이나 쿠르드족 학살 못지않게 1915년 이후로 오스만 제국에서 살아가던 시리아 정교도들도 학살을 꽤 당했다고 하지만 아르메니아인들과 달리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시리아에서 이슬람과 다른 기독교에게 탄압받아왔으나 프랑스가 시리아를 지배하던 20세기 초엽에 이슬람 소수파인 알라위테와 더불어 기득권을 누렸고 아사드 일가의 세속 정책으로 많은 특혜를 받아왔다. 시리아 민주화 운동때도 정교도들이 민병대를 조직하여 아사드 정권을 도울 정도인데 항목을 참조하면 이들이 인권침해가 많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로서 필사적인 게 아사드 정권이 무너지면 시리아에서 자신들에게 재앙이 들이닥친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한편 남인도 케랄라, 고아 지역에 자생하던 사도 토마스로부터 기독교 신앙을 전래받았다고하는 인도 전통 기독교도 이 시리아 정교회로부터 교회문화를 수용받고 통치, 감독과 교류를 해오고있다. 독특한 말라얄람어를 전례어로 사용하는데 전례음악 등 부분에서는 특유의 인도틱한 분위기가 나오지만 어쨌든 제의에서부터 외적인 환경은 시리아 정교회와 동일하다.


에티오피아 테와히도 정교회


 에티오피아 정교회는 원래 이집트 콥트교회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구 휘하에 있던 교회였으나 후에 독립하여 현재 "에티오피아의 총대주교"가 수장으로 있다. "테와히도"라는 말은 "하나로 만들어진, 통일된"이라는 뜻의 게즈어로 그리스도의 본성이 하나라는 그들의 믿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말이다. 에티오피아 제국에서 국교로 신봉하였으며 에티오피아 황실과도 깊은 연관을 맺고 있었다. 공산주의 군부 쿠데타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에티오피아 전 인구의 절반 가까이가 에티오피아 정교회의 신도이며 독특한 그들만의 교회 문화와 이미 일상에서 사어가 된 게즈어를 보존하여 에티오피아 문화의 보고라고 할 수 있다.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


 아르메니아 사도교회는 70인 사도 중 성 타대오의 선교를 바탕으로 세워진 교회이며, 313년 최초로 국교 지위를 받아 아르메니아의 국가교회로써의 위상을 가지게 된다. 아르메니아 지역의 전통 교회로 원래 터키 킬리기아 지역에서부터 현재 아르메니아 지역까지 넓은 교세를 지녔으나, 아르메니아가 여러차례 침략을 받는 과정에서 현재 아르메니아 지역에서 주로 신봉하고 있다. 아르메니아 외에도 콘스탄티노플 예루살렘, 레바논, 이란 등지에도 주교와 신도들이 있다. 아르메니아 사도교회는 6세기 드진 공의회에서 칼케돈 신조를 이단으로 규정하였다.


 이스파한같은 경우엔 이맘 마스지드를 비롯하여 시아파에게도 중요한 성지이지만 이렇게 정교회도 여럿 남아있는데 아르메니아와 우호적인 관계로 남게 된 것이라고 한다.여담으로 렘브란트가 그린 성화나 기네스북에 오른 세계에서 가장 작은 성경같은 것들이 바로 이 교회에 전시되어 있다.


 이 외에도 인도 공화국의 말랑카라 시리아 정교회, 에리트레아의 에리트레아 테와히도 정교회 등이 오리엔탈 정교회에 속한다.


이 교회들은 모두 완벽한 성사교류와 교회일치를 이루고 있는 하나의 지체(Communion)을 이루고 있어, 동방 정교회와 거의 비슷한 체제를 이루고 있다. '그리스도론'을 위시로 신앙의 일치를 이룬 네 개의 교회는 서로간의 활발한 교류가 벌어지고 있으며 교회 수장 착좌식에 서로 대표단을 파견하여 주교 서품 때 참석하기도 한다.


 


 버라이어티 방송이 넘쳐나는 일본 TV의 특성상 비슷비슷한 방송도 많고 그 와중에 눈에 띄게 하기 위해 무리한 설정이나 진행을 하는 방송도 많다. 그러다보니 진짜 볼만하다 싶은 방송은 손에 꼽을 정도가 되는데 개인적으로 재미있었던 방송 몇 가지를 꼽아본다.



1. 크림 퀴즈 미라클 9 (TV 아사히, 매주 수요일 오후 8시)






 개그콤비 크림스튜 우에다가 진행하는 퀴즈방송. 한때 상식 개그맨 캐릭터로 어필했던 우에다가 그 이미지를 살려 진행을 맡고 있다. 콤비임에도 파트너 아리타는 패널로서 퀴즈에 참가하는 게 특징. 기본적으로 연예인 9명씩으로 이루어진 두 팀이 퀴즈로 대결을 펼치는데, 멤버들을 3x3 패널에 대응시켜서 빙고게임과 비슷한 룰을 적용하거나 특정 시간 내에 릴레이로 퀴즈를 풀게 하는 등 일본다운 참신한 퀴즈 룰이 인상적. 다만 결과적으로는 대체로 아리타 팀이 진다. 고정 멤버 중에 거의 맨날 틀리거나 삽질하는 멤버가 끼어있어서...



2. 행복 봄비 걸 (닛테레, 매주 화요일 저녁 10시)




 아직까지 낡고 오래된 집들이 많이 남아있는 일본. 경제 불황으로 젊은 층의 생계가 불안해지고 있는 것은 일본 역시 마찬가지인데, 그 덕분에 어딘가 문제가 있거나 요즘 기준으로 살기에 썩 쾌적하지 않은 대신 집세가 싼 "와케아리붓켄"(訳あり物件)에서 사는 젊은이들도 늘고 있다. 이런 사람들의 집에 찾아가 집안과 생활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방송. 레귤러 멤버들이 각각 맡아 진행하는 몇 가지의 고정 코너가 있는데 가장 재미있는 것은 스즈키 사와(鈴木砂羽) 아줌마와 DAIGO가 진행하는 탐방. 


 참고로 제목의 봄비(본비)는 일본어로 가난뱅이를 의미하는 빈보(貧乏)라는 단어를 살짝 바꾼 말장난인데, 생각보다 역사가 오래된 말장난 단어로서 90년대에 인기있었던 도태랑전철 게임에서도 플레이어 캐릭터에게 가난과 불행을 안겨주는 NPC 캐릭터로 등장한 적이 있다. 올드게이머라면 아하! 싶을 단어.





 이 아줌마가 스즈키 사와. 본업은 배우로서 왕년에는 "사랑의 신세계" 등에서 파격적인 노출 연기로 화제를 모으기도 했던 분. 지금은 조금 촐랑거리는 아줌마 탤런트 캐릭터로 어필 중인데 그 매력이 제일 잘 살아나는 것이 이 "봄비 걸"이라고 하겠다.





 대체로 이 방송에서 찾아가는 집들이 낡고 구조가 골때리는 경우가 많다보니 화장실이나 욕실 등도 애매한 구조가 많고, 그걸 보여줄때마다 이 아줌마는 꼭 이런 요상한 몸개그를 선보인다(...).




 오른쪽이 DAIGO. 본업은 록밴드 가수이지만 한국에선 아마 버라이어티 탤런트로 더 널리 알려져 있을 듯(...). 보통은 약간 나사 빠진 듯한 캐릭터이지만 그런 DAIGO가 멀쩡해 보일 정도로 비상식적인 집과 거주자가 나오는 방송이라 그 갭을 보는 것이 재미. 대체로 이 방송에 출연하는 사람들은 수입도 엄청나게 적은 경우가 보통이라 식생활도 일반인의 상식과는 거리가 먼 경우가 많은데(예: 하루에 센베이 한개, 참치캔 하나를 활용한 말도안되는 요리 바리에이션, 직접 잡은 물고기 말림 등등...), 이런 음식들을 제작진의 반 강요로 인해 일일이 먹어보는 DAIGO의 반응도 꽤나 재미있다. 




1인분 199엔의 요리(...)




두부 위에 우마이봉을 부숴서 끼얹어 토핑(...)



참치캔 부침개. 재료비 72엔(...)


 이외에도 외딴 외지 섬에서 폐가를 개조해 혼자 사는 기획이나, 모리 이즈미가 방을 자기 맘대로 개조하는 기획 등등이 있는데 위 두 코너에 비하면 그다지 재미없으므로 비추천.



3. 츠루베의 가족에게 건배(NHK, 매주 월요일 저녁 8시)



 만담가 출신 탤런트인 쇼후쿠테이 츠루베(笑福亭鶴瓶)가 지방을 돌아다니며 시골 사람들과 어울리는 방송. 단순히 일본의 각지를 소개하는 방송은 일본 TV에 널리고 널렸지만, 츠루베 영감님 본인의 느긋하고 넉살좋은 캐릭터로 인해 맛깔나는 방송이 된다. 흔히 리포터를 맡는 개그맨들처럼 개그나 말장난에 의존하지도 않고, 무리하게 토크를 끌어내기 위한 장난이나 연출 등도 없다. 오로지 츠루베 본인의 연륜에서 묻어나는 구수한 진행이 일품. 진솔하게 각지에서 만나는 가족들의 생활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이 프로그램의 가장 큰 장점. 언뜻 보면 정말 이런 프로그램 어디서나 볼 수 있지 않나 싶지만, 가만히 보고 있자면 눈요기와 농담, 가벼운 진행으로 가득한 타 방송들과는 질이 다르다. 



 아마 한국에선 이 영감님을 대체로 타이거&드래곤의 야쿠자 보스로 처음 알게 되는 경우가 많다고 보는데, 2009년 12월 방송에서는 바로 그 타이거&드래곤의 니시다 토시유키 영감님이 게스트로 등장, 팬으로서는 감동의 캐스팅이 되었다.


 

 생각나면 다음에 또 추가...



 지난번의 도쿄에서 전철타기에 이어, 이번에는 여러 상점에서 물건을 사는 방법에 대해서 조금 설명해 볼까 한다.

 물론 물건 사는 거라는게 간단하다면 간단하기도 하고, 굳이 이런 말이나 표현같은거 몰라도 대충 바디랭귀지로 때울 수도 있는 부분이긴 하지만, 그래도 기왕 사는거 좀 뭐라고 말하는건지 알고 사면 더 좋지 않겠는가. 



 1. 기본 - 잔돈 준비와 관리


 물건 들고 계산대로 간다. 점원이 얼마라고 얘기하면 그 돈 내고 거스름돈 받으면 된다. 끝. (...) 

