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news.donga.com/Series/70020000000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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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교 50년, 교류 2000년 한일, 새로운 이웃을 향해]시리즈를 시작하며

칠지도 보러 온 日관람객들 2월 일본 후쿠오카 규슈국립박물관이 개관 10주년 특별전으로 연 ‘고대 일본과 백제의 교류’전에 모인 일본인들. 중년의 관람객들이 백제와 왜의 문화 교류를 보여주는 중요한 유물인 칠지도 앞에 서서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 일본 국보 중 국보로 평가받는 칠지도는 이번 전시를 위해 특별히 신궁에서 빌려왔다고 박물관 측은 전했다. 후쿠오카=허문명 국제부장 angelhuh@donga.com



《 올 2월 23일 일본 후쿠오카(福岡) 다자이후(太宰府)에 있는 국립규슈박물관 1층 전시장은 관람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조용히 줄을 지어 관람하던 일본인들은 유물 앞에 서서 한동안 뚫어지게 보거나 뭔가를 열심히 적는 등 매우 진지한 모습이었다. 
관람객들은 대부분 50대 이상 중년들이었다. 전시를 보기 위해 멀리서 온 사람들도 있었다. 금융회사에서 일하다 은퇴했다는 기시모토 씨(65)는 “도쿄에서 5시간 신칸센 기차를 타고 왔다. 평소 일본 고대문화에 관심이 많았는데 신문에 난 전시 소식을 듣고 짬을 내 왔다”고 했다. 

올해로 개관 10년째를 맞는 규슈박물관은 후쿠오카 시에서도 차로 30여 분 가야 닿는 비교적 외곽에 있지만 규모와 건물 디자인 면에서 동서양의 미학을 제대로 살린 건축물이라는 평을 듣는 곳이다. 연 평균 관람객이 10여만 명에 달할 정도로 시민들에게 인기가 있는 공간이지만 그중에서도 이번 전시가 2개월(2~3월) 동안 무려 5만 명을 불러 모을 정도로 각별한 주목을 받았던 것은 ‘고대 일본과 백제의 교류’라는 제목을 내건 특별전 때문이었다. 

일본 미술관이나 박물관들에 가보면 문화 전파를 언급할 때 ‘중국에서 건너왔다’고 두루뭉술하게 표현되어 있기 일쑤이다. 그러나 이번 전시에서는 제목에서부터 아예 ‘백제’를 내걸고 일본과의 문화 교류를 강조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끌었다.》 

우리에게도 친숙한 반가사유상을 내걸고 ‘고대 일본과 백제의 교류’를 소개한 전시장 입구.

실제로 둘러본 전시장 곳곳에 걸린 시대별 유물을 설명하는 글들에서는 백제인에 대한 존경과 헌사의 내용들로 가득했다. 전시장 입구에서부터 백제가 왜(倭)와 연합군이 되어 신라와 중국에 맞서 전쟁을 치른 ‘백천강’ 전투를 조명하면서 두 나라가 혈맹(血盟)이었음을 강조하는 다음과 같은 대목은 파격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강렬했다. 

‘신라와 중국 당나라(나당) 연합군의 공격으로 660년 백제가 패하자 백제 유민들은 너도나도 규슈로 왔고 3년 뒤 유민들을 중심으로 백제 부흥 운동이 일어나자 왜와 손을 잡았다. 663년 백제와 왜 연합군은 백제왕조 복원을 위해 백천강(지금의 금강 하구) 전투에서 나당연합군과 싸우지만 대패한다.’

‘백천강 전투’는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하지만 한일 고대 사학계에서는 익히 알려진 사건이다. 한반도에 고대 국가가 만들어진 330년부터 백제·고구려가 잇따라 망하는 660년대까지 백제는 고구려 신라와는 적으로 싸웠지만 왜에게는 문명을 전해주고 군사적 지원을 받았다. 백천강 전투 때 왜군들은 무려 3만여 명의 군사를 파견했다가 대부분 희생됐다. 

전시를 기획한 구스이 다카시 전시과장은 “전투 후 신라와 중국이 쳐들어올 것을 우려한 일본인들은 백제의 병법과 건축 기술을 활용해 미즈키(水城), 오노조(大野城), 기이조(基肄城) 세 성을 쌓았는데 ‘일본서기’는 이 건축물들에 ‘백제에서 망명한 관료들이 관련돼 있다’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며 “백제인들은 고대 일본이 국가를 건설하는 과정에 깊게 관여한 매우 중요한 사람들이었다”고 했다.

전시에는 백제와 고대 일본의 문화 교류를 상징하는 토기, 장식품, 기와, 불상 등이 공개됐는데 이중 가장 눈길을 끈 것이 백제 칼 ‘칠지도(七支刀)’였다. 일본 국보로 지정된 ‘칠지도’는 고대 일본의 수도였던 나라(奈良) 현 덴리(天理) 시 이소노카미(石上) 신궁에 보관된 것으로 일본인들에게조차 잘 공개되지 않는 국보 중의 국보로 통한다. 비록 일주일 한정이긴 했지만 이번 전시에서 진품이 공개되자 일본인들은 물론이고 한국인들까지 관람을 했다고 박물관 측은 밝혔다. 

전시를 보고 나오며 기자는 박물관 관계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지금으로부터 1350년 전 이곳 규슈로 이주한 백제인들을 떠올리며 전시를 기획했다”고 했던 말이 귀에 생생했다.

작금의 한일 관계는 매우 답답한 형국이다. 뭔가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고들 말한다. 이에 본 시리즈는 다음 두 가지 시각으로 기획되었다.

첫째, 위안부문제 독도문제 등 현안도 중요하지만 동아시아 문명사의 전래와 확장이라는 역사적 시각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동아시아 문명사는 북에서 남으로, 바이칼 황하 등 물에서 육지로, 기마민족에서 농경민족으로 확산되어 왔다. 우리 선조들이 수렵과 어업이 주축이던 일본에 벼농사와 문명을 전파하고 진출한 것은 어쩌면 역사의 필연에 가까운 것이었다.

둘째, 지금 이 시점에서 한일 관계는 양국의 평화와 더불어 지구촌 공영에 공동 기여 한다는 미래지향적 시각이 중요하다. 특히 젊은이들에게 역사를 잘 가르쳐 미래의 주역이 되도록 도와야 한다. 

한일 두 나라 관계가 단순한 일방적 교류나 식민 피지배 시기로만 한정되는 적대적 관계가 아니라 오랜 시공간적 시간으로 보면 지구상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동질적인 문명적 복합체 성격이었음을 드러내는 것은 그래서 중요하다고 본다. 차제에 한일 젊은이들이 미래에 함께할 수 있는 공통분모를 한일 간의 2000년 교류 역사 속에서 재발견해야 하는 이유이다.

2001년 日王 “일본인에게 백제인의 피가 흐른다” 한일 월드컵을 한 해 앞둔 2001년 12월 23일 아키히토 일왕이 68세 생일을 맞아 왕실에서 한 기자회견에서 “속일본기에 간무 천황의 생모가 백제왕의 자손이었다는 기록이 있다”고 말한 것을 제목으로 뽑은 석간 아사히신문 23일자 1면. 출처 아사히신문PDF

한편 이 대목에서 일본인들 스스로 자신들의 피 속에 백제인의 피가 흐르고 있음을 고백하면서 한국과 일본인들이 서로를 더 잘아야 한다고 말한 사람이 있으니 다름 아닌 아키히토 일왕이었다. 

한일 월드컵 공동 개최를 1년 앞둔 2001년 12월 23일 아키히토 일왕은 68세 생일을 맞아 왕실에서 한 기자회견에서 한국에 대한 생각을 묻는 질문에 “나 자신으로서는 간무 천황(일본 고대문화 전성기 헤이안 시대를 연 왕)의 생모(生母)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에 기록돼 있어 한국과의 인연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었다. 

이어 “두 나라는 한층 더 서로의 과거를 정확하게 알기 위해 노력하고, 개개인으로서는 서로의 입장을 이해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일왕의 이 말은 같은 날 아사히신문 석간 1면과 4면에 대서특필되었다. 그로부터 14년이 흐른 2015년 한일 수교 50주년이라는 뜻 깊은 해를 맞았지만 한일관계는 그때보다 오히려 후퇴했다는 느낌이다. 

옛 조상들의 흔적을 살피며 과거 고대로부터 이어진 두 나라의 인연을 되살려 새로운 이웃으로 만드는 것이야말로 이제 우리 두 나라 후손들에게 남겨진 몫이다. 

:: 칠지도 ::

쇠로 된 긴 몸체에 좌우 여섯 가지가 엇갈려 배열돼 몸체와 함께 모두 7개의 가지를 가진 칼(刀)이라는 뜻. 몸체에 백제왕이 왜왕에게 전한 외교 문서가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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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교 50년, 교류 2000년 한일, 새로운 이웃을 향해] 
한일 중간지점의 쓰시마섬, 부산-日가라쓰서 모두 보여… 항해 기준점-피신처 역할


지금으로부터 1만여 년 전 지구의 마지막 빙하기가 끝날 때쯤 중국 대만 한반도와 일본 열도는 하나의 땅덩어리였다. 빙하기가 끝나 수천 년 동안 해수면이 상승하면서 낮은 지대에 바닷물이 차오르기 시작하면서 서해가 생겨나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땅은 반도가 됐고, 대한해협이 생겨나 동해가 태평양과 연결되면서 일본은 섬나라가 됐다. 

일본이 떨어져 나간 뒤에도 한반도와 일본의 교류는 이어졌다. 한반도와 가장 가까운 규슈는 일본 열도와 한반도를 이어주는 통로였다. 규슈 가라쓰 시에 가면 우리 옛 조상들이 뗏목을 타고 거친 바다에 나가 위험한 항해 끝에 일본에 도착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오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다름 아닌 쓰시마(對馬) 섬 때문이다. 

