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다시 와서 반년 넘게 살다 보니 한동안 잊고 지내던 키덜트 본능이 다시 살아나고 있는 것 같다. 최근에는 아들이 좋아해서 요도바시 카메라 장난감 코너를 자주 데려갔는데 그 와중에 나도 힐끔힐끔 이것저것 구경하는 데에 재미가 들렸다. 비록 지금 사려면 갖고 놀 시간 + 모아놓을 공간의 부족으로 맘대로 사지는 못하지만, 여기저기 슥 둘러보면서 아 이건 뭐고 어떻게 노는거군 하며 혼자 히죽거리는 것도 나름 재미가 쏠쏠하다.


 게다가 여긴 장난감의 천국 일본인지라, 보고 있자면 감탄이 나오고 한국에서는 어지간해서는 손에 넣기도 힘들 것 같은 물건들이 그득하다. 이런 것들을 둘러보며 뭘 하고 놀건지 상상하고 계획을 짜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아들이 좀 더 크면 아들과 함께 이것저것 만들고 노는 것도 재미있을 터이고.


 그렇게 요즘 둘러보며 눈에 밟히던 것들을 좀 추려 봤다. 



한국에서는 90년대쯤에 나름 많이 볼 수 있었지만 지금은 눈 씻고 찾아봐도 보기 힘든 각종 공작 키트류와 부품류. 고무줄을 쓰는 고무동력에서부터 건전지는 물론이요 태양광 패널로 움직이는 키트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없는게 없다. 각종 전선이나 LED, 회로 구성용 집게, 꼬마전구, 나사, 기어, 프로펠러, 바퀴 등등 자기 맘대로 만들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파츠도 충실. 이런 환경에서 소년시절을 보냈더라면 얼마나 재미있었을까.




어릴 적에 정말 많이 보고 자랐던 옛날풍 박스아트의 프라모델들. 요즘의 화려하고 세밀한 박스아트들은 오히려 너무 자세하고 명확해서 이런 옛날 그림들처럼 두근거리는 맛이 없다. 게다가 저 리얼함이라고는 엿바꿔 먹은 듯한 거대한 톱니바퀴와 드릴. 이것이야말로 80년대 메카의 로망 아닌가. 50주년 기념 한정모델이라고 써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또 말도 안되게 미친듯이 비싼 것도 아닌 납득가는 가격. 아마 이 중의 하나는 조만간 하나 질러버릴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지브리 프라모델 코너. 라퓨타 붉은돼지 나우시카 까지만 해도 오오 하면서 보고 있었는데 코난의 공중요새 기간트... 아오... 이딴걸 이렇게 모델로 만들어놓으면 나같은 인간에게는 그야말로 핀포인트 어택이 되는지라.  




거기다 이걸 보고는 어이가 없어서 실소가 나왔다. 아니 1943 비행기 모델이라니... 요즘 1943 뭔지 아는 애들 얼마나 되려나? 




그리고 추억의 로보다치! 요즘 새로 나오기 시작했다는 복각판인 모양.




요건 뭔가 조이드스러우면서도 스타일이 쌔끈한게 멋져서 뭔가 하고 좀 알아보니 고토부키야가 야심차게 내놓은 오리지널 시리즈라는 듯. 다양한 여러가지 메카닉이 있는데 다른 것보다 이 블럭버스터라는 놈의 저 둥근 캐노피가 너무 맘에 들었다. 역시 남자의 장난감에는 투명 캐노피가 달린 조종석이 있어야지...




쵸로Q도 복각이 된 모양인데 여러가지로 옛날 맛이 너무 안나는 싸구려틱한 질감에 대실망. 

모름지기 쵸로Q라 하면...


적어도 이 정도 퀄은 나와줘야 하는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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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재미있는 게 넘쳐나는지라 차후 또 사진 찍는 대로 갱신할 예정!





1. 들어가면서


 나는 2012년 6월에 프랑스계 일본 게임 개발업체에 취업하여 2014년 7월까지 2년 2개월 정도를 일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나는 2D 게임 그래픽 아티스트였고 그 전까지 계속 한국 업계에서 일했었다. 내 경험이 모든 업계의 모든 직종에 대해 설명해줄 수는 없을 것이고 특히 순수한 일본 회사가 아니라 외국계 회사이기 때문에 일반적이지 못한 부분도 꽤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안에서 한국의 취업 상황만 경험해본 것과는 많은 차이점을 느꼈고 그런 것들에 대해 서로 공유하고 알 필요는 있다고 생각되어 좀 적어 보려고 한다.