 사실 물건 산다는게 세계 어디서나 크게 다를 바 없고,  주는돈 거스름돈에 문제가 없다면 사실 별로 말 주고받을 필요도 없기는 하지만... 일본의 경우 소비세가 티나게 붙기 때문에 대부분의 물건 가격이 한국처럼 몇천원, 몇백원으로 딱 떨어지는게 아니라 173엔, 514엔 이런식으로 그야말로 1엔 단위까지 전부 제각각이다. 깔끔하게 떨어지는 한국 물건 가격에 익숙한 한국인들은 매번 지폐로 계산하다가 넘쳐나는 잔돈을 주체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참사를 막으려면 잔돈으로 가격을 맞춰서 계산하는 버릇을 들여야 한다. 빠르게 물건을 사려면(특히 아침 출근시간대라든지) 계산대 가기 전에 미리 잔돈을 꺼내들고 있는 게 가장 좋긴 하지만, 그렇게 미리 준비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계산대에서 지갑 뒤적거려 잔돈 꺼내도 크게 상관은 없다. 다들 그렇게 하니까. 


 참고로, 이런 특성 때문에 일본의 지갑은 위 사진에서 보듯 동전용 주머니가 따로 잘 준비돼 있는 경우가 많다. 



2. 줄서기와 순서


 한국도 간혹 사람 많은 편의점 같은 곳에서는 줄서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계산대에서 오래 줄서서 기다리거나 하는 일은 별로 없고, 점원이 여러 명 있는 곳에서 계산 끝난 점원이 있으면 바로 그쪽으로 가도 사실 크게 상관없는 게 한국이다. 그러나 도쿄는 사람이 워낙 많고 줄 서야 하는 경우도 많아서 이런 순서에 굉장히 엄격해, 몇 명의 점원 중 한 명이 계산이 끝났다고 해도 바로 그쪽으로 가면 점원이 "죄송하지만 줄 서신 순서대로 기다려 주세요"라고 말하며 계산을 안해주는 경우가 종종 있다. 도쿄에서 물건 살 때는 그냥 얌전히 줄 서라는 곳에 서서 순서대로 기다리는 게 제일이다. 



3. 봉투


 편의점이나 작은 가게의 경우, 한국은 물건을 살 때 따로 말하지 않으면 봉투에 넣어주지 않는게 보통이지만 일본은 철저하게 봉투에 물건을 넣어주는 게 기본으로 돼 있다. 뿐만 아니라 따뜻하거나 렌지에 데운 음식(도시락, 오뎅, 호빵, 닭강정 등등)과 차가운 음식(아이스크림 등등)을 함께 살 경우, 각각 다른 봉투에 담아주는 것이 당연시 된다. 다만 온도차가 애매한 음식들의 경우 점원이 물어보기도 하니 이럴 때는 "같이 넣어주세요"(一緒で), 아니면 "따로 담아주세요"(別々で) 라고 말해주면 된다.



4. 포인트카드


 한국은 무슨 코스트코 이런데 아닌 이상에는 사실 일반적으로 물건 사면서 포인트카드를 열심히 주는데도 별로 없고 열심히 모으는 손님도 별로 없지만, 도쿄의 상점들은 정말 포인트 제도를 열심히 운영한다. 특히 큰 편의점이나 체인점들은 포인트를 공유하는 경우도 있고 회원정보도 함께 기록해 필수로 관리하는 곳도 있으므로, 싫든 좋든 한두개 이상의 포인트 카드는 사용하게 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T포인트 카드와 폰타 카드인데, 특히 T포인트는 실로 사용범위가 광범위하니 하나쯤 만들어 두는게 좋다. 패밀리마트, 츠타야, 도토루, 가스토 등의 주요 체인점이 T포인트 카드를 사용하며, 특히 츠타야에서는 회원증으로 사용하여 없으면 렌탈이 불가능하다. 한국 SKT의 T포인트와는 관계가 없다(...)


왼쪽 위가 가장 일반적인 T포인트 카드. 그 외에 T포인트 기능이 결합된 각종 신용카드도 존재.


가게에 이 마크가 보인다면 T포인트를 사용하거나 쌓을 수 있다는 뜻이다.




 폰타 카드는 비디오/게임/만화책 렌탈샵 게오의 회원증이며, 이외에 KFC, 로손, HMV 등에서도 사용된다. 


 사실 일본에는 포인트카드가 진짜 너무너무 많다. 위 두 종류는 워낙 메이저이고 사용되는 곳도 많으니 괜찮지만, 기타 잡다한 포인트카드는 사실 있으나 마나한 경우도 많으니 본인의 이용 빈도가 낮다면 안 만들어도 크게 상관은 없다. 이런 경우는 점원의 "포인트카드 가지고 계신가요(ポイントカードはお持ちでしょうか)?"라는 질문에 "괜찮습니다(大丈夫です)"라고 답하면 OK.



5. 식당


 커피숍이나 KFC 등 패스트푸드점의 경우, 보통은 주문할 때 가장 처음 묻는 것이 "가게 안에서 드실건가요(店内でお召し上がりですか)?"이다. 보통은 네라고 대답하면 되지만, 포장해가고 싶을 경우는 "가져갑니다(お持ち帰りです)"라고 대답하면 된다.

 마츠야, 가스토 등의 간단한 식당 체인을 비롯해 작은 밥집들은 식권 자판기를 운용하고 있는 곳이 많은데, 요리의 이름을 잘 몰라도 사진 등으로 보고 판단하기 좋으므로 외국인이 사먹기에는 좀 더 편하다. 다만 일단 식권을 뽑으면 바로 주방에 주문이 들어가고 요리를 만들기 때문에, 식권을 뽑은 뒤에 주문 취소는 원칙적으로 안된다. 주의하자. 

 요시노야 같은 곳은 대개 앉아서 밥먹는 곳의 메뉴와 테이크아웃 메뉴가 완전히 따로 분리돼 있고, 주문받는 장소도 다르다(테이크아웃 전용 계산대가 따로 준비돼 있고 주문도 거기에서 받는다). 모르고 일반 계산대에서 포장해 가려고 하면 다들 이상하게 쳐다보는 사태가 벌어지니(...), 요시노야 같은 곳에서는 테이크아웃 계산대부터 먼저 확인하자.



6. 기타 유용한 표현


 - 전시품을 보고 맘에 들었을 때 전시된 물건 대신 새것을 달라고 할 때 : これ新品はありますか?(신품 = 신삔이라고 읽음)
 - 품절인가요? : 売り切れですか?(품절 = 우리키레라고 읽음)

 - 이거 재고 있나요? : 在庫ありますか?(재고 = 자이코라고 읽음)


 최근 들어 그래픽 논쟁이 끊이지 않는 몬스터 헌터 시리즈. 정말 그래픽이 전혀 변하지 않았는지 어떤지, 비교할 겸 역대 시리즈의 스크린 샷을 모아 봤다. 가능한 한 화질이 깨끗한 다이렉트 스크린샷(화면을 사진으로 찍거나 한 것이 아닌)을 사용했으며, 각종 컨버전판(HD버전 등)과 프론티어는 제외했다.



* 몬스터 헌터 1 (PS2, 2004년)













 PS2라는 하드웨어의 특성상 발색이 좋지 않아 색감이 전체적으로 탁하고 뿌옇다. 이 때문에 몬스터의 쉐이딩(명암) 표현을 굉장히 강하게 넣어 입체감을 살리려 한 흔적이 보인다. 또한 전반적으로 들어간 모래나 흙, 바위 질감의 텍스처가 PS2의 렌더링 및 몬스터 헌터 자체 엔진과 얽혀서 모래알같은 거친 느낌을 내는데, 이것이 밋밋한 느낌을 어느 정도 상쇄시켜 주고 있지만 덕분에 화면이 전체적으로 좀 지저분하다. 



* 몬스터 헌터 포터블 (PSP, 2005년)





 NDS에 밀려 허우적거리고 있던 PSP에 구세주처럼 나타난 첫 포터블 몬헌. PS2라는 거치기용 게임을 거의 완벽에 가깝게 포터블로 재현한 완성도가 놀랍다. 오히려 PSP로 옮겨오면서 프로그레시브 출력이 되어 원작보다도 깨끗해진 화면이 인상적. 



* 몬스터 헌터 DOS (PS2, 2006년)









 PS2용의 두번째 작품. 기본적으로는 전작과 크게 다르지 않은 그래픽이지만 엔진의 개선과 텍스처의 깔끔해짐으로 1에서 보이던 거친 질감은 꽤 나아졌다. 다만 그 덕분에 전체적으로 밋밋해보이는 부분이 많은 것은 어쩔 수 없는 부분. 



* 몬스터 헌터 포터블 2G (PSP, 2008년)















 포터블 이후 히트를 거듭하며 PSP에 대한 노하우가 점점 쌓이고 있는 개발진의 실력을 보여주는 작품. 포터블 1편 기반의 엔진으로는 거의 완성형에 가까운 그래픽을 보여준다. 



* 몬스터 헌터 트라이 (Wii, 2009년)
















 닌텐도의 신기종 Wii로 모든 그래픽을 완전히 갈아엎고 낸 작품. 쉐이딩이 전부였던 이전까지의 작품 수준에서 벗어나, 새 하드웨어의 파워를 활용해 텍스처에 반사효과를 넣어서 입체감을 살렸다. 향상된 광원이나 색감 강조, 블룸 효과도 멋진 편. 다만 씬 렌더 전반에 블러가 좀 과하게 들어가 있어 전체적으로 화면이 뿌옇고 선명도가 낮다. 전반적으로 폴리곤을 많이 사용해 지형이나 몬스터의 모델링이 둥글둥글해 보이는 것도 트라이만의 특징이다. 몬스터의 포효 시 모션블러를 이용해 화면이 흐려지는 효과도 이 작품에서 처음 들어갔으며, 공격/방어력 UP 버프시 몸에서 발생하는 오오라 이펙트는 물리효과가 적용되어 플레이어의 움직임에 따라 휘날리기도 한다. 



* 몬스터 헌터 포터블 3rd (PSP, 2011년)


















 PSP의 마지막 작품. 계속 써오던 포터블 1 기반(사실 이것 역시 PS2용 도스 엔진을 뜯어고친 것) 엔진을 버리고 PSP에 최적화된 렌더링 엔진을 새로 만들어 그야말로 PSP의 하드웨어 스펙을 바닥까지 긁어 만든 작품. 덕분에 색감이 화사하졌고, 화면 전체에 오브젝트들이 가득 들어차 있는 여유있는 묘사가 일품이다. 다만 이런 묘사를 위해 PS 시리즈 특유의 도트 디더 가상 알파채널을 아주 적극적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보다보면 도트가 은근히 튀는 부분들이 꽤 눈에 보인다. 