경남 함안 지역에 존재했던 아라국(561년 멸망) 후예들의 일본 이주를 연구한 정효운 동의대 교수에 따르면 쓰시마섬은 양국 해상 교류를 쉽게 만드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부산에서 멀리 쓰시마섬이 보이듯 가라쓰에서도 쓰시마섬이 보인다. 이는 일본으로 배를 타고 간 우리 조상들에게 정처 없는 항해가 아닌 정확한 목적지를 보면서 가는 항해였다는 것을 뜻한다.

정 교수는 “전라도 영산강이나 섬진강 하구 등의 한반도 서남해안에서 출발하여 남해안의 섬들을 거점으로 삼아 쓰시마섬까지 가는 해로가 백제가 이용한 주요 해상교통로였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바다의 흐름인 해류(海流)도 교류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요즘도 가라쓰 해변을 거닐다보면 한국 상표가 붙은 생수 병이나 라면 봉지 같은 한국에서 떠내려온 각종 쓰레기를 볼 수 있다. 가라쓰 시 이데 겐조(井手憲三) 국제교류과장은 “그 옛날 한반도인들도 이 해류를 타고 일본 섬에 이르렀을 것”이라고 했다.

가야 고구려 백제에 살았던 우리 조상들의 일부는 자신들의 국가가 멸망하자 때로는 좌절하고 때로는 부흥의 꿈을 안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멀리 보이는 일본 땅은 그들에게 또 다른 희망이었다. 그리고 한반도와 매우 비슷한 이곳 규슈에서 일본인들과 함께 새로운 나라 건설에 힘을 보탰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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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교 50년, 교류 2000년 한일, 새로운 이웃을 향해]

일본 도쿄에서 차로 한 시간가량 떨어진 히다카 시의 ‘고마 신사’에는 고구려 조상들을 모셨다는 것을 명확하게 밝힌 ‘고려왕묘’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히다카=허문명 국제부장 angelhuh@donga.com

일본 도쿄에서 서북쪽으로 70km 떨어진 사이타마(埼玉) 현 히다카(日高) 시에 가면 고려천, 고려산, 고려치(峙·고개), 고려역, 고려소학교 등 도처에 ‘고려(高麗·일본어로 고마)’로 시작하는 지명이나 시설이 있다. 히다카 시 역시 통폐합 전 ‘고려군’으로 불렸다. 여기서 고려란 ‘고구려’를 뜻한다. 지금으로부터 1300여 년 전인 668년 나당연합군의 공격으로 평양성이 무너지면서 나라를 잃게 된 고구려 유민들이 대거 건너와 뿌리를 내린 곳이기 때문이다. 유민 1대(代)를 시작으로 장자 상속으로 무려 60대를 이어 온 가족이 있으니 ‘고구려 신사’(이하 고마 신사)를 지키고 있는 궁사(宮司·일본 신사를 운영하는 책임자) 고마 후미야스 씨(49·사진)다. 

5월 신사에서 만난 고마 궁사는 피는 속일 수 없는지 언뜻 봐도 선 굵은 외모가 전형적인 일본인보다는 한국인과 가깝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임진왜란 때 3형제가 뿔뿔이 흩어져 두 명은 전사하고 장손만 숨어 살아남아 겨우 대를 이을 수 있었다. 32대 할아버지는 ‘절대 전쟁에 나가거나 나랏일에 끼어들지 말라’라는 유언을 남겼고 이후 자손들은 종교인으로 이곳 신사를 지키는 것을 평생의 과업으로 알고 살았다.”

한국의 생활한복과 비슷한 궁사 유니폼에 왼쪽 손에는 최첨단 명품 시계를 찬 그의 모습에서 과거와 현재를 잇는 시간의 연속성이 느껴졌다. “한일 관계를 언뜻 임진왜란이나 일제강점기만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 뿌리가 고대로부터 깊다는 것은 우리 집안이 증거이다. 한일 근대사에는 전쟁도 있었고 지배와 피지배도 있었지만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한일 교류 2000년 역사에는 좋은 시절이 더 많았다.”

그에게선 한국인의 후손으로서 일본에서 겪어 온 차별이나 소외라는 말 대신 “나의 뿌리는 한국이지만 내가 크고 자란 곳은 일본이다. 내 조국은 둘”이라는 말이 나왔다. “옛 조상들처럼 한국과 일본이 다시 새로운 이웃으로서의 인연을 이어 갔으면 좋겠다”는 말도 했다. 

22일 한일 수교 50주년이 되는 역사적인 날을 기념해 한일 관계를 교류의 역사로 보는 ‘한일, 새로운 이웃을 향해’ 시리즈를 기획했다. “동아시아의 미래는 한일 두 나라가 고대로부터 쌓았던 인연을 어떻게 성공적으로 재발견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미국의 석학 재러드 다이아몬드(‘총, 균, 쇠’의 저자)의 말을 새기며 연재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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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교 50년, 교류 2000년 한일, 새로운 이웃을 향해]<1>日에 벼농사를 가르치다



한국과 더불어 수천 년 동안 자포니카(단립종) 쌀을 주식으로 먹고 살아 온 나라는 일본이 유일하다. 둥근 모양의 자포니카 쌀은 밥을 지으면 차진 것이 특징으로 동남아에서 생산되는 길고 점성이 없는 인디카(장립종) 쌀과 밥맛이 확연히 다르다. 

일본의 논농사는 2500∼2600년 전 한반도에서 전해진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벼농사 유적이 있는 곳은 규슈(九州) 사가(佐賀) 현 가라쓰(唐津) 시이다. 가라쓰 시는 규슈의 최대 도시 후쿠오카(福岡)에서 서남쪽으로 약 40km 떨어져 있다. 인구는 약 13만 명. 후쿠오카 공항에서 내려 JR 지쿠히(筑肥)선을 타고 환승 없이 1시간 만에 닿을 수 있었다.

가라쓰는 부산까지의 거리가 약 180km로 일본에서 한국과 가장 가까운 도시다. 가라쓰의 ‘가라’는 일본말로 ‘외국’이란 뜻으로 본래는 한국을 의미한다는 게 일본 학계의 정설이다. 현재 가라쓰를 표기하는 한자 ‘唐津’은 옛날에는 ‘한진(韓津)’이라고 쓰고 가라쓰라고 불렀는데, 이후 당나라와의 교역이 늘어나면서 ‘韓’ 자만 ‘唐’으로 바뀌었다고 일본 고서들은 기록하고 있다.

이런 지리적 요인 때문에 가라쓰는 오래전부터 한반도와의 교류가 활발했다. 훗날 조선 도자기가 처음 전해진 곳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임진왜란을 일으키기 전 병력을 집결시켰던 히젠 나고야 성도 이곳에 있다. 이런 지역에서 일본 최초의 벼농사 유적이 발견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유적이 발견된 가라쓰 나바타케에는 ‘마쓰로칸(末盧館)’이라는 이름의 벼농사 박물관이 있다. 기원전 가라쓰 지역에 존재했다는 마쓰로(末盧)란 원시 국가의 이름을 따온 것이다.

마쓰로칸은 가라쓰 시내를 울타리처럼 둘러싸고 있는 산자락 안에 있었다. 가라쓰 역에서 걸어서 15분밖에 걸리지 않는다. 일본식 주택들이 늘어서 있는 동네에 높은 통나무 울타리로 가려져 있어 대문에 ‘마쓰로칸’이란 표지판이 없었다면 그냥 지나치기 쉬웠다. 

현장에 와 보면 왜 옛날 사람들이 이곳에 터를 잡았는지 고개가 끄덕여진다. 뒤에는 울창한 산이 있고, 1km 정도 평지를 사이에 두고 바다가 있다. 수렵과 채집, 어업이 가능한 데다 산골짜기로 흘러내려오는 물을 이용해 논농사를 짓기엔 최적의 장소로 보였다.

다지마 류타(田島龍太) 마쓰로칸 관장의 안내를 받으며 박물관을 둘러보았다. 일요일인데도 찾아오는 관람객은 한 명도 없었다. 

마쓰로칸은 땅에 기둥을 박고 그 위에 집을 짓는 고상식(高床式) 형태의 특이한 2층 목조 건물이다. 고상식 가옥은 맹수나 독충을 피하고 장마철 습기를 최소화할 수 있는 장점 때문에 신석기시대 동굴을 벗어난 원시인들의 대표적 주거 형태이다. 나바타케 유적에서도 고상식 가옥 흔적으로 보이는 나무 말뚝이 2개 발견됐다.

박물관에 들어서니 입구에 이 일대에서 발굴된 검은색 탄화미(炭化米)를 확대경으로 볼 수 있게 전시해 놓았다. 나바타케 유적에서 발견된 탄화미는 기원전 600년경 재배된 것으로 분석됐다.

주요 전시물은 2층에 있었다. 2층 중앙에는 조몬시대(기원전 1만3000년∼기원전 300년) 말기 이 지역에 존재했던 마을을 상상으로 복원해 만든 큰 모형이 놓여 있었다. 당시 사람들이 벼농사와 수렵, 축산업, 어업을 어떤 방식으로 진행했는지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이때 이미 제사를 지내는 풍습도 있었다.

마쓰로칸에 전시된 유물들을 보면 한반도 고유 문명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발굴된 독 항아리 사발 굽접시 등은 토기의 주둥이 부분에 검은 반점이 있거나 소뿔형 손잡이로 마무리한 점이 눈에 띈다. 이는 한반도와 규슈 지역을 중심으로 공통적으로 발굴되는 유물의 특징이다.

홈자귀라고 불리는 돌도끼나 손잡이 부분을 깊게 판 마제석검, 버들잎 모양의 석촉 등 한반도에서 고유하게 발굴되는 석기들도 이곳에서 나왔다.