2. 무엇이 필요한가


 일단 한국인이 일본에 취업하기 위해서는 당연하지만 취업 비자를 받아야 한다. 이것은 일본 뿐만이 아니라 미국이라든지 다른 나라에서도 흔히 있는 것이라고 알고 있는데, 기본적으로 취업비자를 받기 위해서는 대학 졸업장이 있어야 한다. 나는 대학을 1년만 마치고 바로 이 일을 시작했기 때문에 졸업장이 없다. 이 경우는 일본 취업을 하려면 10년 이상의 경력을 증명해야 하는데, 연금이나 보험 등 한국에서 공적으로 증명이 되는 기록이 남아야 한다. 프리랜스나 외주하면서 보낸 기간이라면 좀 증명이 골아프다. 굳이 그걸 경력에 넣고 싶다면 페이를 준 클라이언트 측에서 세금을 납부한 기록을 국세청에서 떼오던가 해서 증명을 해야 하는데, 제대로 된 직장의 월급과는 달라서 일한 기간을 명확하게 증명할 수가 없다. 보통은 비자 심사 때 제대로 인정받기 어렵다고 보는게 좋다. 나도 일본 취업시 이 부분이 문제되어서, 제대로 취업되어 일한 기간을 간신히 10년 채워 취업이 가능했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가능한 한 크고 좋은 회사에 가는 것이 좋다. 나의 경우도 그런대로 규모가 있고 알려진 회사였고 외국계라 외국인 직원들이 많이 들어오기 때문에, 아예 외부 전문 업체에 위탁하여 비자 문제를 해결하고 있던 덕분에 대학 졸업장이 없어도 처음부터 3년의 취업 비자를 받을 수 있었다.


 취업 비자와 함께 또 한 가지 당연하게 필요한 것은 일본어 능력이다. 외국계 회사였음에도 실제 회사의 실무진 절반 이상이 일본인이었으며 이들과 함께 업무를 진행하고 의사소통하며 지내기 위해서는 당연하게도 일본어가 필수적이었다. 아직까지 일본 역시 영어를 잘 하는 사람은 많지 않고, 외국 생활을 회사에서만 보내는 것이 아니기에 회사 밖에서 제대로 잘 지내기 위해서는 당연히 일본인들과 부대끼며 지내야 한다. 혼자 일본에 가서 몇년씩 살아도 될 정도의 일본어는 익힌 후에 가는 게 좋다고 본다.


3. 일본 취업 시장의 현실


 이상의 조금 까다로운 조건이 무사히 다 해결된다면, 2014년 현재 한국보다 훨씬 형편이 좋은 일본의 취업 시장이 당신 앞에 열리게 된다. 물론 어디나 좋고 나쁨이 있는 법이라, 일본에서도 이른바 블랙 회사라고 불리는 악덕 기업이나 힘들고 급료가 짠 일자리는 얼마든지 존재한다. 어디까지나 전반적인 관점에서 라는 이야기이다.


 개인적으로 내가 가장 감명받았던 것은 헤드헌터와 파견직의 존재였다. 물론 헤드헌터와 파견직이라는게 한국에도 있긴 하다. 대부분의 것들이 한국에도 대부분 외형적으로는 존재하는데, 내부를 들여다보면 참 한국과 다르게 충실하다.


 뭔가 대단히 화려한 경력이나 전문 스킬을 갖고 있지 않아도, 일본에서는 일반 사무직의 수요도 많고, 이런 수요들을 많은 헤드헌터들이 관리하며 일자리를 찾는 일반인들과 연결시켜 준다. 윈도우를 켜고 문서 작성과 오피스, 메일 정도만 가능한 일반 사무직도 얼마든지 헤드헌터의 소개를 받으며, 이들은 단순히 한번 취업하면 그걸로 끝인 것이 아니라 자신이 소개시켜준 사람을 계속해서 관리해준다. 취업이 된 이후에도 정기적으로 연락하며 회사의 상황과 근무 조건을 체크하고, 내부적으로 업무량이 부당하게 많다거나 인간관계에서 트러블이 심하다거나 하면 중간에서 회사의 부장이나 높은 사람들과 상담하여 조정을 해주고 다리를 놔준다. 취업한 근로자 본인이 불만을 직접 말하고 회사와 껄끄럽게 싸워야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아무래도 힘들다거나, 회사를 옮기고 싶다거나 해서 그만둘 때에도 헤드헌터는 계속 함께 상담해주고 협의를 도와주며, 그만두고 나면 새로운 회사를 알아봐 준다. 헤드헌터 본인이 전직하거나 그만두게 되면 당연히 후임에게 자신의 담당 고객을 인수인계 해준다. 이런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시스템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파견직으로 근무하며 살아간다. 회사에서 짤리거나 하는 일은 사실상 쉽게 일어나지 않으며, 일어나도 사실상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