* 몬스터 헌터 트라이 G (3DS, 2011년)

















 난데없이 홀라당 3DS로 플랫폼을 갈아타고 나온 작품. 하드웨어의 렌더링 방식 차이로 인해, PSP 시절처럼 알파채널을 디더링으로 희생하고 퍼포먼스를 확보하는 테크닉을 많이 사용할 수 없게 된 듯. 덕분에 배경 오브젝트의 묘사가 PSP의 3rd에 비하면 조금 간략화 되었다. 알파채널과 렌더링 등의 기능은 거의 하드웨어 레벨에서 지원되는 것을 사용하여 도트 디더링이 아니라 깔끔한 일반적인 알파채널이 되어있는데, 이 덕분에 좋게 얘기하면 화면이 깔끔하고 나쁘게 얘기하면 조금 밋밋해졌다. 캐릭터나 몬스터의 경우에는 트라이 시절의 블룸 필터 및 반사에 더불어 노멀맵핑 및 셀프 섀도우까지 지원하는데, 이것 역시 하드웨어에서 지원하는 기능을 그대로 사용하는 덕분에 최적화를 할 구석이 없어 전체적으로 해상도가 낮다. 이 때문에 스크린샷으로는 이런 그래픽 효과들을 잘 체험하기가 어렵고, 실제 각종 효과가 움직이는 화면을 보면 그 박력이 다르다. 



* 몬스터 헌터 4 (3DS, 2013년)



















 외주 작품이었던 트라이 G에 이어, 2년에 걸쳐 본가 팀이 만들어낸 최신작. 전반적으로 배경 퀄리티가 좀 낮아진 덕분에 그래픽적으로 욕을 많이 들어먹었지만, 실제 게임화면을 보면 그렇게 욕먹을 정도는 아니다. 트라이 G에서 사용된 각종 그래픽 효과들을 전부 지원하고, 광원에 HDR 기능(맨 마지막 스샷의 오른쪽 위 나무 부분을 보라)까지 넣어 아주 인상적인 화면을 만들었다. 단지 그 덕분에 배경의 폴리곤과 텍스처 해상도가 많이 낮아지고, 오브젝트가 눈에 띄게 줄어든 것은 단점. 몬스터와 캐릭터의 디테일만큼은 최고 수준인데, 하드웨어 의존도가 높은 하드웨어인 덕분에 그림자 등은 변함없이 저해상도다. 3DS의 그래픽 특성을 이해해야 할 듯. 


 제작사인 캡콤도 기업이므로, 때깔넘치는 HD 작업을 하려면 인건비가 필요하며 보다 스펙이 낮은 기종으로 개발해 제작비를 줄이려 하는 것은 회사 입장에서 당연하다면 당연하다고 할 수도 있다. 이에 대해 유저들이 불만을 가지는 것도 자유이지만, 중요한 것은 객관성을 잃지 않는 것이다. 몬스터 헌터 시리즈는 나름대로 그래픽 면에서도 꾸준한 발전을 이어오고 있는 게임이며, 이것이 성에 차지 않고 원하는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고 해서 "전혀 개선이 없다", "PS2 시절에서 조금도 변한게 없다"라고 매도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2년이나 기다린 몬헌 신작! 간단하게 감상 정리.


* 전체적으로 이전작들의 아쉬운 점을 잘 보완한 수작. 충분한 제작기간을 가졌기 때문인지 볼륨도 충실하고 새로 추가된 액션들이 게임성을 보다 낫게 잘 진화시키고 있다. 보통 점프액션과 등타기만을 이번작의 특징으로 보는데, 사실 이것은 이번 작품의 큰 변화 중 한 가지일 뿐 이게 전부가 아니고 전체도 아니다. 


* 몬스터헌터 시리즈는 사실 베이스적으로 공간이 아주 잘 구현돼 있는 게임 중 하나였지만(높은 곳에서 아래를 날고 있는 리오레우스에게 페인트볼을 던졌을 때 페인트볼은 포물선을 그리면서 아래로 떨어지고 좌표가 리오레우스에 맞으면 확실하게 페인트볼에 맞는 것으로 처리된다. 공간좌표가 눈속임이나 플레이어 주변 공간만을 적당히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전 공간에 걸쳐 잘 인식된다는 뜻이다) 엔진의 한계상 그런 부분이 게임성에 영향을 끼치는 부분은 거의 없었다. 어디서 싸우건 기본적으로 플레이어 캐릭터의 공격 전개와 동선은 평면 기준으로 이루어져 있고 몬스터 역시 그 평면 공간을 기준으로 플레이어를 따라다니며 공격하곤 했다. 예를 들어 약간 높은 땅 위에 서있는 몬스터가 플레이어를 노릴 때 아래 땅으로 뛰어내리면 몬스터는 바로 플레이어를 공격해오지 못하고 우선 날아서 아래 땅으로 이동한 뒤 다시 플레이어를 노린다. 

 물론 이것이 너무 뚜렷하면 게임적으로 악용될 가능성이 높으므로, 초대 몬스터 헌터부터도 브레스 등의 원거리 공격이 이러한 인공지능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들어가 있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에 지나지 않았다. 이 방식은 몬스터헌터, 도스, 포터블, 포터블2까지도 변함없이 계속 이어져 왔고, 이러한 공간 개념에 비로소 수정이 가해지기 시작한 것이 트라이의 수중전이다. 트라이의 수중전은 말 그대로 360도 전방위 시점을 제공했으며 몬스터 역시 그에 맞게 상하좌우 어디서 어떤 각도로든 공격해 온다. 다만 이것은 수중전에 한정됐을 뿐더러, 수중에서도 플레이어 캐릭터의 공격모션은 지상모션에서 크게 변하지 않아 정작 플레이어는 몬스터만큼 능동적으로 공간을 활용하며 싸울 수 없다는 한계가 있었다. 제작진은 이 점을 인지하고 4에서는 공간을 적극 활용하는 방향으로 컨셉을 잡았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아주 적절한 판단이 되었다.


4에서 몬스터는 이제 플레이어 캐릭터와의 평면 구분을 전혀 개의치 않고 어디서든 정확히 플레이어를 노려 공격해 온다. 단차가 있는 부분에서도 몬스터는 높은 땅과 낮은 땅을 동시에 딛고 경계면에서 기우뚱 선 채로 공격해오기도 한다. 비룡들은 절벽 위에서 날아 바로 플레이어에게 덮쳐오기도 하고, 낮은 곳에서 이쪽으로 향해 돌진하는 몬스터들은 지형에 가로막혀 멈추지 않고 펄쩍 뛰어올라 덮치기도 한다. 

 대조적으로 플레이어 캐릭터의 공격 모션은 이전 시리즈에 비해 크게 변화된 부분은 없다. 이미 오랜 시간 다수의 작품을 거쳐 검증되고 굳어져 온 무기별 특징과 공격 모션들이므로 이것을 섣불리 다 뒤엎어 버리면 게임을 완전히 처음부터 다시 설계하는 것과 다름없게 된다. 그렇다면 플레이어 캐릭터는 높은 곳 <-> 낮은 곳 사이의 공격을 어떻게 해야 할까? 이 문제에 대해 제작진이 내놓은 답이 점프 공격, 그리고 점프 공격에서 이어지는 등타기인데, 이는 게임을 잘 알고 있는 본가 제작팀이기에 가능한 해결책이었다고 본다. 

 

* 이런 특징 덕분에 지형을 숙지하는 것은 이전 시리즈보다도 더욱 중요한 일이 됐다. 높은 곳과 낮은 곳을 파악하고 단차 점프가 가능한 방향으로 적을 유도하며 싸워야 한다. 더우기 이번작은 배경에 동적 오브젝트들이 많아서 더욱 지형을 이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리오레우스의 둥지 바닥은 타격을 입으면 기울어지고 바닥이 꺼져 내려앉기도 한다. 대부분의 기둥이나 단차, 장애물등이 몬스터의 공격으로 인해 부서져 없어져 버린다. 경사진 곳에서 몬스터의 독액이나 폭발 점균 같은 액체류의 공격 수단들은 지형을 타고 낮은 곳으로 흘러내리거나 퍼져나간다. 경사면에 서 있으면 플레이어 캐릭터 역시도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가며, 격룡선이 공격으로 인해 들릴 때에는 R 버튼을 눌러 매달리지 않으면 미끄러져 배 밖으로 튕겨 날아가버린다. 일본의 3D 액션 게임 중에서 이 정도로 지형과의 상호작용을 세밀하고 철저하게 구현한 게임은 많지 않다. 많은 유저들이 말하듯 몬스터 헌터 시리즈는 이제서야 제대로 된 게임성의 진화를 이뤄냈다. 


* 그래픽에 대해 발매전부터 말이 많았는데, 결과적으로는 전작 3G에 뒤지지 않는 그래픽 퀄리티를 보여준다. 이번 4에서는 보다 본격적인 그래픽 기법들을 상당히 많이 도입했다. 반사, 범프맵핑 및 블룸, HDR, 모션블러, 심지어는 셀프 섀도우까지 들어가 있다. 다만 스펙에 한계가 있는 3DS에서 이런 기능들을 모두 넣으려다 보니 결과적으로 폴리곤 수와 텍스처의 해상도가 꽤 낮아져 버렸으며, 이것이 스크린샷으로 공개되던 시절에 그래픽이 구리다고 욕먹은 이유이다. 



배경 텍스처가 좀 심하긴 하다...


 그러나 실제 움직이는 화면으로 몬스터와 싸우고 있을 때에는 이 저해상도 텍스처가 아주 크게 눈에 띄지 않으며, 오히려 추가된 각종 그래픽 효과 덕분에 박력넘치고 리얼한 화면을 보여준다. 가장 멋진 것은 역시 셀프 섀도우다. 이 효과는 거치기용 고스펙 3D게임에서도 빠지는 일이 많은 연산 능력이 필요한 처리인데, 3DS는 하드웨어 지원으로 이 기능을 탑재하고 있어 비록 해상도는 낮을 지언정 다이나믹하게 움직이는 리얼한 명암을 보여준다. 

 특히 반사 효과에 신경을 많이 쓴 모습이 보이는데, 범프 맵핑 및 반사 효과로 인한 몬스터의 리얼한 질감은 물론이거니와, 빙해 스테이지의 배경 얼음의 반사나 고인 물의 배경 반사 효과는 아주 리얼하고 충실한 공간감을 표현해준다. 이런 부분의 묘사에 대해서는 정지 스샷이나 저화질 인코딩 영상을 아무리 봐도 제대로 알 수 없으므로, 직접 본인이 3DS 화면을 보고 판단하길 바란다. 



반사효과가 가장 멋들어지게 들어간 빙해 스테이지. 배경의 얼음 하나하나에 반사되는 표현이 일품.