다지마 관장은 석검 하나를 가리키며 “이것을 만든 재질의 돌은 일본에 없으니 한반도에서 넘어온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마쓰로칸을 둘러보면 일본의 농경문화는 한반도에서 농경문화를 향유하던 주민들이 직접 일본 열도로 이주함으로써 개화한 문화라는 확신이 굳어진다.

박물관 안내문에도 ‘나바타케는 2500∼2600년 전 조선 반도에서 건너온 사람들에 의해 벼농사가 전해진 곳으로, 이는 일본 벼 재배의 시작으로 알려졌다’라고 적혀 있다.

눈에 띄는 것은 이곳 유적 발굴 과정에 다양한 석기와 함께 세형단검, 청동거울 등 청동기문화 유적도 나온 것이다. 벼농사와 청동기의 도입은 수렵과 채집에 의존하던 일본의 신석기시대 조몬인들을 농경문화에 기반을 둔 야요이(彌生) 시대로 이끌었다. 

동국대 윤명철 교수는 “한 나라가 다른 나라에 벼농사를 전했다는 것은 단순한 식량 문제의 해결을 넘어서 농업 기술력은 물론이고 식량을 담는 그릇 문화(토기)에서부터 무기의 전파까지 이뤄지는 과정으로 원시인들을 촌락에 이어 국가로까지 만드는 결정적 계기”라며 “한반도가 일본에 벼농사를 전한 것은 명실상부하게 일본인들이 공동체를 만들게 하는 데 매우 중요한 전수”라고 했다. 

그의 말은 나바타케 유적에서 산 하나를 넘어 약 40km 떨어진 일본 청동기 문화 유적 요시노가리(吉野ヶ里)에서 확인할 수 있다. (2회는 요시노가리 유적편으로 이어집니다.)

:: 탄화미(炭化米) ::

불에 타거나 지층 안에서 자연 탄화된 쌀을 말한다.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을 통해 분석한 재배 연도는 벼농사의 기원과 전래를 밝혀내는 중요한 기초 자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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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교 50년, 교류 2000년 한일, 새로운 이웃을 향해]<2>청동과 토기를 전하다

2300여 년 전 우리 고조선과 삼한시대 조상들이 집단이동하면서 전해준 벼농사가 본격화되자 일본 역사는 수렵과 채집이 생산 기반이었던 조몬(繩文)시대(기원전 1만 년∼기원전 5세기)와는 질적으로 다른 야요이(彌生) 시대(기원전 5세기∼기원후 3세기)로 넘어간다. 

미국의 문명사학자 재러드 다이아몬드는 세계적 베스트셀러이자 퓰리처상 수상작인 ‘총, 균, 쇠’의 개정 증보판(2003년)을 내면서 야요이 시대에 선진 농업기술을 갖고 이주한 한국인들이 오늘날 일본인의 조상이라고 주장해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이론은 단순한 주장이 아니라 DNA 분석이라는 과학적 실험 결과에 따른 것이었다. 

즉, 일본 고대인인 조몬인과 야요이인의 두개골 유전자를 채취해 현대 일본인과 일본에 살던 원주민족 아이누족과 비교 분석해보니 조몬인이 현대 일본인이 아니라 아이누족을 닮았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현대 일본인의 유전자는 야요이인 것을 닮았다. 더 충격적이었던 것은 이 유전자가 한국인과도 닮았다는 것.

다이아몬드 교수는 유전자 분석 외에 고고학 분자생물학 인류학 언어학 등의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한 논문 말미에 “과거 현재의 여러 요소를 종합적으로 고려해볼 때 한국과 일본은 성장기를 함께 보낸 ‘쌍둥이 국가’와도 같았다”며 “이런 사실은 이후 역사를 거듭하며 불편한 관계를 맺었던 양국을 생각한다면 아이러니한 사실이 아닐 수 없다”고 말했다.

가혹한 식민 지배와 아직도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일본 정치인들의 후안무치를 생각한다면 ‘쌍둥이 국가’라는 말에 불편해하는 한국 독자들이 있을 것이다. 일본인도 자신들이 조몬인으로부터 진화해 최소 1만2000년간 독자성을 지켜왔다는 학설을 선호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한반도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조상이라는 다이아몬드 교수의 주장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고대 한국과 일본의 교류사 흔적이 짙게 배어 있는 현장을 돌다보면 다이아몬드 교수의 주장이 무리가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 대표적인 유적지를 우리는 한반도와 가까운 일본 규슈 열도 내에 위치한 사가(佐賀) 현에서 만나게 된다. 


○ “한일은 쌍둥이 국가”

시치다 다다아키 혼마루역사관 관장이 요시노가리 유적을 둘러싼 해자와 적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나무를 뾰족하게 깎아 만든 울타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요시노가리=유덕영 기자 firedy@donga.com

한반도와의 직선거리가 200km 정도밖에 되지 않아 과거부터 현재까지 매우 긴밀한 교류가 이뤄진 한일 교류 현장인 사가 현 일대에 위치한 간자키(神崎) 군 간자키 정과 미타가와(三田川) 초, 히가시세후리(東背振) 촌 등 3개 마을 87만 m²(약 26만3000평)에는 요시노가리(吉野ヶ里) 역사공원이 넓게 펼쳐져 있다. 이곳은 야요이 시대 말기 생활상이 정밀하게 복원된 역사적 장소이다. 

3월 후쿠오카역에서 한 시간가량 기차를 타고 요시노가리공원역에 도착했다. 역 밖으로 나서니 ‘요시노가리’가 한국어로 ‘좋은 들판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란 것이 새삼 실감났다. 멀리 보이는 산들을 배경으로 풍요롭고 넓은 들판에 청명한 날씨는 일본이 아니라 호남평야 같은 포근함과 친근감을 주었다. 배를 타고 건너온 낯선 땅이었지만 전혀 낯설지 않은 이곳에 도착한 우리 조상들이 정착하기에는 최상의 조건이었을 것 같았다.

실제로 해양교류학자인 윤명철 동국대 교수는 “어제 동아일보가 소개한 가라쓰를 굳이 인천으로 비교한다면 요시노가리는 서울이라 할 수 있다. 배를 타고 인천에 도착한 이들이 정주하기 좋은 땅을 찾아 육지로 들어와 정착한 곳이 바로 요시노가리이기 때문”이라며 “이곳에서 일본 고대 문화의 최전성기를 보여주는 야요이 시대 유물이 대거 쏟아져 나온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했다.

기원전 2세기경부터 한반도인들이 이주해 형성된 야요이 시대 대표적 집단 취락지인 요시노가리 전경. 현재 3세기경의 모습으로 복원돼 역사공원으로 지정됐다. 사가현 제공

역에서 내려 10여 분 걸어가면 ‘요시노가리 역사공원’이라는 간판이 나온다. 

문 안으로 들어서자 성 밖을 둘러 판 도랑인 해자(垓子)가 있었고 해자 바깥쪽으로는 끝이 뾰족한 굵은 나무 말뚝으로 만든 울타리가 있었다. 


○ 한국인에게도 친근한 옹관묘

요시노가리 유적에서 출토된 한국식 동검. 당시 요시노가리의 지배층은 한국식 동검과 유리대롱옥 등으로 위세를 드러낸 것으로 추정된다. 시치다 다다아키 씨 제공

이날 취재는 야요이 시대 전문가이며 1986년부터 22년간 요시노가리 유적 발굴 책임자로 일했던 시치다 다다아키(七田忠昭·63) 사가 성 혼마루(本丸)역사관 관장과 동행했다. 시치다 관장은 나무 울타리를 가리키며 “논농사를 시작하면서 생긴 잉여 생산물을 지키고 식량 쟁탈이 일어나자 외부의 적을 막기 위해 만든 방어물”이라고 했다. 

공원을 통과하면 ‘내곽(안쪽 테두리)’이라는 이름의 울타리가 처진 특별한 구역과 만난다. 북쪽과 남쪽에 하나씩 있어 북내곽, 남내곽이라 불린다. 북내곽 안에는 건물 여러 채가 복원되어 있었는데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이 ‘주제전(主祭殿)’이고 나머지는 제당 망루 등이었다. 2층에는 지배층이 회의하는 모습을, 3층에는 제사장이 제의(祭儀)를 진행하는 모습을 모형으로 꾸며 놓고 있었다. 

시치다 관장은 “북내곽은 당시 지배층이 모여 중요한 일을 결정하는 회의를 하거나 제사를 지내던 곳이었고 남내곽은 거주 공간이었다”고 소개했다. 

북내곽을 나와 북서쪽으로 조금 걸어가니 대형 항아리가 두 줄로 묻혀 있는 특이한 곳이 나왔다. 이곳에서 일하는 한국인 안내원 황성민 씨는 “한국인들에게도 익숙한 옹관묘열(甕棺墓列)”이라고 했다. 일부 항아리 안에는 뼛조각이 그대로 있는 것도 있었다. 

옹관묘는 초벌구이한 대형 토기에 시신을 구부려 넣고 흙 속에 묻는 매장 방식으로 우리나라 마한 지역에서 유행하던 장례 방식으로 알려져 있다. 학자들은 마을 공동체 안에 이와 같은 매장문화가 있었다는 것은 많은 의미를 준다고 했다. 

1990년대 초 옹관묘 발굴 당시 현장을 볼 기회가 있었다는 윤명철 교수는 “옹관묘는 지금으로 따지면 하이테크놀로지 기술이 응집된 초호화판 무덤이었다. 그만큼 지배층의 힘이 강했다는 것”이라며 “먹고 사는 공간에 묘지가 함께 있다는 것은 공동체가 부족 수준이 아니라 초기 국가 형태로 본격적으로 진입했음을 의미한다”고 해석했다. 


○ 한국은 문명 전수자, 일본은 매개자

공원 안 유물 전시실로 발길을 옮겼다. 논농사의 발전이 필연적으로 가져온 농경사회 변화를 상징하는 다양한 유물들이 있었다. 