 일본 취업시장의 건강함은 취업 정보 사이트를 들여다봐도 알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취업 정보 사이트 중의 하나인 리쿠나비(http://www.rikunabi.com/)를 들여다보자. 우선 들어가면 이른바 신졸(대학 졸업하고 첫 취업)자들을 위한 '리쿠나비 2016', 이미 취업한 경험이 있는 사회인들을 위한 '리쿠나비 넥스트', 파견직들을 위한 '리쿠나비 파견', 약제사들을 위한 '리쿠나비 약제사', 대학/단기대학/전문학교 진학을 위한 '리쿠나비 진학' 등의 세세하게 나뉘어진 서브 사이트들을 볼 수 있다.


 나는 경력자이므로 리쿠나비 넥스트에 가입을 했는데, 사이트에 가입하면 역시나 단순한 카테고리 검색 같은 게 아니라 경력 면담 예약 담당자가 붙으며, SPI 테스트를 통해 적성 검사를 해주고, 메일로 일정을 잡아 전화 면담을 하게 된다. 이 담당 어드바이저는 구직자의 경력과 적성을 확인해주고, 채용 정보를 알려주고 구직활동 전반적인 상담을 해준다. 이렇게 '사람'이 직접 밀착 케어 서비스를 해주는 것이 구직자들에게는 얼마나 마음이 든든해지고 수고를 덜어주는지는 겪어본 사람만이 알 것이다.


 전문 스킬을 가지거나 다른 곳에서 경력이 있다면 대우는 더욱 더 크게 좋아진다. 최근 점점 더 각광받고 있는 링크드인과 같은 경력관리 사이트에서는 자신의 프로필과 이력만 제대로 등록해도 구인 활동이 아주 활발하다. 이전 링크드인에 대해 알게 된 뒤 가입 후 귀찮아서 프로필 페이지에 위의 외국계 회사에서 Lead Artist로 재직하고 있다는 이력만 간단히 적어 놓았는데도 메일로 '좋은 자리가 있으니 괜찮다면 상담하게 해주십시오' 이런 연락이 몇 번씩이나 왔다. 









 헤드헌터만이 아니라 사진에서 보듯 현업 일선의 회사로부터도 아주 적극적인 컨택이 온다.


 뿐만 아니라 한국에 와 있는 현재에도, 일본어를 할수 있고 경력이 있다면 국제 전화를 걸어오면서까지 면담을 하고 상담을 하며 인재를 스카웃하려고 한다. DeNA는 메일에 답장을 하자 바로 전화 면담 일정을 잡고, 약속한 날이 되자 제 시간에 바로 채용 담당 리더가 국제전화를 걸어와 깜짝 놀랐다. 사실 일본에서 일하고 있을 때는 일에 바빠 그다지 눈여겨 보지 않고 있던 회사였는데, 막상 이런 스탠스를 보고 흥미가 동해 홈페이지에 들어가 채용 조건 등을 살펴보니 놀랍다.


 https://career.dena.jp/job.phtml?job_code=413 

 


 DeNA의 아트 디렉터 직무 구인. 이 정도의 복지와 혜택이 있는 회사가 알아서 인재를 찾으러 저렇게 보다시피 적극적으로 뛰어다니고 있는 게 일본 기업이다.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라 이 땅에 애착이 있고 다시 돌아와 여기서 잘 행복하게 내 일을 하며 살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지만, 한국의 취업 사정이 너무나도 암울하고 구직자, 인재를 대하는 자세와 적극성이 너무나 다르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계속 든다. 



 웹에서 찾은 가톨릭의 기원과 다른 종파들에 대한 자료를 정리해 보았다.