 다만 위에도 언급했듯 상당히 인상적이고 퀄리티 높은 배경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종종 이해가 안 갈 정도로 퀄리티가 심하게 낮은 배경이 튀어나올 때가 있다. 특히 고저차 필드를 구성하는 대부분의 오브젝트가 그러한데, 퍼포먼스나 스펙의 문제라고 보기엔 좀 이상할 정도로 퀄리티가 낮다. 이런 부분들에 대해서는 후속작에서 개선을 희망하는 바이다. 



해상도가 낮거나 도트가 튀는 것 이전에 이렇게 단순명쾌하게 패턴이 반복되는 건 데빌메이크라이 2 이후로 실로 오랜만인 듯. 전체적으로 기둥과 벽, 덩굴 텍스처는 심히 까여도 할 말이 없다.



보통 배경 벽이나 기둥을 오르기 위해서 덩굴이나 거미줄 등을 묘사해 놓는 경우가 많은데 거의 100% 저해상도인 덕에 근접하면 이렇게 퍼져버린다.



* 난이도와 AI, 게임 컨텐츠 구성에 있어서는 조금 아쉬운 부분들도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난이도 상향이다. 가장 큰 문제는 몬스터들의 인공지능이 엄청나게 올라간 것과 더욱 더 심해진 몬스터 동작딜레이 감소 / 플레이어 동작딜레이 증가이다. 물론 시리즈가 거듭됨에 따라 유저들의 경험 및 노하우가 올라가서, 이젠 웬만큼 어렵지 않으면 바로 유저들에게 신나게 털리는 것도 사실은 사실이지만, 캡콤이 스파2시절부터 반복해오던 문제 중의 하나는 모든 유저들이 그렇게 극한의 플레이를 할 수도 없고 하고 싶어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갈수록 이렇게 고급지향적으로 난이도를 올려가면 결국 초심자는 이탈해버리고 하드코어 유저만 남아버리는, 대전격투 게임의 쇠퇴와 같은 길을 가게 될 수도 있다. 물론 이번 몬스터헌터는 휴대기 시리즈 최초로 자체 인터넷 멀티플레이 모드를 탑재해, 언제 어디서나 와이파이만 연결되면 멀티를 할 수 있어 좀 더 파티를 짜서 도전하기 쉬워진 것도 사실이긴 하지만, 단지 그 이유 하나만으로 용납하기엔 상위 몬스터의 난이도 상향과 플레이어 캐릭터의 너프가 너무 심하다. 캡콤이 다음작에서는 조금 더 폭넓은 유저에게 먹힐 수 있는 기획을 해주길 빈다. 


* 이번 4에서는 싱글 모드가 꽤 충실해졌는데, 전작들의 존재감 미미한 싱글 모드에 비해 이번에는 각종 버프수단(고양이 식사, 마을 재료조달)의 강화단계를 엄청나게 쪼개놓고 그 파워업을 전부 싱글 모드 클리어에 순차적으로 때려박아놨다. 어려워진 집회소 상위 퀘스트 난이도와 함께, 이번작에서는 최소장비만 만들어서 집회소를 먼저 싹 뚫고 좋은 장비를 맞춘 뒤 마을 싱글퀘를 한번에 쓱 훑어버리는 플레이가 많이 어려워졌다. 특히 농장의 부재 및 평범하게 재료를 팔아주는 교역상인이 없어지고 용인상인에게서 현재 가지고 있는 재료만을 불릴 수 있게 되어 소재의 조달도 많이 어려워진 탓에, 어지간하면 싱글 모드를 어느 정도 클리어해서 소재 조달 및 버프 효과를 최대한으로 올린 뒤에 집회소에 도전하는 것이 속편하다. 다만 이러한 싱글 모드 및 버프효과 강화의 전개, 그리고 발굴퀘스트 등등의 UI 설계와 플로우가 꽤 복잡하고 직관적이지 않게 디자인되어 있어서, 처음 하는 유저들은 어떻게 진행해 나가야 하는지 헤매게 되는 경우가 많다. 발굴퀘스트와 스토리 진행을 다 엮으려고 욕심을 많이 부린 것 같은데, 다음작에서는 좀 더 세련되고 알기 쉽게 UI를 설계했으면 한다. 

 도쿄에 와서 산 지도 어언 1년이 넘었다. 오늘은 한국인으로써 복잡하기 그지없는 도쿄 전철을 이용하는 데 있어 나름대로 얻은 노하우들을 정리해 보려고 한다.



1. 도쿄 전철의 특징


 - 가장 큰 특징은 서울처럼 모든 노선이 모든 역에 정차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라인이라도 열차의 종류가 다르다는 점이다. 대략 다음과 같은 종류의 열차가 있다. (정확한 분류는 다음 항목을 참조: http://bit.ly/1aiM5Ml)



  * 각역정차(各駅停車:카쿠에키테이샤) : 영어 표기로는 Local. 보통 줄여서 위 사진처럼 각정(各停)이라고 표기하기도 한다. 가장 일반적인 열차로서 모든 역에 전부 정차하기 때문에 각역이라 불린다. 다만 그만큼 운행속도가 느리고, 역에 들어가기 전이나 역에 멈춘 뒤에 다른 빠른 열차의 운행을 위해 정차한 채로 몇 분씩 기다리기도 한다. 출근 등 빨리 가야할 경우에 잘못 타면 낭패를 볼 수도 있으니 주의하자.



  * 특급(特急:토큐우), 급행(急行:큐코) : 영어 표기로는 Express. 빨리 가는 열차. 이용객 수가 적은 역은 정차하지 않고 그냥 지나가 버린다. 어떤 역에 서고 어떤 역을 지나치는지는 각 라인에 따라 천차만별이니 열차가 들어올 때 역사의 전광판이나 열차 내의 안내 전광판을 잘 확인해야 한다. 워낙 일본 전철이 종류가 다양한데다 날씨 등 외부 영향에 따라 운행 상황이 변동되는 경우가 많으므로 전광판을 항상 확인해야 하는 것은 도쿄 전철 이용의 기본. 



   * 쾌속(快速:카이소쿠) : 영어 표기로는 Rapid. 각역 열차 중에서 특정 시간대의 이용객이 적다거나, 특정 역의 이용객이 적어서 일부 역에 정차하지 않는 열차를 일반적으로 쾌속이라 부른다. 도쿄의 전철이 워낙 종류도 다양하고 사업자도 많아 실로 복잡다양한 이름의 파생형태가 있다. (예: 일반 쾌속보다 정차역이 많은 구간쾌속/B쾌속/준쾌속, 쾌속보다 정차역이 많은 특별쾌속, 신쾌속, 출근시간대에만 운행하는 통근쾌속/직통쾌속, 휴일에만 운행하는 홀리데이 쾌속 등등등)



   * 준특급(準特急:준토큐우) : 영어 표기로는 Semi Express. 두 글자만 표기되는게 보통인 열차 전광판에는 준급(準急:준큐우)으로 표기되는게 보통. 급행이나 쾌속보다 좀 더 정차역이 많은 열차. 


 이외에도 다양한 파생형태들이 있으나 여기서는 대충 생략.


 - 2013년 기준으로도 대부분의 노선이 지상노선이기 때문에 날씨 및 천재지변에 취약하다. 전기로 움직이는 교통수단이기 때문에 악천후시 선로에 낙뢰가 떨어질 확률이 높고, 다량의 비/눈, 지진, 태풍 등에도 큰 영향을 받는다. 또한 스크린 도어가 설치된 역이 매우 적고, 이용 인구에 비해 플랫폼 면적도 좁아 선로에 사람이 떨어지거나 열차에 부딪치는 사고(인신사고 = 人身事故, 진신지코)가 빈발한다. 


안그래도 사람 미어터지는 도쿄 전철인데 플랫폼이 좁디좁다. 

계단이나 엘리베이터 근처는 사람 한명 겨우 걸어 다닐 정도의 공간밖에 없는 경우도 다반사. 

이런 주제에 스크린도어조차 없으니 사고가 안 나는게 이상할 것이다.


퇴근시간 신주쿠역의 사이쿄선 플랫폼에선 정말로 생명의 위협을 느낄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사고가 일어날 경우 사고 자체만이 문제가 아니라 열차의 운행이 상당시간 지연된다는 점이다(이러한 열차 운행 지연을 조정(お見合わせ, 오미아와세)라고 한다). 



인신사고 발생...


운전을 조정 중입니다... 이 안내가 뜨면 대략 낭패.


 대부분의 역에서는 문제가 발생해 운행지연이 생길 경우 역사 안내소에서 목적지를 물어본 뒤 확인권을 끊어주며, 이 확인권을 보여주면 다른 버스나 전철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요것이 확인권.


 다만 도쿄의 지역 넓이에 비해 시민의 이동 수단이 전철에 편중되어 발달된 경향이 매우 강하고(광역버스 등이 그다지 발달돼 있지 않다) 택시는 이용 요금이 매우 비싸기 때문에, 대체 교통수단이라고 해도 사실 크게 도움은 안 되는 경우가 많다. 여름/겨울의 태풍/폭설 등 악천후나 인신사고로 인해 직장인들이 출퇴근에 지장을 받는 일이 매우 많다.


 - 일본 특유의 규칙이나 룰을 중시하고 남의 것을 건드리지 않으려는 문화 덕분에 도쿄의 전철 시스템 역시 많은 부분에 문제가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역사 건물의 증/개축이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으로, 어떻게든 기존의 것을 최대한 부수지 않으려고 한다. 이것은 옛 것을 그대로 보존하여 역사적인 가치를 존중한다는 측면에서는 좋은 것이지만, 그러다 보니 증축을 할 때에도 무리하게 덧붙이고 억지로 이어붙이는 것을 반복하게 되어, 하루에도 수백만 명이 이용하는 신주쿠 역 같은 경우는 그야말로 지하 던전이 따로 없을 정도의 복잡한 구조가 되어 있다. (참고: http://bit.ly/16AKboS)


처음 보는 사람은 입이 벌어지는 신주쿠 역의 구조도. 이것도 사실 전부 다 나온게 아니다. 


 한국이라면 전부 때려부수고 처음부터 사람들이 오고가기 편리하게 싹 새로 짓겠지만, 그런 과감한 증/개축을 안(못)한다. 주변 건물이나 상가 등의 권리를 건드릴 수 없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보통이지만... 이 때문에 시민들이 겪는 불편함은 상상을 초월한다. 한국의 스트레이트한 구조의 전철역에 익숙해 있는 한국인이라면 처음 도쿄의 전철역을 이용해 보면 불편함이 이만저만이 아니지만, 어쩌랴. 익숙해질 수 밖에... 특히 골아픈 것이 환승인데, 한국처럼 알아서 환승하는 것이 아니라 일단 하나의 노선에서 개찰구로 나간 뒤 다른 개찰구를 통해 다른 노선으로 들어가는 것이 기본이다. 이것을 연락(連絡)이라고 하며, 환승하는 출구를 연락출구(連絡口)라고 한다. 