보통 벼를 재배하면 생활시스템이나 경제활동에 일대 변화가 일어난다. 종자 선택, 모 키우기, 물 대기, 피 뽑기, 벌레 제거하기, 비료 주기, 수확하기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을 효율적으로 통제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 가래나 괭이 같은 목제 농기구가 필요해지고 이를 만들기 위한 돌도끼 돌자귀 대팻날 같은 도구와 돌칼이나 돌낫 등 수확용 도구도 필요해진다. 요시노가리 유물전시실에도 이런 다양한 유물이 있었다.

시치다 관장은 이런 유물들이 한반도의 영향을 깊게 받았다고 했다. “야요이 시대 유물들에서는 수렵 채집 시대와는 다르게 저장용 단지, 취사용 항아리, 음식용 굽다리 접시 등이 많이 나왔는데 한반도에서 발견된 것과 비슷해 한반도에서 전파된 농경문화 요소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청동기 유물에서도 한반도계 토기가 출토됐는데 당시 청동기 주조 기술은 아무나 가질 수 없는 고급 기술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전부터 청동기 주조 기술을 가진 한반도인이 요시노가리에 정착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이 같은 문명 교류에 대해 서울시립대 정재정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전했다는 것만 강조하며 우위를 내세울 것이 아니라 한국과 일본이 각자의 문명 전환기에 상대방에게 매개자 또는 촉매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즉, 일본의 선사 고대 시대에는 한국이 중국 문명을 전한 전수자(傳授者)였고, 한국 근현대 문명 형성기에는 일본이 서구 문명의 매개자(媒介者) 역할을 했다. 고대 문명 교류도 이런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 야요이(彌生) 시대 ::

본격적인 벼농사로 농경 및 정착 생활이 시작되면서 ‘일본 문화의 원점’이 시작되는 시대이다. ‘야요이’라는 명칭은 1884년 이 시대 토기(사진)가 처음 발견된 도쿄 외곽 지명에서 유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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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교 50년, 교류 2000년 한일, 새로운 이웃을 향해]<3>왕인이 일본으로 간 사연

한옥 기와에 ‘백제문’… 곳곳에 한국의 숨결 오사카 시에서 동북쪽으로 30km 정도 떨어진 히라카타 시에 자리한 왕인묘 입구. 출입문 격인 ‘백제문’은 2006년 10월 한일 양국의 문화친선협회가 건립한 것이다. 아래쪽 사진은 백제문을 통과한 뒤 몇 발짝 떨어진 곳에 자리한 왕인묘. 가운데 비석에 ‘박사 왕인지묘’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히라카타=이유종 기자 pen@donga.com

《 백제인 왕인(王仁)은 4, 5세기 정도에 일본으로 건너가 고대 일본에 백제 문화, 나아가 선진적 한반도 문화를 전한 대표적인 지식인이다. 그는 백제에서도 박사(博士) 칭호를 받은 당대 석학으로서 일본으로 건너가 문자를 만들어 주고 학문을 가르치고 도자기, 기와 기술까지 전해줬다. 일본 고대 역사서들에 기록된 그에 대한 이야기는 이렇다.

‘15대 천황인 오진(應神) 천황이 백제국에 “만약 현인(賢人)이 있다면 보내 달라”고 청했다. 백제왕은 왕인을 추천했다. 일왕은 백제에 사신을 보내 왕인을 초청해 왔다. 왕인은 논어 10권과 천자문 1권을 갖고 일본으로 건너왔다. 16년 봄 2월의 일이다.…태자는 그를 스승으로 모시고 전적(典籍·여러 사상 등이 적힌 책)을 배웠는데 (왕인은) 통달하지 못한 것이 없었다.’<일본 역사서 고사기(古事記·712년), 일본서기(日本書紀·720년), 속일본기(續日本紀· 797년) 종합> 

이러한 일본 고대서의 기록들은 왕인이 당시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었고 일본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덧붙여 고대 왜(倭)와 백제 왕실이 당대 석학을 청하고 또 선뜻 보내줬다는 것을 보면 두 나라가 매우 가까운 관계였으며 또 백제가 왜에 문명 전달자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일본 전역에 흩어진 왕인 박사의 흔적


왕인 박사의 흔적은 일본 전역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1699년 건립된 사가(佐賀) 현 간자키(神埼) 시에는 왕인신사(王仁神社)와 왕인천만궁(王仁天滿宮)이 있는데 ‘천만궁’은 ‘학문의 신’을 모시는 신사라는 뜻이다. 교토 야사카신사(八坂神社) 경내에도 왕인신사가 있으며 오사카 마쓰하라(松原) 시 왕인성당지(王仁聖堂址), 사카이(堺) 시의 다카시노신사(高石神社) 등도 왕인을 신으로 추앙하고 있다. 

일본인들에게 마음의 고향이라 불리는 도쿄 우에노 공원에서도 왕인의 흔적을 만날 수 있다. 수목 울창한 경내에 각각 높이 3m, 1.5m에 달하는 두 개의 대형 대리석 비(碑)가 있는데 비석 앞뒷면에 박사의 위업이 앞뒤로 빼곡히 적혀 있다. 뭐니 뭐니 해도 박사의 흔적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은 오사카(大阪) 히라카타(枚方) 시에 있는 박사의 묘이다.

올 4월 9일 관광책자에 적힌 대로 시내에서 동북쪽으로 약 30km 정도 떨어진 히라카타 시 나가오(長尾) 역에 내렸다. 작은 간이 역사가 말해주듯 일본의 작고 조용한 전형적인 시골 마을이었다. 하지만 그 옛날에는 이 일대가 일본 고대국가 형성의 요람으로서 군사 외교적으로 매우 중요했던 가와치(河內) 국의 영역이었다고 한다. 

왕인묘가 역에서 멀지 않다고 책자에 적혀 있어 금방 찾으리라 생각했지만 오산이었다. 어디에서도 표지판을 찾을 수 없었다. 길 가던 일본 청년을 붙잡고 ‘왕인묘’의 일본어 발음인 ‘와니쓰카(王仁塚)’라고 물으며 종이에 한자로 ‘왕인(王仁)’이라는 단어를 적어 보여 주었다. 청년은 대번에 알고 있었다. 손짓 발짓으로 그가 가르쳐 준 길을 따라 걸으며 일본 정부가 과거의 많은 기록들을 왜곡하고 은폐하려 노력하고 있는 와중에도 다행히 아직도 일본인들이 왕인 박사를 잊지 않고 있는 것 같아 으쓱했다. 

10분 정도 걸으니 기와를 얹고 ‘백제문’이라는 현판을 단 한국식 전통 문이 나왔고 그 앞에 사람 키만 한 커다란 돌에 ‘오사카부 지정 사적 전 왕인묘’라는 글이 한자로 새겨진 조형물이 보였다. 드디어 왕인 박사 묘에 온 것이다.

묘역에는 한국인들의 흔적이 곳곳에 보였다. 백제문 왼쪽에 설치된 철제 표지판에는 ‘이 백제문은 2006년 10월 한일 양국의 문화친선협회가 건립했다’는 내용과 ‘왕인 박사는 왕실의 사부로 학문과 경사(經史)를 전수하시어 일본 문화의 원류인 아스카 문화의 시조라고 전해지고 있다’는 소개 글이 적혀 있었다. 문 안으로 들어서니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1999년 9월 5일 심은 기념식수도 보였다. 2008년 2월 29일 전남 영암군수의 무궁화 기념식수도 있었다. 정자도 하나 세워져 있었는데 왕인묘를 사적으로 지정한 60주년을 맞아 축하한다는 내용의 김대중 전 대통령의 글(1998년 5월 9일)이 적힌 액자가 보였다.

눈을 돌려 앞을 보니 ‘박사 왕인지묘’라고 해서체로 쓰인 비석이 있었다. 높이는 1m 정도 됐고 앞에는 누가 갖다놓았는지 생화 몇 송이도 있었다. 묘비 앞에 서니 만감이 교차했다. 천년도 더 전에 이 낯설고 물선 땅에 와 일본인들에게 문자를 가르치고 학문을 전해준 왕인 박사의 혼(魂)이 시공간을 훌쩍 뛰어넘어 전해지는 듯 숙연해졌다. 짧은 참배를 하고 밖으로 나와 10∼15분 정도 걸어가니 테니스장에 수영장까지 갖춘 꽤 큰 공원이 나왔는데 이름이 ‘왕인공원’이었다. 

영암군에 세운 왕인 동상 왕인 박사의 출생지로 알려진 전남 영암군 군서면에 세워진 동상. 영암군에서 세운 것이. 삼국사기 삼국유사에도 등장하지 않는 왕인 박사의 존재는 조선시대 일본을 다녀온 사신들을 통해 비로소 알려졌다. 동아일보DB

○ 왕인박사의 숨결을 그대로 간직한 묘역

백제인 왕인, 그는 일본에서 과연 어떤 일을 했기에 이렇게 천년의 세월을 훌쩍 넘어서도 존경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일까. 고대 일본 역사서들은 왕인 박사가 일본에 문자를 만들어 준, 이를테면 한국의 ‘세종대왕’에 비견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751년 편찬된 일본 최초의 한시집 가이후소(懷風藻)에서는 ‘왕인은 왜어(倭語)의 특질을 훼손하지 않고서 한자를 이용해 왜어를 표현하는 방법을 개발했다’고 표현해 그가 일본 문자 가나(假名)를 창안했음을 명시하고 있다. 또 ‘고사기’와 ‘일본서기’에는 ‘서수(書首)와 문수(文首)의 시조’라고 적고 있다. 즉, ‘책(書)과 글(文)을 다루는 전문직의 우두머리(首)’라는 뜻이다. 