이것이 연락출구


 처음 도쿄의 전철을 이용하면 그냥 출구인 줄 알고 연락출구로 나가거나, 환승해야 하는데 그냥 출구로 나가버려 다시 요금 내고 들어와야 하는 실수를 하는 경우가 많다. "연락"이라는 글씨가 보이면 주의하자.


 이동 동선의 문제 이외에도 가장 곤란한 점은 역사 자체 출구의 파악이 어렵다는 것이다. 어디로 나가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서울 전철역처럼 교차로 기준으로 출구가 설계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번호로 출구를 일괄적으로 표기하는 것이 아니라 "남쪽출구", "중앙출구" 하는 식으로 두루뭉술하게 표기되어 있어 알기가 더욱 어렵다. (참고 : http://bit.ly/1aiM5Ml) 

 물론 모든 역이 전부 신주쿠 수준의 난해함을 자랑하는 것은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일본 전철역과 출구는 한국 전철에 비해 매우 알기가 어렵고 직관적이지 않으니 정신 바짝 차리는 게 좋다. 


 - 서울의 전철과 비교해 매우 다른 점이, 같은 노선 하나에도 위에 적은 것과 같이 다양한 종류로 운행을 하기 때문에 실제로는 선로가 몇 개씩 배치되는 것이 보통이다. 이 때문에 뒤로 돌아가고 싶을 경우 꽤 멀리 이동해야 하는데, 이게 아주 고역이자 처음 도쿄 전철을 이용하는 한국인들을 애먹이는 경우가 많다. 



 잘못해서 역을 지나쳤을 경우 대부분의 서울 전철에서는 내려서 바로 반대편의 열차를 타면 뒤로 돌아갈 수 있다. 위 사진과 같이 왼쪽 선로에서 내렸으면 반대편, 즉 오른쪽 선로의 열차를 타면 간단하게 뒤로 돌아갈 수 있다. 한국인들에게는 지극히 당연한 풍경이자 익숙한 개념이다. 혹시 승강장이 분리된 역이라 하더라도, 계단 하나 올라갔다 내려오면 바로 반대 선로로 갈 수 있다. 그러나 도쿄 전철에서는 역을 지나쳐 버려, 역 하나 되돌아가고 싶을 때는 내려서 바로 반대편 열차를 타면 안된다. 


요렇게 타면 뒤로 돌아가는게 아니다


 위 사진처럼 반대편에 있는 열차를 타면 십중팔구는 가던 방향으로 더 가는 열차를 타게 돼버린다. 더구나 앞서 설명한 것처럼 한 노선에도 다양한 종류가 있어서 급행이나 쾌속 같은 것을 잘못 타면 역 서너개를 더 가버리는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고, 같은 역에 정차하는 전혀 다른 노선의 열차를 타버려 완전 다른 방향으로 가버리는 경우도 생긴다. 시간이 급할 때 이런 열차를 잘못 타 버리면 시간은 시간대로 버리고 정신적으로 대미지도 엄청나게 입는다. 


 더 골아픈 건 갈아탈 때 들어오는 열차가 같은 노선임에도 불구하고 이 선로, 저 선로로 번갈아가며 들어오는 경우다(...). 분명히 같은 노선인데 홈에서 기다리는데도 열차가 안내된 시각에 들어오지 않아 어떻게 된건가 하고 봤더니 다른 선로로 들어오고 있었다. 도쿄 전철역에서는 정말로 안내판을 주의깊게 봐야 이런 낭패를 당하지 않는다. 신주쿠 역의 쇼난신주쿠라인(湘南新宿ライン) 같은 것이 이런 대표적인 경우이다.


 - 열차 노선/종류에 따라 "XX량 편성"이라는 말로 열차 길이를 안내해준다. 문제는 이에 따라 승차 위치가 바뀌곤 한다는 점. 



 위 사진에서 보듯 같은 문에도 승차 위치가 열차 편성에 따라 달라진다. 가뜩이나 복잡한 러시 아워의 전철역에서 이걸 생각하지 않고 다른 승차위치에 서 있다간 줄 잘못 서고 한참 나중에 타거나 못 타는 경우도 생긴다. 보통은 그 전에 옆에 사람들 줄서는 거 보고 뒤로 가게 되지만(...) 하여간 도쿄 전철에서는 안내 전광판을 잘 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 전철을 탈 때에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일반 1회용 티켓(킷뿌きっぷ)을 끊거나, 교통카드인 Suica나 PASMO를 이용할 수 있다. 다만 요금이 대체로 한국보다 비싼 편이고, 토에이오에도선(都営大江戸線)같은 지하철은 일반 전철보다도 요금이 더 비싸므로 주의. 취업 등으로 오래도록 머물 사람이라면 정기권(定期券:테키켄)을 끊는 것이 좋다. 기본 1개월부터 끊을 수가 있고, 정기권에 설정된 구간 내에서라면 몇 번을 타도 상관없다. 



 Suica나 PASMO는 일반적인 충전식 교통카드이지만, 역사에 설치되어 있는 발권기에서 여기에 정기권 금액을 등록할 수가 있다. 왕복할 구간(출발역/도착역)을 지정하고 금액을 넣으면 카드의 표면에 위 사진처럼 설정된 구간과 금액, 유효기간이 인쇄된다. 잘 지워지거나 묻어나는 재질의 잉크도 아닌데, 매번 정기권을 갱신할 때마다 싹 지워지고 새로 인쇄되는 것이 신기하다. 



역별로 조금씩 다르지만 발권기는 대체로 이런 형태.


보통 이런 화면으로 신규발급이나 갱신을 한다.


요렇게 금액을 넣고 충전한다. 신용카드를 이용해 충전하는 것도 가능(!). 

정기권의 경우 거리에 따라 금액이 1엔 단위까지 설정되곤 하는데, 

1엔 단위의 잔돈 투입이나 거스름돈 반환도 완벽한 어이없는 기계다.


이러한 교통카드의 발급/충전, 정기권의 발급/갱신 외에도 영수증의 발급이나 이용 내역의 인쇄도 가능하다(!)



 언제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얼마만큼의 금액을 이용했고 언제 충전했고 하는 내역이 다 나온다. 어떻게 보면 좀 무섭다... 물론 일본은 워낙 교통비가 비싸서 회사에서 교통비를 지원해 주는 경우가 많으므로, 교통비를 지원받기 위한 근거 내역으로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최근에는 도쿄의 연계버스에서도 Suica나 PASMO를 지원하고 있어서, 카드 한 장으로 대부분의 교통수단을 이용할 수 있게 되어 편리해졌다. 특정 신용카드에 Suica나 PASMO의 기능을 결합한 것도 나오고 있어, 전체적으로는 서울 교통수단과 비교해서 크게 불편하진 않게 되었다. 다만 서울처럼 전철-버스간 30분 내 환승할인 같은 혜택은 없다(...).



2. 실제 이용시 팁


 - 위에 쓴 것처럼 도쿄의 전철은 서울과 비교도 안되는 복잡성을 자랑하기 때문에, 모든 역과 노선을 한번에 보여주는 노선도란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할 수도 없다. 이 때문에 전철을 이용할 때 가장 편리한 방법은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을 이용하는 것이다. 물론 많은 앱이 존재하지만 대부분의 도쿄 사람들이 가장 애용하는 앱은 단연 이것이다. 


換乗案内(환승안내)

무료 애플리케이션이며, iOS/안드로이드판 모두 존재한다.


 기본적인 구조는 위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듯, 출발역과 도착역명을 입력하면 최단 환승절차를 알려주는 방식이다. 물론 최소요금/최단시간 등으로 루트를 다르게 뽑을 수도 있고, 몇시까지 도착/몇시에 출발하는 루트나 첫차/막차 등도 안내된다. 2013년에 업데이트되면서 역 이름의 히라가나 표기가 추가되어 좀 더 외국인들이 알기 쉬워졌고, 환승시 몇번 선로를 이용하는가에 대한 안내도 추가되어 좀 더 이용이 편리해졌다. 회원등록시 안내된 루트의 바로 전/다음 열차 안내도 볼 수 있다.


 다만 서울 지하철 노선도 앱들처럼 한번에 모든 노선을 다 보여주는 직관적 방식이 아닌지라 바로 한눈에 알기 어려운 점은 어쩔 수 없고, 갑자기 일어난 인신사고나 운행조정에는 바로 대응하지 못하는 등 한계도 있다. 근접한 역이라 환승이 가능할 경우 '도보 몇분' 식으로 나오는데 이 경우 환승 부분에 역 이름이 2개 나와서 헷갈리는 경우가 있으니 주의할 필요가 있다. 어쨌든 복잡한 도쿄 전철을 이용하는 데에 가장 좋은 수단임엔 틀림없다. 


 1) 이 앱으로 일단 환승 시간을 확인한 뒤

 2) 역 내의 전광판을 보고 해당 시간의 열차가 몇번 홈에 들어오는지 확인하고

 3) 해당 열차를 탄다


 이것이 도쿄 전철을 타고 이동하는 데에 가장 정확하고 빠른 방법이다.


 - 정기권이나 교통신용카드가 아닌 경우 교통카드의 잔액이 모자랄 때에는 대개 개찰구 내에도 발권기나 정산기가 마련돼 있고 여기에 카드를 넣으면 모자란 금액이 표시된다. 잔액이 모자랄 경우는 당황하지 말고 주변에 발권기나 정산기가 있는지 찾아보자. 역에 따라서는 간혹 없는 곳도 있으므로 이럴때는 개찰 한쪽 구석에 있는 역무원에게 카드를 주고 "정산해주세요(精算お願いします)"라고 말하면 알아서 얼마 더 내라고 말해준다. 


요렇게 들어갑시다


참고로, 밖에서 역무원에게 이야기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이렇게 문을 열고(!) 직접 상담해 주기도 한다.

처음 봤을 때엔 어이가 없던 장면...


 - 도쿄의 전철은 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조용하며, 서울처럼 전철 내에서 전화 통화를 하는 것은 매우 몰상식한 행위에 속한다. 전철 내에서 뭔가 연락할 필요가 있다면 메시지로 연락하는 것이 기본. 또한 노약자 우선석 근처에서는 휴대폰을 끄는 것이 원칙으로 되어있다(페이스메이커 등을 사용하는 환자를 배려한 것인 듯). 일본인들도 사실 잘 안 지키는 부분이긴 하지만 간혹 꼬장꼬장한 노인들의 경우는 우선석 근처에서 휴대폰 만지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괜히 해코지하는 경우도 있으므로 조심하자. 


 - 한국처럼 절대적으로 노약자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는 분위기는 별로 없으며, 젊은이들도 노약자석에 곧잘 앉아서 가곤 한다. 한국인으로서는 꽤 마음 편한 부분일 듯. 다만 역시나 꼬장꼬장한 노인들에게 잘못 걸리면 짜증나게 되는 경우도 있으니 적당하게 알아서 양보하자.


 - 전철역에 화장실이 없는 경우도 종종 있고, 있다 하더라도 역의 크기나 복잡성에 비해 화장실이 적거나 찾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가장 단적인 예가 신주쿠 역. 그 거대한 역 전체에서 화장실 찾기가 손에 꼽을 정도. 큰 전철 역이 있다면 화장실의 위치는 숙지해 두는 것이 좋다. 


 - 도쿄의 경우 이용객이 워낙 많은데다 열차 자체의 폭도 좁아 러시아워 시간에는 한번 타면 한국 전철처럼 열차 안에서 이동해다니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 이 때문에 전철 타고 가면서 사람 만나는게 까다롭다. 한국이라면 승강장에서 기다리게 한 뒤 전화걸어서 "지금 들어오는 열차 타라"라고 말하면 그만이지만, 일본은 전철 내에서 전화통화도 무리이고, 휴대폰이 안터지는 구간도 종종 있는데다 위에 써놓은 것처럼 승차 위치도 열차에 따라 다른지라 참 골아프다. 웬만하면 열차 타고 가면서 사람 만나기보다는 그냥 밖에서 만나는게 정신건강상 이롭다.



 일단 이정도... 생각나면 나중에 더 추가하겠음.














어제 무심히 저녁먹으며 TV보다 감탄해버린 TM레볼루션과 미즈키 나나의 듀엣곡 Preserved Roses.

감동먹고 PV 찾아봤는데 PV는 너무 유치해서 ㅠㅠ...


TM이야 워낙 실력파라 두말할 필요가 없지만 성우인데도 TM에 전혀 꿀리지 않는 미즈키 나나도 대단하다.


1. 엔하위키 미러 나이츠 관련 항목


http://mirror.enha.kr/wiki/%EB%82%98%EC%9D%B4%EC%B8%A0%20%EC%8B%9C%EB%A6%AC%EC%A6%88#rfn9



2. PS2판 나이츠 개발에 얽힌 제작비화


 PS2판의 개발을 맡았던 상하이 스튜디오의 고군분투를 술회하고 있지만, 원작 팬에게 있어서 상당히 납득되지 않는 퀄리티의 결과물을 낸 주제에 자아도취되고 있는 경향이 강해 좀 눈쌀이 찌푸려지는 글. 더불어 중국 문화나 스탭에 대한 멸시도 은근히 엿보이는 등 좀 꼴같잖다. 나카 유지의 현역 시절 작업이 어떤 것이었는지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는 좋은 참고가 된다.

 가장 어처구니 없는 것은 새턴판 소스의 유실인데... 나이츠 뿐만이 아니라 팬저 드래군이나 버파 2의 컨버전에서도 원본 소스가 유실되어 이식에 개고생하는 이야기가 흔함. 대체 일본 개발사들은 소스 관리를 어떻게 하는 건지...


http://nights.sega.jp/nights1/ps2/image/memory/vol14/home.html

http://nights.sega.jp/nights1/ps2/image/memory/vol15/home.html



14 회  나이츠 ~ come out of bad dream...

PS2 'NiGHTS'프로듀서 우치다 마코토(세가 스튜디오 CHINA)

 

 

~ 지금으로부터 2년 전 (2006 2 ) ~ 

 

"SEGA AGES 2500 다이너마이트 형사"가 완성 직전이 되어, 다음 프로젝트는 무엇으로 할까 프로듀서와 함께 검토 개시

다이너마이트 형사가 꽤 퀄리티 좋게 나왔기 때문에, "어려운 작업이겠지만 나이츠 해 보지 않을래요?"라고 말하기 시작한 프로듀서. 우리들 스스로에게도 "보람이 있는" 타이틀이다

개인적으로 알아봤더니 "간절히 원한다" 등의 유저로부터의 요청도 매우 많다

실로 어려운 이 개발 난이도 때문에 일본의 개발팀으로서는 채산이 맞지 않고, 우리가 하지 않으면 세상에 나올 일이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뭔가 책임감 같은 것마저 솟아올라 버려, 결국 동의했다

이 시점에서 "2006년에 발매하면 10주년 기념이 됩니다"라고 이즈카 프로듀서가 말했지만, 프로듀서는 쓴웃음을 지으며 흘려 버렸다.

 

~ 작업 개시부터 1 개월

 

당시의 상사이며 나이츠의 창조자이기도 한 N(역주: 나카 유지)로부터 "정말 상하이 팀에서 할 수 있는가? 전부 어셈블러 언어로 짰고, 게다가 새턴의 트윈 CPU Full로 사용하고 있었다구"고 탐탁치 않은 반응을 들었지만, "뭐 한번 지켜봐 주세요"라고 호언장담하면서 설득이것이 결국은 스스로를 배수진으로 몰아 넣어 버리게 된다

새턴 버전의 소스는 있었지만, 원본 그림의 데이터는 전멸이고, 크리스마스 나이츠 소스는 행방 불명. 갑자기 앞길이 어두워졌다

동영상 부분도 고화질 데이터가 남아있지 않고. 그렇다면 다시 렌더링하자 라고 생각해서 데이터를 찾아보면 리소스도 부족. 일부 부족한 부분은 눈으로 보면서 최대한 비슷하게 만들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상당히 힘든 작업으로, 상하이 스튜디오의 적자 프로젝트로 확정

그래도 "보람이 있는" 일이므로, 거기는 상사에게 비밀로 하고 GO! 

사운드는 幡谷 씨가 전면 협력을 제공했다. 본인도 상당히 의욕을 가지고 있는 듯. 그러나 바쁜 관계로 본격적인 작업은 6월부터 들어가는 것이 되었다.

 

~ 작업 개시부터 2 개월

 

세가의 판매 목표가 ○만개로 설정되어 예산도 조금 늘고 상하이 스튜디오는 적자를 회피할 수 있게 됐다

이즈카 프로듀서가 다루는 신작과의 콜라보레이션도 고려해, 2007년 봄에 PS2 버전의 나이츠로 인지도를 올리고, 연말에 신작으로 크게 히트시키자 라는 전략이 짜여졌다.

상하이 팀은 유례없이 흥분했다. 다이너마이트 형사와는 완전히 급이 다르다.

 

~ 작업 개시부터 4 개월

 

어셈블러 분석팀의 작업 진행 상황이 아무래도 수상하다

4명이 달라붙어 하고 있었지만, 살펴보면 뭔가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그것을 살펴보고 있던 우리에게 청천벽력같은 소식이 날아들었다.

"메인 프로그래머 4명 중 3명이 동시에 사표 제출!

그것은 다름아닌 헤드 헌팅이었다미국에서 장렬한 싸움 끝에 세가를 때려 눕힌 그 ○A 사가, 여기 상하이에서 우리에게 송곳니를 드러낸 것이다

당연히 그들의 작업은 어중간한 상태로 팽개쳐져, 내용이 내용인 만큼 계속 이어서 작업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나이츠 프로젝트는 사망 직전의 위기에 빠져 버렸다

우리 상하이 팀의 얼굴은 흐린 상하이 하늘 같은 회색이 되어 버렸다.

 

~ 작업 개시부터 5 개월 ~

 

이 시점에서 나이츠는 정말 into dreams... 였다

그러나 나의 긴 게임 개발 경력에서 유일한 자랑은, 일단 개발을 시작해 놓고 완성에 이르지 못한 게임은 하나도 없다는 것. (히트했는가 어떤가는 별개로 치고

이 정도 일로 포기할 정도로 깔끔한 성격은 못 된다. 게다가 여기서 그만두면 세가 상하이에는 큰 오명이 남아 버리고, 나이츠가 부활하지 못하고 "간절히 부탁한다"라는 유저들의 리퀘스트도 증가할 것이다

나는 그 시점에서 최고의 능력을 가진 중국인 프로그래머와 가장 의지할 수 있는 일본인 프로그래머 O씨에게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즉시 끝내고 나이츠를 담당해 달라"고 지시를 내렸다

이것은 부탁이 아니라 명령이다. 부탁으로는 받아들여질 난이도가 아니다

"대신, 일정 만큼은 너희들 말대로 할 테니까"라고 설득해서,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실제 가능한 견적을 내기 시작해 주었다.

이렇게 엉망진창인 중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조각'을 주워 모으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 작업 시작 후 6 개월

 

나는 그 헤드 헌팅 소동과 그 영향을 프로듀서에 설명해야 했다

마음이 무거운 이야기를 담담하게 전하고, 어느 정도 늦어지게 되는가는 견적 나오는 것에 달려 있다, 게다가 견적 내는 것 자체도 몇 개월은 걸린다는 것을 전했다.

절망적인 내용과 나의 기운 빠진 모습이 수화기 너머로 보였는지, 마음씨 좋은 프로듀서는 이렇게 말해 주었다

"일정 지연은 상관 없습니다. 현실적으로 진행해 주세요. 다만 예산은 늘리지 않는 방향으로

여러 가지 의미로 고마운 말이다

나는 직원들에게 이를 알리고, 일본 측은 우리의 노력을 기대하고 있으니 근성을 보여 달라고 박차를 가했다

그리하여 개발 팀은 무서운 난이도의 어셈블러 격투에 다시 도전하기 시작했다

나중에 프로듀서에게서 "우리 나이츠는 프로젝트가 작아서 걱정은 안 돼요"라는 말을 들었던 것 같지만, 싼 중국 술로 취해 버려서 그런지 명확하게 기억이 안 난다.

 

~ 작업 시작 7 개월 ~

 

개발 스탭이 어셈블러의 동작을 검증하기 위해서 아무래도 새턴의 개발 장비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새턴의 개발 기재라는 게 또 10년 전의 골동품이 아닌가. 사용법은 커녕 어디에 처박혀 있는지부터가 불분명하다어떻게 발견되었다고 해도 잘 작동하리란 보장은 전혀 없다

찾아보는 것도 꺼려하는 기재 지원팀을 설득해서 고생 끝에 겨우 한 대를 대여 창고 안쪽에서 발견했다기쁨도 잠시, 이것을 작동시키기 위해서는 또 골동품 PC( PCI 슬롯이 있는)가 필요하다는 이야기. 이쪽도 난리 법석을 피우며 회사 전체를 뒤진 끝에 어떻게 개인이 가진 것을 발견

기재 지원팀을 닥달해, 자원 봉사로 새턴 개발 킷을 연결하고 작동할 수 있게끔 세팅. 정말 눈물겨운 노력 끝에 겨우 새턴 개발 환경이 갖춰졌다여기까지 간단히 몇 개월이 소비되고, 또한 해외 반출 문제로 옥신각신한 끝에 겨우 상하이로 가져올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나중에 나이츠를 원작에 충실하게 재현할 수 있게 해 준 원동력이 되어 주었다.