왕인 박사는 또 고대 일본 귀족들이 짓거나 암송했던 전통 정형시 와카(和歌)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905년 발간된 노래집 ‘고킨와카슈(古今和歌集)’는 ‘난파진에는, 피는구나 이 꽃이, 겨울잠 자고. 지금은 봄이라고, 피는구나 이 꽃이’라는 내용의 ‘난파진가(難波津歌)’를 소개하는 대목에서 ‘왕인 박사가 지은 최초의 와카’라며 박사를 ‘와카의 아버지’라고 적고 있다. ‘일본서기’는 또 박사가 오진 일왕의 4남인 닌토쿠(仁德) 일왕을 ‘난파(難波) 일왕’이라고 부르며 즉위할 것을 권고하며 난파진가를 지었다고도 했다. 이 기록들로 미뤄 볼 때 박사가 일왕에게 직접 조언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왕인 박사의 위업은 당대에만 그치지 않았다. 그의 후손들이 대대로 일본 조정에서 문필과 외교, 군사 등 각 분야에서 활약한 것으로 전해진다. 불교계에도 진출해서 큰스님이 된 사람도 많다. 특히 설법과 사회 사업을 병행한 생활불교를 펴서 ‘민중의 구제자’로 일본인들이 흠모하는 대상인 교키(行基·668∼749) 스님도 왕인 박사의 후손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왕인의 가문 전체가 일본 문화 확립에 크게 기여한 것이다. 

오사카에서 만난 오사카오타니대 다케타니 도시오(竹谷俊夫) 역사문화학과 교수는 “한류(韓流), 한류 하지만 사실 고대 일본에도 한류가 불었다고 생각하면 된다”며 왕인 박사야말로 한류의 1대 전도사였던 셈”이라고 말했다. 


:: 도래인(渡來人) :: 

일본 말로는 ‘도라이진’이라 읽으며 ‘물을 건너온 사람’이란 뜻이다.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온 한국인을 일컫는 말이다. 도래인의 유형은 왕인 박사처럼 일본에 문명을 전해주러 갔다가 눌러앉은 사람과 고구려나 백제처럼 나라가 망해 삶의 기반을 잃자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떠나 일본으로 건너갔던 사람, 두 유형으로 나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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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교 50년, 교류 2000년 한일, 새로운 이웃을 향해]<4>오사카의 백제 도래인들

① 일본 오사카 시 이쿠노 구 한인촌 입구에 위치한 미유키모리 신사. 신사 관계자는 “한일 관계, 북핵 문제 등 남북한 관련 뉴스를 전할 때면 ‘한인촌’의 상징인 이곳을 배경으로 사용한다”고 했다. ② 이쿠노 구와 나란히 붙은 히가시스미요시 구의 남백제 소학교(미나미구다라 소학교). 오사카 시에는 백제역, 백제시계점, 백제대교 등 다양한 백제 관련 지명이 존재한다. 미유키모리 신사 제공

한반도의 주도권을 놓고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가 본격적인 쟁탈전을 벌이던 4세기 무렵부터 고구려가 멸망한 668년까지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는 아직 국호(일본)도 없이 초기 국가 형성 단계로 들어간 왜(倭)와 긴밀하게 교류한다. 우리 조상들이 서로 피 튀기는 각축전을 벌이는 와중에 ‘왜’와는 각자 긴밀한 정치 경제적 교류를 했다는 사실은 일반인들에게 생소하다. 뒤집어 말하면 그만큼 한반도 도래인들이 왜에 끼친 영향이 크다는 이야기이다.

3국 중 가장 활발한 교류를 한 나라는 백제였다. 지리적으로 가까운 데다 항로상으로도 제일 유리했다. 문화적으로도 수준이 높았던 백제는 점차 기울어가는 국가적 운명 앞에 왜에 문명과 기술을 전해주고 군사적 지원을 받으며 상생(相生)을 도모했다.

일본에서 백제의 흔적이 두드러진 곳으로 일본 제2의 도시이자 항구 도시인 오사카(大阪)가 꼽힌다. 이는 지리적 위치 때문이다. 

일본 열도를 이루는 4개의 큰 섬 중에서 한반도와 가장 가까운 규슈(九州)에서 세토나이카이(瀨戶內海)라는 내해를 거치면 열도에서 가장 큰 섬인 혼슈(本州)의 오사카 항에 닿게 된다. 오사카를 초입으로 삼는 혼슈 간사이(關西) 일대에는 이코마(生駒) 산을 경계로 2개의 큰 평야(오사카·나라 평야)가 자리 잡고 있다. 생활환경이 우리와 비슷하고 물산도 풍부해 백제인들이 생활의 터전으로 정착하기에 안성맞춤인 땅이었다. 


○ 오사카 곳곳에서 만난 백제의 흔적들 

오사카의 최대 중심지이자 한국인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다는 난바(難波). 이곳에서 차로 20분 거리에 위치한 이쿠노(生野) 구(區)는 오사카 내 최대 한인촌이다. 구민 4분의 1 이상이 한국인이다 보니 구청 홈페이지에 한글 버전이 따로 있을 정도이다. 이쿠노 구에는 백제 관련 유래가 전해 내려오는 신사는 물론이고 ‘백제’의 일본 음독인 ‘구다라’라는 명칭을 그대로 쓰는 지명이나 시설물이 많다. 미유키모리(御幸森) 신사만 해도 백제인들과 긴밀한 교류를 맺어온 왕인(王仁) 박사의 제자 닌토쿠(仁德) 천황을 모시는 신사이다. 

이쿠노 구 옆 히가시스미요시(東住吉) 구도 한국과의 인연이 남다른 곳이다. 백제역(구다라 에키), 백제강(구다라 가와), 백제 시계점(구다라 도케이텐) 등 다양한 백제 관련 지명이 있었다. 이 중에 ‘미나미구다라(南百濟) 소학교’가 있다.

어찌된 연유로 일본 초등학교가 ‘남백제’란 이름을 갖게 되었는지 그 연유가 궁금해 학교를 찾아갔다. 학교는 한적한 주택가에 위치하고 있었다. “백제의 역사를 알고 싶다”는 기자의 청에 선뜻 응해준 오가 마사노리 교장(56)과 나루세 모리카즈 교감(51)이 직접 마중을 나왔다. 두 사람의 안내를 받아 교장실로 들어섰다. 

작고 소박하게 꾸며진 교장실에 들어서자 양쪽 벽면을 가득 채운 역대 이사장과 교장들의 얼굴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1874년에 개교해 현재 141년에 이르는 학교의 긴 역사를 대변하는 사진이었다. 오가 교장에 따르면 학교는 처음에 ‘스미요시 구 제4번소학교’라는 이름으로 출발했다가 ‘유타카 소학교’로 바뀌었고, 1889년 이쿠노 구의 행정 지명이 개편되면서 ‘미나미구다라 소학교’로 최종 이름이 확정됐다. 이 초등학교는 1950년 전교생이 2400명일 정도로 컸지만 저출산 탓에 취학 아동이 대거 줄면서 지금은 규모가 작아졌다.


○ 미나미구다라 소학교에 얽힌 사연


나루세 교감은 “오사카 지방에 백제 도래인이 대거 몰리자 서기 646년 이 일대는 백제군(群)이라는 정식 행정구역으로 지정됐다”며 “이후 서기 765년 일본 왕실이 펴낸 ‘정창원문서(正倉院文書)’나 서기 791년에 일본 왕실이 펴낸 역사책 ‘속일본기(續日本紀)’에도 ‘백제군(百濟郡·구다라고리)’이라는 명칭이 보인다”고 전했다. 실제로 1098년 일본이 제작한 오사카 고지도 ‘난바팔랑화도(難波八浪華圖)’에도 오사카를 ‘백제국’이란 지명으로 표기하고 있다.

연민수 동북아역사재단 역사연구실장은 “일본서기 등 일본 고대 문헌에 따르면 5세기부터 백제 도래인들의 오사카로의 진출이 대거 본격화됐는데 결정적 계기는 660년 백제 패망이었다. 나라를 잃은 유민들은 이미 일찍이 왜에 정착해 있던 가족과 지인들을 찾아 집단으로 망명 이주했다”며 “왕인 박사를 비롯해 5세기 이후 일본에 건너온 백제 도래인들은 다양한 유·무형의 선진 문물을 일본에 전파했다”고 전했다. 

당시 일본 왕실도 오사카 히가시스미요시 구와 이쿠노 구 일대에 도래인들이 거주할 수 있도록 땅을 주고 생활기반 시설을 만들어 주는 등 배려했다고 한다.

오사카로 온 백제 도래인들의 활약은 눈부셨다. 일본 지배층들의 성씨 1182개의 내력을 기록한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815년)’에는 “4세기 대규모 치수공사, 제방공사 등은 백제인이 설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들은 토목 직물 제철 도기 농경 목축 등의 분야에서 기술력을 인정받아 지역 엘리트로 자리 잡았다.

미나미구다라 소학교 오가 교장은 “처음에는 우리도 잘 몰랐다. 기자와 학자들이 찾아와 학교의 역사를 묻는 일이 많아 교사들과 함께 공부를 시작했다”며 “여러 문헌을 통해 오사카는 백제인들이 건너오면서 도시의 기틀을 갖추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전했다.

실제로 오사카에는 백제인들의 손끝에서 탄생한 유적들이 셀 수 없이 많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오사카 항 근처 높이 15.4m, 폭 62m에 달하는 대형 저수지 사야마이케(狹山池)이다. 홍수 방지는 물론이고 현재까지 오사카 주민들의 농업·생활용수를 담당하고 있는 이 저수지 역시 백제의 기술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사야마이케 박물관은 밝히고 있다. 

오사카 시 최초의 다리 ‘인덕교(仁德橋)’를 세운 것도 도래인이었다. 이쿠노 구를 설명하는 책자에는 ‘인덕교는 서기 323년 구다라 강(백제강)에 건설된 다리로, 일본 문헌에 나오는 다리로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전해진다”고 소개하고 있다.  

▼ 베틀… 부뚜막… 흙벽… 의식주까지 통째로 바꿔 ▼

백제 도래인들이 日에 끼친 영향


백제 도래인들은 학문이나 사상(불교)은 물론이고 의식주까지 고대 일본인들의 생활을 통째로 바꾸었다. 2005년 오사카 부 히라가타(枚方) 시 인근 나스즈쿠리(茄子作) 유적에서 나온 5세기 백제 베틀은 백제인들이 왜인들에게 재봉술을 가르쳤다는 문헌 기록을 고고학적으로 입증했다. 백제 역사를 연구하는 일본인들의 시민단체 ‘백제회’를 이끌고 있는 하나무라(花村·77) 회장은 지난달 12일 기자와 만나 “일본서기에 5세기 초반 백제 재봉사가 일본 왕실에 건너왔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방사성 연대 측정을 한 결과 발굴된 베틀과 시기가 일치한다”고 했다. 

주거 형태도 일대 변화를 맞았다. 5세기 전까지만 해도 벽이 없이 지붕만 있는 움막집에서 살던 일본인들이 본격적으로 단단한 지붕과 흙벽을 만들어 살게 된 것도 백제인들로부터 영향 받은 바 크다. 오사카 부 나라(奈良) 현 가시하라(강原) 시에서 이런 형태의 집터가 처음 발견됐는데, 1990년대 중반 한국 공주에서도 비슷한 형태의 집터가 나오면서 백제식 주택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동북아역사재단 연민수 실장은 “6세기에는 백제식 부뚜막이 널리 퍼져 일본의 식생활을 크게 바꿨다”고 했다. 그전까지 일본인들은 캠핑장처럼 야외에서 취사를 했다는 것이다. 사비를 들여가며 한일고대사를 연구하고 있는 하나무라 회장은 “어린 시절 친구들이 건너온 나라(한국)와 내 조국(일본)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너무도 닮은 것이 많아 전율이 일 정도”라며 “교류의 역사를 젊은이들에게 더 많이 가르쳐야 한다”고 했다.

:: 구다라 ::

일본 사람들은 백제를 ‘百濟’라 쓰고 ‘구다라’로 읽는다. 고대 오사카를 구다라스(百濟州)로 불렀다. 백제를 일본말로 ‘구다라’라고 부르게 된 것은 부여의 백마강 나루터인 ‘구드래’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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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교 50년, 교류 2000년 한일, 새로운 이웃을 향해]<5>닌토쿠 왕가의 비밀

세계 최대 면적을 자랑하는 닌토쿠 왕릉 앞에서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거나 참배를 하고 있다. 잡목이 우거져 거대한 구릉처럼 보인다. 참배소 뒤쪽 다이센 공원에서 바라본 장면. 사카이=정위용 기자 viyonz@donga.com

어제(18일) 소개한 일본 최대의 코리아타운 오사카에 있는 미유키모리 신사에는 왕인 박사의 노래비가 서 있다. 재일교포와 일본인들이 6개월간 모금운동을 해 한국 돈 4600만 원을 들여 만든 이 비석에는 왕인 박사가 일본 16대 왕인 닌토쿠(仁德)의 즉위를 축하하며 지은 것으로 알려진 ‘나니와쓰(難波津·지금의 오사카를 지칭하는 말) 나루터의 노래’라는 제목의 간단한 시가 한 줄 적혀 있다. ‘나니와쓰에 피는구나 이 꽃은/겨울잠 자고 지금은 봄이라고 피는구나.’

시비 옆 안내판에는 ‘닌토쿠 왕이 왕위에 오르니 오사카에도 봄이 오고 매화꽃이 다시 피는 것처럼 새로운 왕의 즉위를 축하한다는 의미’라고 한일 양 국어로 친절하게 적혀 있다. 미유키모리 신사는 일본 최초의 통일국가인 야마토 정권의 기틀을 세운 닌토쿠 왕을 모시는 신사이다. 이런 신사에 백제인 왕인 박사의 노래비가 서 있는 연유는 무엇일까. 또 닌토쿠 왕은 누구이고 두 사람은 어떤 인연을 맺었기에 백제인이 일왕의 즉위를 축하하는 시까지 짓게 된 것일까. 이런 궁금증을 풀기 위해 닌토쿠 왕이 잠들어 있는 왕릉을 찾아 떠났다. 

오사카가 일본의 중심지였던 시대, 궁궐 옆에 세워졌던 대형 창고를 재현한 모형. 일본이 백제와의 교역에서 얻었던 물품들이 이곳에 가득 찼던 것으로 추정된다. 앞쪽의 여러 둥근 콘크리트들은 이 창고의 기둥들이 세워져 있던 곳이다. 사카이=정위용 기자 viyonz@donga.com

○ 세계 최대 무덤을 만든 절대 권력자 

닌토쿠 왕릉은 그 면적에서 이집트 피라미드, 중국의 진시황릉을 넘어서는 세계 최대 무덤으로 일본이 자랑하는 문화유산이다. 

지난달 21일 오전 11시 오사카 난바 역에서 전철을 타고 20분쯤 달려 사카이 시(市) 미쿠니가오카 역에서 내리자 바로 거대한 구릉과 맞닥뜨렸다. 길이 486m, 높이 35m의 거대한 왕릉이라고 해서 잔뜩 기대하고 왔는데 왕릉 안으로는 들어갈 수가 없었다. 처음과 끝을 가늠하기 어려운 산 하나를 보는 게 전부였다. 7분 정도 걸어 내려가 참배소 앞에서 카메라를 꺼내 들었지만 능 규모가 너무 커서 한 화면에 담기지 않았다. 

왕릉의 실체는 옆 다이센 공원 안에 자리 잡은 사카이 시 박물관에서야 어렴풋하게 접근할 수 있었다. 박물관은 닌토쿠 왕릉을 포함해 이 일대 20여 개 왕릉과 고분들을 관리하는 관리사무소 격이었다. 

마침 박물관에서는 닌토쿠 왕릉 내부와 외부를 재현한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다. 레이저 항공촬영으로 능 안을 찍은 사진을 보니 일부 경계선이 안 보이는 등 심하게 훼손된 모습도 보였다.

전시실 한쪽 벽에는 윗옷을 벗고 커다란 돌 더미를 진 남자들이 오르내리며 능을 조성하는 현장을 재현한 대형 그림이 걸려 있었다. 노예를 부리던 고대 시대 작업방식이었다. 최근 일본 건설 회사들이 첨단 장비로 무덤 공사에 투입된 인력을 계산해 본 결과 하루 2000명의 장정이 15년 8개월간이나 동원되고 이들이 져 날랐던 돌과 흙만도 5t 트럭으로 56만2300대 분량인 것으로 나왔다. 지금 기준으로 보아도 어마어마한 대규모 공사였던 것이다. 무덤의 주인인 닌토쿠 왕은 고대 시대에 그 정도 인력을 동원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통치력을 행사하며 중앙집권적 통일국가를 이끌었음이 분명해 보인다. 

일본 고대사학자들은 일본 고대사에서 실질적 왕권이 시작된 시점을 닌토쿠 왕으로 보고 있다. 그가 집권하던 시절 오사카가 얼마나 큰 번영을 이뤘는지는 오사카역사박물관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지난달 19일 시내 중심부에 있는 오사카역사박물관에 도착했더니 입구에서부터 거대한 고대 양식의 건물이 관람객을 맞았다. 데라이 마코토(寺井誠) 주임 학예원은 “고대 오사카 궁에서 창고로 쓰이던 건물을 복원한 것”이라며 “5세기 왕실의 교역 물품을 보관했던 것으로 총 16동 이상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창고 하나 길이만도 10m에 너비가 9m였는데 이런 건물이 16동 이상이나 있었다고 하니 수천 년 전 고대 시대에 얼마나 교역이 활발하고 절대 권력의 힘이 셌으면 이 정도였나 놀랍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물관은 오사카가 일본의 중심지로 야마토 시대를 이끈 시대를 ‘나니와 대세(難波 大勢)’라고 명명하며 이 시대를 열었던 인물이 바로 닌토쿠 왕이라고 밝혔다.

박물관 10층에 재현된 당시 궁전 내부 생활을 둘러보니 궁의 모습이 어렴풋하게 그려졌다. 눈길을 끌었던 것은 화려한 색상의 옷을 걸친 인형들이 가로 42m, 세로 21m의 대극전(大極殿)에 서 있었는데 입은 의상들이 우리 눈에도 익숙한 백제나 신라 귀족들이 입었던 것과 비슷했다.


○ 백제인을 사랑했던 닌토쿠 왕

닌토쿠 왕이 백제인들을 아끼고 사랑했다는 것은 여러 문헌에서 확인된다. 백제인 신하가 죽었을 때는 매우 슬퍼하며 따로 신사를 지어주었을 정도였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왕은 43년 9월에 백제인 ‘아비코’로부터 사냥용 매를 선물 받고 이 매를 백제인 신하 ‘사케노기미(酒君)’에게 건네주며 잘 기르라고 했는데 그만 신하가 죽고 만다. 왕은 이에 크게 슬퍼하며 따로 장례를 치러주고 그에게 ‘응견신(鷹見神·매를 돌보는 신)’이라는 시호까지 내린다. 

정재정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는 “한일 역사학계에서 닌토쿠 왕을 주목하는 이유는 그가 일본 고대 국가의 틀을 완성한 사람이기도 하지만 한반도에서 건너간 백제 도래인들과 매우 밀접하고 특별한 관계를 맺어 고대 한일 교류의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사람이기 때문”이라며 “도래인이 대거 살던 오사카를 수도로 삼을 정도로 왕실 차원에서 한반도와의 교류의 문을 활짝 열었던 상징적인 사람”이라고 했다. 