 

~ 작업 개시부터 9 개월

 

어셈블러 분석 팀의 견적이 끝났다.

그 결과는 귀를 의심할 정도로 무서운 것으로, 우리 모두가 얼어 붙어 공포에 질려 버렸다.

"이대로 어셈블러 분석을 계속해서 제작하면 이제부터 2년 걸려도 완성되지 않습니다."

 

·········아아·········나이츠········

 

아아, 나이츠이 얼마나 위대한 게임인가.

우리를 괴롭히고, 수렁에 내팽개치고, 그래도 일어서려고 하는 마음을 "이래도냐!" 라고 짓밟아 준다

N씨의 혼이 깃든 게임은, 그것을 건드리는 자를 가차없이 곤경에 빠뜨려 버린다고 하는 전설은 진짜였던 것인가

그러나 나는 말해야 한다책임을 진 사람으로써 말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완성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일동은 더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 작업 개시부터 10 개월

 

다시금 나이츠는 into dreams...가 되어 있었다

여기가 나에게 가장 큰 고비였다

개발팀은 "어셈블러 분석은 어느 정도로만 하고, 나머지는 보면서 비슷하게 만든다"가 최선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나이츠는 어중간한 규모의 게임이 아니다모두 처음부터 만들게 되면, 게다가 새턴 모드와 오리지널 모드 양쪽을 만들게 되면, 그림 작업만으로도 막대한 양이 되는 것은 물론, 어셈블러로 작성된 소스 코드의 양이 예사롭지 않다. 도대체 몇 명이 달라붙어서 얼마나 노력을 쏟아부었는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게다가 그 열성적인 나이츠 팬들을 설득할 수 있을 정도의 퀄리티가 필요하다

나는 게임 제작 초보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 작업이 그림의 떡으로 느껴질 정도의 거대한 것임을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었다

더욱 문제는 기간과 예산아무리 중국인 직원의 인건비가 싸다고 해도 공짜가 아니고, 당초 예정 마감일까지 반 년밖에 남지 않았다이 작업을 하는데 얼마나 비용이 드는지 얼마나 시간이 걸리는지, 아득하게 마음이 멀어져 간다

"그만두자라는 선택지는 없나요?" 한 명의 직원으로부터 외침이 들린다

아아, 그 말은 얼마나 달콤하고 기분 좋은 울림인가?

그것이 가장 편하고, 이 고통에서 해방되는 지름길인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잘 알고 있다

그래, 알고 있다. 하지만 나에겐 선택할 수 없는 길이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선택할 수 없는 거야

"…한다. …한다고 했으면 한다. …어쨌든, 어떻게든 한다구"

나에게 남아 있던 것은 이제 공허한 말 뿐이었다.

 

~ 작업 개시부터 11 개월

 

대폭적인 개발 정책의 변경 및 팀 구성의 개편

작업 사양을 최적화하는 것과 스케줄 재정리를 한번에 밀어부쳤다. 팀은 이 시점에서 회사에 남아 있는 프로그래머를 모두 투입했다남지 않은 사람도 투입했다

덕분에 다른 프로젝트는 프로그래머가 없어서 삐걱삐걱

디자이너도 많은 수를 투입해 단번에 추진하기로 했다때마침 다이너마이트 형사 EX 팀의 스케줄이 비어 있었기 때문에 10명 전원을 그대로 넣었다

새턴 모드의 담당과 오리지널 모드의 담당이 각각의 배경과 모델을 새로운 작업처럼 열심히 만들어 간다이런 작업은 상하이 팀에게 잘 맞는다. 일의 속도가 바로 능력이라고 생각하는 문화적 배경이 있는 것이다

예산 오버는 이미 생각하지 않고 있다. 어쨌든 우선 일정을 중시한다, 다만 퀄리티를 타협하지 않는다 라는 무서운 날림 작업에 돌입했다

웬지 모르지만 이제는 무서운 게 없는 상태가 되어 있었다

할 수 있다, 할 수 없다 라고 말하기보다도, "한다" 라고 하는 의식밖에 없게 되어, 고민은 완전히 사라졌다멤버들도 그 말대로, 오로지 "한다" 라는 생각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모두, 어쩐지 "될 것 같다" 라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 작업 개시부터 12 개월

 

여기까지 왔는데 일본인 프로그래머 O씨가 비명을 질렀다이렇게 큰 배경은 1스테이지 분량조차도 PS2 메모리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새턴판 나이츠에서는, 배경 정보를 칸으로 나누고 좌표의 높이 정보만으로 구성하는 무시무시한 압축 방법을 취하고 있었다아마도 새턴의 코딱지만한 메모리에서 광대한 배경을 만들기 위해 궁리해 낸 천재적 발상일 것이다

게다가 모처럼 찾아내 겨우 들여온 새턴 개발 장비는 거의 수명이 다 되어 가는 낡은 물건으로 툭하면 리부팅되거나 하고, 한 대밖에 없기 때문에 트윈 CPU를 디버깅할 수 없으며 고급 프로그램은 알고리즘이 도중에 쫓아갈 수 없게 되는 등, 그의 비명과 고뇌는 매일같이 계속되고 있었다

나에게는 컵라면을 들여와 건네주는 정도의 일 밖에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지만, 웬지 내가 갖다 준 일본 컵라면도 그의 책상에 차례차례 산처럼 쌓이고 그 아래 책상에 푹 엎드려 점심 시간을 자면서 보내고 있다 . 컵라면조차 먹을 겨를이 없는 것인지… 

그 후에도, 이런 선배들의 무서운 지혜 + 장비의 결함과 O씨의 사투는 계속되어 갔고, 그의 초인적인 활약에 의해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어 갈 수 있었다.

그런 와중에, 幡谷 씨에게서 노래와 효과음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幡谷 씨의 혼이 담긴, 그리운 나이츠의 곡이 드디어 PS2에서 흐르기 시작했다그것으로 우리의 의식은 "할 수 있을 것 같다"에서 "가능하다"로 극적으로 변해가는 것이었다.

 

~ 작업 개시부터 14 개월

 

드디어 출시를 위한 작업이 많아지고, 섬세한 조정과 밸런싱이 산처럼 쌓여 나와 李 디렉터를 덮쳐오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 일본으로부터 다카하시 디렉터가 상하이로 부임해 와 주었다.

이건 정말 다행스러운 일로, 나는 그에게 나이츠의 총 지휘를 맡기기로 했다이것이 나이츠에게 극적인 호재였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 즈음부터 새턴판의 세밀한 부분의 사양에 맞춰 재현하는 작업을 하게끔 되었다. 이런 작업은 역시 일본인의 깐깐한 시선이 필요하다. 그는 그 빛나는 안경의 안쪽에서 날카로운 시선을 던지며, 차례차례 수정점을 찾아주는 것이었다

강력한 용병을 손에 넣어, 나이츠 팀은 드디어 마지막 난관을 마주하게 된다.

 

~ 작업 개시부터 16 개월

 

개발 시작 당시부터 가장 난관이 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던 골칫거리가 이 시점에서도 남아 있었다

그렇다, 바로 A-LIFE이다

"인공 지능" 님은 기획서와 프로그램이 일치하지 않고, 개발한 본인도 "만들어진 결과물 프로그램의 내용이 정확한 사양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상태.

대부분 즉석에서 생각난 것을 거듭해서 덧붙여 버려, 말하자면 알고리즘의 프랑켄슈타인 상태였다. 그 프랑켄슈타인이 어셈블러 언어로 짜여지고 있는 것이니까, 이것은 그냥 웃을 수밖에 없다

그것도 게임의 메인 컨텐츠도 아닌데 쓸데없이 팬에게는 기억에 남아 있고, 수수께끼 투성이인데도 반드시 재현시켜야 한다는 사명이 있기 때문에 이젠 헤드 헌팅이 없어도 도망치고 싶어진다

담당자는 필사적으로 어셈블러 언어와 씨름하고, 원래 코드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분석하고 하나 하나 재현해 가는 수밖에 없었다

"인공 지능"님은 정말 마지막 순간까지 버그를 일으키는 데다가, 원작 새턴판과의 섬세한 차이를 다카하시 디렉터와 프로듀서에게서 계속 지적받아, 담당자는 악몽까지 꾸면서 이 괴이한 생물의 재현에 힘을 다했다

이러한, 중국인으로서는 상당히 끈질긴 작업 덕분에, 어떻게든 만족스러운 A-LIFE 군이 완성될 수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난관이 나이츠의 움직임이다

뭐니뭐니 해도 나이츠의 움직임이야말로 이 게임의 모든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건 말하지 않아도 누구나 알고 있다

담당 프로그래머는 나이츠의 움직임 재현에만 반 년간 매달려, 이제 한계에 가까운 상황까지 오고 있었지만, 역시 프로듀서도 이즈카 프로듀서도 우리의 나이츠의 움직임에는 전혀 납득해 주지 않았다다카하시 디렉터도 李 디렉터도 매일 밤 자정까지 오로지 나이츠의 조작감을 새턴판과 비교하여 개선책을 찾았다

새턴 개발 장비도 마지막 불꽃을 태우듯이 수없이 다운되면서도 24시간 풀 가동하며 나이츠의 재현에 힘을 빌려주고 있다

마스터 업 마감이 닥쳐오고 모두가 하얗게 질려 탈진할 무렵, 그것은 완성됐다동시에 크리스마스 나이츠도 완성되고, 나는 양쪽의 시연을 동시에 지켜보았다.

 

감개무량했다.

 

부드럽고 거침없는 조작감. PS2 컨트롤러의 한계까지 최적화 된 느낌. 그리고 무엇보다 크리스마스 나이츠의 놀라운 아름다움과 함께, 그야말로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수밖에 없었다

스스로 조작하고 있어도, 다른 사람의 플레이를 보고 있어도 왠지 뭉클해져 오는 이 게임

이것이라면 괜찮다. 모두가 만족해 줄 것임에 틀림없다

남은 것은 이제 완성을 향해 달리는 것 뿐이다.