백제 왕실과 닌토쿠 왕실의 관계는 닌토쿠 왕릉에서 발견된 각종 유물들이 백제 무령왕릉 고분에서 발견된 유물들과 매우 흡사하다는 사실이 나오면서 더욱 확신을 갖게 했다. 대표적인 것이 청동거울(동경·銅鏡)이었다. 1872년 닌토쿠 왕릉에서 출토된 것이 1971년 백제 무령왕릉에서 발굴된 것과 거의 비슷해 한일 역사학자들로부터 ‘쌍둥이’ ‘복제품’ 소리를 들었을 정도였다. 한국 삼국시대나 고대 일본 왕의 무덤에서 발견되는 청동거울은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무덤 내 부장품으로 알려져 있다.

쌍둥이 유물은 또 있었으니 바로 두 무덤에서 각각 나온 환두대도(손잡이 끝에 둥그런 고리가 달린 큰 칼)였다. 고리 안에 세 발 달린 새가 한 마리씩 들어가 있는 것이 똑같았다. 이런 양식은 중국에서는 볼 수 없어 한반도에서 전래됐다는 학설이 유력하다. 

닌토쿠 왕은 오사카의 건설 과정에서도 백제인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미나미 미쓰히로(南光弘) 동오사카 문화재학회장은 “닌토쿠 왕은 홍수를 막기 위해 오사카의 물줄기를 바꾸는 제방공사를 했는데 이는 일본 최초의 대규모 토목공사였다”며 “당시 공사 때 백제인들이 기술자나 공사 감독관으로 일했다”고 말했다. 

닌토쿠 왕 당시 오사카 거주 인구의 3분의 1이 백제인이었다는 설도 있다. 박영혜 오사카 한국문화원장은 “한일 역사학자들이 마음의 문을 조금 더 연다면 고대 문헌에만 갇혀 있던 왕가들과 한일의 긴밀한 관계가 ‘신화’에서 깨어나 ‘역사’의 무대 위로 다시 올라올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 야마토 정권 ::

일본이 고대 국가를 형성하는 3세기 말부터 야마토(大和·나라 교토 오사카 일대) 지방에 등장한 거대 무덤들의 흔적을 통해 이 일대를 중심으로 고대 통일정권이 만들어졌으리라 보고 ‘야마토 정권’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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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교 50년, 교류 2000년 한일, 새로운 이웃을 향해]<6>日서 태어난 백제 무령왕

1971년 무령왕릉 발굴과 함께 출토된 석판 지석. 가로 41.5cm, 세로 5cm, 두께 3.5cm인 석판에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점선 안 한자)이 나이 62세 되는 계묘년(523년) 5월 7일에 돌아가셨다”고 적혀 있다. 이 지석을 통해 지석의 주인이 무령왕임이 밝혀지게 됐다(위쪽 사진). 아래쪽 사진은 무령왕릉 내부 평면도. 입구로 들어가 벽돌로 축성한 좁고 어두운 널길(연도)을 따라 들어가면 좀 더 넓은 널방(묘실)이 나오는데, 이곳에 무령왕과 왕비의 관이 놓여 있는 구조다. 동아일보DB

옛 문헌에는 백제인들이 왜(倭)로 갈 때 이용하던 주요 해상로로 쓰시마(對馬)∼이키(壹岐)∼가카라시마(加唐島)를 표지(標識) 섬으로 삼고 갔다는 기록이 많다.

2년 전인 2013년 6월 일본 규슈 국립박물관은 한일 역사학자들을 모아 옛날 백제인들과 왜인들이 오가던 이 바닷길을 검증하는 시도를 했었다. 그 결과 문헌 기록이 맞다는 결론을 얻었다. 실제 이키 섬을 출발하면 앞에 보이는 섬은 가카라시마뿐이다. 가카라시마는 수천 년 동안 우리 선조들이 배를 타고 일본으로 갈 때 나침반 역할을 했던 중요한 섬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곳 섬사람들에게는 전설처럼 ‘먼 옛날에 어떤 여인이 이 섬에서 아기를 낳고 샘물을 마셨다, 그때 태어난 아기는 훗날 매우 귀한 분이 되었다’는 이야기들이 전해 내려오고 있었다. 그러다 720년 편찬된 일본서기에 그 ‘귀한 분’이 바로 ‘백제 무령왕’이라는 기록이 나오게 된다. 일본서기의 내용을 현대식으로 요약하면 이렇다. 

“461년 4월 백제 개로왕(蓋鹵王·재위 455∼475년)이 일본 유랴쿠 천황(雄略天皇·재위 456∼479년)에게 백제 여인을 왕비로 추천해 보냈는데 그녀가 입궁하기 전 간통한 사실이 알려졌다. 유랴쿠 천황은 그녀를 죽인다. 

개로왕은 동생 곤지에게 분노한 일왕을 달래고 나라 운영을 보좌하라고 지시한다. 곤지는 ‘임금의 명은 어길 수 없지만 형님의 여인(군부·君婦)을 주시면 명을 받들겠습니다’라고 대답한다. 개로왕은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부인을 곤지에게 내주며 ‘여인이 산달이 가까워오고 있다. 만일 가는 도중에 아이를 낳으면 부디 배에 태워 속히 돌려보내도록 하여라’라고 했다.

개로왕과 곤지 두 사람은 작별인사를 나누고 곤지는 왜로 가는 항해에 나선다. 그러다 결국 임신한 여인이 곧 산통을 느꼈고 배는 가카라시마에 정박했다. 곧 아이가 태어났고 아이의 이름은 섬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사마(斯麻)’라 하였다. 일행이 배 한 척을 내어 아이를 돌려보내니 이가 곧 무령왕이다.” 

일본어에서 한자 ‘사(斯)’는 ‘시’로 발음되기 때문에 시마 왕으로 읽으며 이는 곧 섬에서 태어난 ‘도왕(島王)’이라는 뜻이다. 

일본서기의 내용들은 오랫동안 한국인들의 신뢰를 받지 못했다. 특히 왜왕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동생을 보내면서 임신한 자신의 부인을 딸려 보냈다는 대목은 현대적 시각으론 도저히 이해가 안 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 김현구 전 고려대 역사교육과 교수는 ‘백제는 일본의 기원인가’(창비)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당시 한국과 일본에는 임신한 부인을 총신(寵臣·임금의 총애를 받는 신하)에게 하사하는 풍습이 있었다. 따라서 개로왕이 임신한 부인을 동생 곤지에게 하사했다는 기록도 못 믿을 이유가 없다. 1971년 무령왕릉이 발굴되면서 일본서기의 기록은 더욱 설득력을 얻었다. 발굴된 무령왕릉 지석에 무령왕 이름이 ‘일본서기’와 완전히 일치하는 ‘사마(斯麻)’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곤지가 일본으로 가는 길에 태어난 아이가 무령왕이라는 이야기나 무령왕이 일본에서 태어난 뒤 귀국해 즉위했다는 것은 사실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시계를 돌려 1971년 무령왕릉이 발굴되는 장면으로 돌아가 보자. 그해 7월 한여름 전국은 긴 장마로 신음하고 있었다. 삼국시대 백제 고분군이 밀집해 있던 충남 공주시 서북쪽 송산리(오늘날 금성동) 언덕에서는 문화재 발굴단이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7월 6일 배수로 공사를 하느라 무심코 땅을 파던 한 인부의 삽에 뭔가 단단한 물체가 부딪쳤다. 손으로 헤집어 보니 흙을 구워 만든 벽돌이었다. 그런데 한두 개가 아니었다. 조금씩 더 파고 들어가 보니 이 벽돌은 거대한 아치형 구조물의 일부였다. 처음엔 다들 기존에 발굴한 6호 고분의 연장이려니 생각했다. 하지만 이 구조물이 또 다른 무덤의 입구라는 것을 알고 현장은 충격에 빠진다. 

1971년 7월 8일 발굴단이 무령왕릉 입구를 막은 벽돌을 치우고 무덤 안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위령제를 올리고 있다. 워낙 서두르다 보니 흰 종이 위에 북어 세 마리와 수박 한 통, 막걸리를 올려놓은 것이 전부였다. 동아일보DB

이튿날 서둘러 김원용 국립중앙박물관장을 단장으로 하여 문화재관리국 학예직들로 발굴단이 구성되어 공주에 집결했다. 본격적인 발굴이 시작되자 무덤은 점점 모습을 드러냈다.

입구는 벽돌 구조물로 막혀 있었고 그 틈을 석회가 단단히 봉하고 있었다. 석회를 제거하고 입구 아래까지 내려간 시간이 오후 4시. 누구의 무덤인지는 모르겠으나 백제 왕릉급이 분명해 보이는 옛 무덤 앞에서 발굴단은 왕의 영면(永眠)을 방해하는 것을 사죄하는 위령제를 올렸다. 위령제라고 해봐야 흰 종이 위에 북어 세 마리, 수박 한 통, 막걸리를 올려놓는 게 전부였다. 

맨 윗단의 벽돌 두 장을 제거하는 순간 마치 한증막처럼 흰 수증기가 뿜어져 나왔다. 1400년 넘게 밀폐 상태로 있던 무덤 내부의 찬 공기가 바깥의 더운 공기와 만나 일어난 현상이었다.

숨을 죽이고 들어간 발굴단의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컴컴하고 깊은 연도(羨道·고분 입구에서 시신을 안치한 방까지 이르는 길)였다. 연도 중간쯤 엽전이 올려져 있는 석판으로 다가가자 석판 위에는 이런 글이 새겨져 있었다. ‘寧東大將軍百濟斯麻王(영동대장군백제사마왕).’

발굴단은 다시 한번 놀랐다. 사마왕은 다름 아닌 백제 무령왕(武寧王·461∼523)이었기 때문이다.(이상은 권오영 씨의 책 ‘무령왕릉’에 나온 내용을 재구성한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44년 전 무령왕릉이 1400여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후손들에게 모습을 드러내는 과정은 영화 ‘인디아나 존스’의 한 장면을 보는 것처럼 긴장과 박진감이 넘친다. 

일제강점기 전국 각지의 고분이 파헤쳐지고 도굴꾼들이 활개를 치던 상황에서도 용케 완전한 형태로 살아남은 고분이 있다는 것 자체도 신기했지만 무덤의 주인이 꺼져가던 백제의 맥박을 다시 힘차게 돌려놓았던 무령왕이었다는 게 알려지자 한여름 전국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당시에는 먹고살기에도 바빴던 형편이라 조상들이 남긴 숭고한 문화유산을 감당할 수준이 못 됐다는 게 권오영 씨의 말이다. 

“지석(誌石)을 통해 무덤 주인이 무령왕과 왕비의 무덤이라는 발표가 나오자 현장은 집단 패닉 상태에 빠졌다. … 보도진들은 앞다투어 무덤 안으로 들어가려 했고 무덤 안에 들어가 유물을 촬영하다가 청동 숟가락을 밟아 부러뜨리는 불상사마저 일어났다. 밀려오는 구경꾼들을 통제해야 할 경찰마저 ‘나도 한번 구경하자’며 앞장설 정도였다.”

하기야 그때만 해도 그만큼 중요한 유적을 우리 손으로 발굴 조사한 경험도 없을뿐더러 발굴 조사와 관련된 행정조치도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했을 터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한국 못지않게 무령왕릉 발굴 소식에 흥분한 나라가 있었으니 바로 일본이었다. 일본 언론들은 발굴 시점부터 비상한 관심을 보이며 이듬해까지 현장 답사기를 싣고 관련 심포지엄을 열면서 발굴의 의미를 찾고자 부산했다. 발굴 직후 아사히신문은 ‘백제 왕릉 발굴조사는 역사적인 대발굴’이라면서 ‘일본에 불교를 전해준 백제 성왕의 아버지이면서 일본서기에도 이름이 나오는 백제의 25대 무령왕과 왕비의 무덤이라고 판명됐다’고 대서특필했다. 

동시에 갑자기 일본인들의 눈길이 쏠린 곳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무령왕이 태어난 섬 가카라시마였다. 기자는 이달 초 가카라시마를 향해 길을 나섰다.


:: 지석(誌石) ::

죽은 사람의 인적 사항이나 업적, 자손 등을 기록하여 묻은 판석이나 도판을 말한다. 무덤의 내역을 밝힐 수 있기 때문에 고분 발굴에서 매우 중요한 가치를 가진다. 



 그만두고 나온 G모사 도쿄스튜디오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중에 디자이너 T씨가 흥미있는 정보를 알려줬다. Patreon이라는 사이트가 있는데, 창작활동을 후원해준다는 것이었다. 자신은 아무래도 곧 회사를 그만두게 될 것 같은데, 그렇게 되면 이 사이트를 이용해 창작활동을 하면서 먹고살 생각을 진지하게 하고 있다고 한다. 신기한 이야기라, 사이트를 좀 둘러봤다.

 


http://www.patreon.com



 창작활동을 "후원"하는 사이트이다보니 저 이름은 혹시 '패트런'이라고 읽는 건가? 싶었는데 후원자라는 뜻의 패트런은 patron이라고 쓰는 모양이니 아마 저건 적당히 고쳐서 독자적인 이름을 만든 모양이다. 물론 뉘앙스야 따왔겠지만. 패트리언이라고 읽으면 되려나.


 이미 아마추어나 인디 창작 활동을 후원하는 사이트는 유명한 킥스타터를 비롯해 이런저런 사이트들이 있는데, 그런 기존의 후원 사이트들과 이 '패트리언'의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인가 하나의 목표를 정해놓고 그 목표를 완수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다. 아니, 굳이 말하자면 목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의 프로젝트 완수'라는 큰 덩어리를 목표로 정하지 않아도 된다. 예를 들어 그림이라면 한 장당 얼마씩을 받거나 하는 식으로 목표 기준을 세밀하고 보다 부담없게 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더 재미있는 건 'per month'이다. 이것은 자신의 창작 활동에 대해 '매 달마다 얼마'라는 식으로 후원을 받을 수 있다는 형태인데, 크리에이터 입장에서는 최적의 경우를 상정하면 회사에 들어가지 않아도 월급을 받는 것과 다를 바 없게 된다. 




 패트리언에 가입하고 새 계정을 만들면 우선은 그냥 후원자 입장의 계정이 되는데, 중간에 자신의 계정을 크리에이터 계정으로 바꿀 수가 있다. 크리에이터 계정으로 설정하면 위와 같이 자신의 활동에 대해 세팅하는 페이지가 나오는데, 여기에서 주목할 부분은 세번째의 'What are you getting paid for?'(어떤 형태로 지급을 받을 것인가?)이다. 음악을 만드는 사람이라면 곡 한곡, 앨범, 영상을 만든다면 비디오 한편 만들때마다 돈을 받는 형태로 설정할 수 있다. 그리고 밑에 있는 Monthly campaign이 바로 매 달마다 자신의 활동에 대해 돈을 받는 옵션이다. 




 '매일, 혹은 매우 정기적으로 작품을 만드는 크리에이터들에게만 권장된다. 작업물 하나당 얼마가 아니라, 매달 한번씩 후원자들이 돈을 내주게 된다.' 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설정을 마치면 자신을 알리는 홍보 비디오와 후원자들에게 자신을 알리는 문구를 업로드할 수 있고,




 다음 단계로는 프로젝트 중간중간에 넣을 수 있는 Goal을 설정하게 된다. 이것은 설정하지 않아도 상관없지만, 크리에이터 자신도 좀 더 동기 부여를 하고 후원자들도 프로젝트가 진행되어 간다는 것을 보다 확실히 알 수 있게 된다. 




 마지막으로, 후원자들에게 돌아갈 보상을 설정하게 된다. 후원자들 덕분에 수입이 들어오면 그 후원자들에게 보상하는 금액, 그리고 감사의 메시지와 비디오 등을 설정하는 것. 이것도 역시 설정하지 않아도 되긴 한다.


 이상의 설정을 마치면 크리에이터로서의 등록이 완료된다. 


 패트리언 사이트는 후원자들이 낸 금액에서 5%를 수수료로 받고 나머지를 크리에이터에게 주며, 매달 5일에 자동이체를 해준다고 한다. 후원자들의 후원은 보통 신용카드나 PayPal 결제로 이뤄지며, 후원자로부터 카드 지불거절이나 취소 등의 이유로 입금이 되지 않을 경우 패트리언 사이트에서 확인하고 재차 지불하도록 요청하고, 성공적으로 지불이 되면 다음달의 이체 때에 연체된 금액을 포함시킨다. 즉 어떤 크리에이터의 후원자가 되면 자신의 카드로부터 매달 금액이 나가는 셈. 매달 돈을 받으려는 크리에이터라면 매달 일정한 금액이 빠져나갈 것이고, 한 작품당 돈을 받는 크리에이터라면 작품을 완성시킨 달에 작품 수만큼 돈이 나갈 것이다. 어떤 의미로 후원자는 조금 리스크를 안고 후원을 결정해야 하는 셈. 킥스타터같은 사이트보다는 보다 더 크리에이터 입장에서 만들어진 시스템이라 할 수 있다. 


 FAQ를 읽어보면 위에 쓴 기본 시스템 이외에도 다양한 사이트의 운영 원칙에 대해서 알 수 있다. 킥스타터보다 특히 한국 크리에이터들에게 좋은 점은, 국제적 지불수단(VISA 등의 국제 호환 카드나 PayPal 계좌)을 가지고 있다면 어느 나라 사람이든 이용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아직까지 국가 제한이 있어 한국인이 이용하기 힘든 킥스타터보다 월등한 장점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혼자 힘으로 하나의 프로젝트 결과물(그림이라면 아트북, 게임이라면 완성된 게임의 발매, 음악이라면 앨범 등등...)을 완성시키기 힘든 크리에이터 개인도 자신의 작업물을 평가받고 금전적인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시스템이라는 점에서는 매우 획기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http://www.patreon.com/creation?hid=1070951



 말은 좋지만 후원자들이 제대로 일해줄지도 모르는 크리에이터들을 믿고 과연 자신의 카드로부터 매달 돈을 내어줄까? 이런 의문이 드는 것도 당연할 지 모른다. 하지만 크리에이터가 애써서 만들어낸 창작물을 높이 사주고 대우해주는 서구인들답게, 사이트를 만든지 1년 반만에 12만 5천명 이상의 후원자가 생겼고, 이 후원자들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크리에이터들에게 매달 백만 달러 이상을 후원해주고 있다고 한다. 


 한국에서 이런 선순환 - 후원자들이 자신들이 보고 싶은 작품을 만드는 크리에이터를 보다 직접적으로 후원해주고 크리에이터들은 그런 후원에 힘입어 자유롭게 자신이 하고 싶은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는 - 구조가 나오지 못한 점은 한편으로 매우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 패트리언이라는 사이트의 존재와 개념은 매우 흥미롭다. 제대로 자신의 노력과 재능을 보상받지 못하고 있는 한국의 크리에이터들이, 이 사이트를 이용해 조금이라도 자유를 찾을 수 있다면 좋겠다. 나 역시도 이 사이트를 이용해 뭔가 해볼 생각으로 있다. 








개인적으로 좀 관심을 갖고 있어서 몇몇 글들을 스크랩함.


http://ppss.kr/archives/18339

http://www.amazon.omwww.workingus.com/v2/gnu/bbs/board.php?bo_table=job&wr_id=13202&page=511

http://jung9nee.blogspot.jp/2013/11/blog-post.html

http://liveandventure.com/2012/12/21/ra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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