 

~ 작업 개시부터 24 개월 ~

 

그 이후, 결국 발매까지 매우 오랜 기간이 걸려 버린다

판매 전략에 변화가 생겨, 신작을 낸 후에 판매에 들어가게끔 되었기 때문이다

"왜 신작을 먼저 내고 리메이크가 나중이 되지?" 라고 모두가 이상하게 생각했었지만, 그것은 우리의 작업 지연이 큰 원인이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하고 있다그 부분을 지적받고 있는 것도, 발매일이 결정되었다고 들었을 때에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우리에게 더 이상 의미가 없다. 우리에게 신경쓰이는 것은 플레이해 준 고객이 만족해 줄까 어떨까 뿐이니까

그것 때문에 단지 이렇게 무리해 왔다. 이렇게 고생을 거듭해 왔다.

이렇게도 피를 토하는 고생을 감수해 왔다.

그 성과를 드디어 선보일 때가 온다.

다행히 그림책이 딸린 "나이토피아 드림 팩"은 예약이 쇄도이외에 세가 다이렉트 오리지날 상품의 사운드 트랙도 무서운 매진

나이츠 팬의 열정에 몸이 떨린다.

그리고 출시 후의 유저 반응. 이것 만큼은 우리의 작업에 모든 책임이 달려 있다팽팽한 긴장 속에서 발매 카운트 다운에 들어가고 있었다.

 

~ 발매 ~

 

2008 2 21, 드디어 그 때가 왔다

숨을 죽이고 지켜 보던 우리에게 판매 상황과 사용자의 반응이 와 닿기 시작한다

판매량은 예상을 약간 밑돌지만, 유저의 반응은 대단히 좋다

때마침 축구의 16문 킥(역주: 20082월 동아시아 선수권 중일전에서 일본의 야스다 미치히로가 중국 골키퍼 중레이의 발에 옆구리를 차여 병원으로 후송된 사건. 자이언트 바바의 킥 기술인 16문 킥을 빗댐) 이나 만두 사건(역주: 비슷한 시기 일본 내 중국산 냉동만두에서 농약이 검출되어 중-일 관계가 악화되었던 사건. 이 때문에 전술한 축구 시합의 분위기가 매우 좋지 않았다고 한다)의 직후였기 때문에, 그 중에는 엔딩 크레딧을 본 뒤 상하이 팀의 작업이란걸 알고 좀 애매한 기분이 된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평판은 대단히 좋았다

그리고 우리와 마찬가지로 플레이하면서 감동으로 눈물 흘리는 사람도 적지 않다는 것이다

이 순간, 우리는 모든 고생이 마침내 보답받은 기분으로 충만했다.

이 나이츠의 움직임과 재현된 그래픽, 오리지널 모드보다도 힘들었던 새턴 모드, 보는 것도 싫어져 버린 A-Life, 그리고 소스도 없었던 크리스마스 나이츠

그것들 모두가 의미있는 일로 평가되고 유저의 환영을 받고 있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가장 원했던 보물이다

아마 같은 마음이었을 터인 프로듀서가, 잽싸게 연락해 오더니 이렇게 말했다

", 다음은 무엇을 한다죠?" 

어이 잠깐, 잠깐 기다려, 지금은 이 만족감에 빠져있게 내버려 둬 줘

우선 "전파 상태가 나빠서 잘 안들려요-"로 무시해 버리고 회사의 현관으로 향한다

거기엔 내가 특별히 부탁해서 만든, 항상 크리스마스인 채로 계속 돌아가는 나이츠 데모 기기가 놓여있다아무도 플레이하지 않아도, 그 화려한 화면에 두근거리는 크리스마스 노래가 흐르고 있어

나는 이것을 세가 상하이의 대표작으로, 회사 입구에 오랫동안 전시해 두자고 결정하는 것이었다.

 

~ 추가 ~ 

 

A-LIFE에 대한 당시 개발자와의 문답이 재미있으므로, 조금 소개합니다.

 

Q. 1스테이지에서 슈퍼피안은 2마리 만들 수 있을까

A. 본 적은 없지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Q. 크리스마스 나이츠에서도 슈퍼피안은 만들 수 있을까?

A. 본 적은 없지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Q. 피안 타워도 크리스마스 모습이 되는가

A. 기억이 안난다. 크리스마스 트리로 만들었었을지도.

 

Q. 나이트피안 컬렉션에서 슈퍼피안은 어느 쪽으로 분류되나

A. 기억 안난다. 어느 쪽일까 라고 한다면 "피안" 쪽 아닐까.

 

Q. 게임 속에 등장하는 피안과 나이트피안 컬렉션의 피안은 왜 차이가 있나

A. 버그입니다. 고쳐주세요.



3. 예전에 써뒀던 SS - PS2판 차이점 분석글


http://bbs1.ruliweb.daum.net/gaia/do/ruliweb/default/170/read?bbsId=G001&articleId=2877226&itemId=77225


PS2판 나오자 마자 사서 플레이해봤는데 새턴판과 미묘하게 차이가 나는 부분이 꽤 있군요. 대체로 그래픽 이외에는 원작의 쾌적한 맛을 떨어뜨리는 쪽으로 바뀐 편이라 좀 짜증이 납니다. Wii용 나이츠 2 정도의 실망감은 아니지만 이쪽도 기대했던 것보다는 조금 실망이라 아쉽네요. 



< 장점 > 


* 그래픽이 깔끔해졌다 


- 해상도가 올라가고 폴리곤 수가 늘어나서 전반적인 그래픽이 깔끔해졌습니다. PS2 특유의 칙칙한 색감 덕에 화사한 맛은 죽어버렸지만... 


- 스플래시 가든의 물 그래픽 등이 상당히 보기 좋게 바뀌었습니다. 


* 동영상의 퀄리티가 좋아졌다 


- 화질 자체는 옛날이랑 크게 다르진 않지만 프레임이 부드러워진 것은 좋습니다. 


* 크리스마스 나이츠의 나이트피언 콜렉션이 포함되어 A-LIFE를 즐기기가 편해졌다 


- 이건 이번 PS2판의 가장 중요한 장점이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 단점 > 


* 나이츠의 조작이 둔해졌다 


- 방향을 빠르게 꺾고 선회하는 것이 새턴판보다 상당히 어려워졌습니다. 이 때문에 링크를 하기가 예전보다 꽤 어렵습니다. 스노우 벨 1스테이지의 200링크 같은건 정말 맘잡고 하지 않으면 못하겠더군요. 


- 드릴대시를 하지 않을 때에도 이동속도가 새턴판보다 미묘하게 느립니다. 대시를 하지 않으면 굉장히 이동이 피곤해지는 느낌. 


- 드림팰리스에서 나이츠와 동화한 직후 약간의 드릴대시 불가능 시간이 존재합니다. (아니 대체 왜?!) 이 때문에 게임 템포가 끊기는 느낌이 들고 묘한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 인간 캐릭터의 이동속도 역시도 새턴판보다 조금 느립니다. 점프가 아니면 빠르게 움직이기가 힘듭니다. 새턴판처럼 자유롭게 돌아다니기가 어려운 느낌. 


* 전체적으로 난이도가 올라갔다 


- 미스틱 포레스트의 지하신전에 인간인 상태로 들어갔을 때에 새턴판은 나올 수 없게 되는 버그가 있었지만 PS2판에서는 낮아지는 천장에 깔리면 바로 Night Over로 처리. 처음 겪어보고 어처구니가 없더군요. 


- 미스틱 포레스트 수평시점 진행부의 난이도 상승. 고장난 자동차를 인도하기가 매우 어려워졌습니다. 제대로 쫓아오지도 못하며 조금만 시야에서 멀어져도 바로 다른 곳으로 가 버리는 등 이해할 수 없는 움직임을 보입니다. 또한 해당 지형에서 나이츠가 빠져나오는 루트가 변경되어 있어 예전처럼 쉽게 빠져나오기가 어렵게 되어 있습니다. 

 (참고 : http://www.youtube.com/watch?feature=player_detailpage&v=NM7iXM0xJlk&t=232)


- 스플래시 가든의 연속 물방울 통과시 묘하게 직선주행이 힘들어졌습니다. 전에는 한번에 풍선을 터뜨릴 수 있을 정도로 상쾌한 진행이 되던 부분인데 스트레스가 쌓이게 변경되었군요. 


* 몇몇 보스 캐릭터들의 난이도 상승 


- 길윙의 경우 몸의 관절 수가 늘어나서 여러번 공격해야 죽일 수 있게 변경. 꽤 어렵습니다. 처음 등장하는 보스로는 난이도가 너무 높아진 느낌. 


- 걸포가 예전보다 이동을 많이 하며 보다 약삭빠르게 움직입니다. 특히 새턴판에서는 거의 맞을 일이 없었던 방전 공격에 당하는 일이 많아졌으며, 터치 대시로 물기둥을 가로질러 공격하는 중에도 몸의 자체 공격판정에 당하는 경우도 종종 일어납니다. 매우 짜증나게 바뀐 보스. 


- 퍼피의 경우 터치 후 회전하여 각도를 결정할 때의 조작이 새턴판보다 불명확합니다. 기본적 난이도 자체는 변함없지만 이 조작감 때문에 클리어가 어려워진 느낌. 


- 와이즈맨 보스전에서 본체까지 접근한 뒤 공격할 때 새턴판은 쉽게 공격할 수 있었지만 이번엔 자체 방어막이 상당히 강해 몇 번씩 튕겨나오고 나서야 공격이 가능합니다. 꽤나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부분. 


* 세부적인 퀄리티의 문제 


- 알람 달걀의 알람소리가 아주 듣기 싫게 변경. 따르릉 하는 알람 소리가 아니라 무슨 전기톱질 하는 소리가 나는데 상당히 불쾌해진 느낌... 


- SEGASATURN DREAM 모드로 미스틱 포레스트를 진행할 경우 수평시점 진행부의 그래픽이 아주 형편없이 깨집니다. 새턴판에서는 전혀 이런 일이 없었는데 실로 어처구니가 없는 현상입니다. 


- 블루 칩의 디자인이 이상해졌습니다. 예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전작보다 배경에 좀 묻혀 보이는 느낌이 강해져 바로바로 찾아 얻기가 좀 어려워졌네요. 


- 나이트피언들이 3D화가 되면서 귀여움이 많이 떨어졌습니다. 게다가 3D면 오히려 더욱 부드럽고 다채롭게 모션을 넣어줄 수 있었을텐데 전작의 2D 나이트피언들이 보여주던 휘파람 불기나 웃으면서 따라다니기 등등의 기본적인 움직임들조차 많이 없어진 것 같습니다. 



< 총평 > 


이제 슬슬 소닉 팀 게임은 안 사도 되는 시기가 오는 것일지도... PSP용 판타지스타 유니버스를 마지막으로 체크해볼 예정입니다.



4. 해외 나이츠 팬포럼에서 작성된 SS판과 PS2판의 차이점


http://nidscores.com/?page_id=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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