출처 :

http://mirror.enha.kr/wiki/%EC%95%84%EB%B8%8C%EB%9D%BC%ED%95%A8%20%EA%B3%84%ED%86%B5%EC%9D%98%20%EC%A2%85%EA%B5%90

http://mirror.enha.kr/wiki/%EA%B8%B0%EB%8F%85%EA%B5%90

http://mirror.enha.kr/wiki/%EC%98%A4%EB%A6%AC%EC%97%94%ED%83%88%20%EC%A0%95%EA%B5%90%ED%9A%8C

http://mirror.enha.kr/wiki/%EA%B0%80%ED%86%A8%EB%A6%AD

http://ko.wikipedia.org/wiki/%EB%8F%99%EC%84%9C_%EA%B5%90%ED%9A%8C%EC%9D%98_%EB%B6%84%EC%97%B4



1. 기원 - 셈 족의 종교


 그리스도교의 성서 창세기에 등장. 노아의 맏아들이고, 오늘날의 유대인과 아랍인의 조상이라고 여겨지고 있는 인물. 이 사람의 이름을 따서 흔히 아랍인이라고 부르는 중동 지역의 사람들을 셈 족이라고도 일컫는다. 이들 셈 족의 신앙으로부터 출발한 종교에 크게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가 있으며, 보다 마이너한 드루즈교, 만다이교, 바하이교 등도 포함된다. 


 애초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시작되어 이슬람 지역에 한정된 민족 종교였던 야훼 숭배는 다곤, 바알 등 다른 경쟁자들을 제치고 근동과 지중해 연안으로 확대되었으며, 313년에는 로마 제국의 공인을 받아 4세기에는 로마의 국교가 되고 유럽을 지배하게 된다.유럽 이외의 대륙에 소개될 때에는 다른 대륙 고유의 문화를 침범하는 데에 악용되기도 하였으나, 평등과 박애를 중시하는 범인류적 교리 덕분에 도태되지 않고 오히려 발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개신교계에서는 이슬람교 등과의 공통점을 지적받으면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많지만, 에큐메니컬 계열의 통합 운동을 예로 들 수 있듯, 공통된 하나의 신 - 야훼를 경배한다는 거시적 차원에서 본다면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에큐메니컬 운동에 대해서는 여기 : http://bit.ly/1h1qqZH) 


 시기적으로 차후에 등장한 종교는 대체적으로 이전 종교의 내용을 포용하려고 한다. 그것이 실질적으로 보다 영향력을 넓힐 수 있는 쉬운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독교는 구약을 인정하고 이슬람교는 예수를 인정하지만, 유대교는 예수도 무함마드도 인정하지 않는다. 이슬람교에서는 유대교와 기독교인들을 "성서의 백성들"이라 부르며 인정하고, 성모의 처녀수태와 예수의 존재를 인정하고 중요한 예언자 '이사(يسوع)'로 부르며 다룬다. 쿠란과 성경에서 가브리엘이 나오는것 또한 그 예시다.


 이 3개 종교의 인구 수를 살펴보면, 우선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기독교가 22억, 그 다음을 차지하는 이슬람교가 13억(2010년도 통계 기준)이므로, 이들 종교의 인구 수는 전 세계 인구 수 65억 명의 절반을 넘어선다. 


 서구 사회에서는 특정한 종교로서의 의미도 있지만 전반적으로 자연스럽게 배여있는 생활, 문화라고도 할 수 있겠다. 특히 미국의 경우 개국 당시 청교도 의회 같은 기독교 공동체가 기반이 된 바가 크기 때문에 국가 전체적 이념에 기독교적 사상이 깊게 배어들어 있다. 참고로 기독교라는 단어는 그리스도의 한자 음역인 기리사독(基利斯督: Jīlìsīdū)에서 유래하였다. 개화기 문헌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야소기독'이라고 부르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종교는 모두 기독교에 해당한다.



2. 기독교


 기독교는 위에 설명했듯 유대교, 이슬람교와 함께 셈족 종교 가운데 두번째이자 아브라함교 중의 하나이다. 다른 셈족 종교와 구별되는 기독교만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메시아로서의 예수의 존재와 그의 희생으로 말미암은 구원을 믿는 것이며, 종파마다 내용이 다를지라도 기독교라는 분류에 들어가는 이상 이 내용만큼은 결코 변할 수가 없다. 마치 이데아론을 빼고는 플라톤의 철학을 논할 수가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때문에 만일 이 내용이 빠지거나, 혹은 예수를 대신해 어떤 다른 존재가 등장한다면, 그것은 기독교 계통조차 아닌 어떤 다른 종교, 혹은 이단이라고 보면 된다.


 크게 가톨릭과 정교회의 보편교회와 제 4차 칼케돈 공의회때 동의하지 않은 오리엔탈 정교회 그리고 이후 가톨릭에서 분리되어 나온 개신교로 분류할 수 있다.그러나 한국에서 말하는 기독교는 대부분 개신교를 지칭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개신교인들이 한 일을 기독교인들이 했다고 표현하는 경우가 많아서 주의가 필요하다. 사실 기독교에 속하는 분파들 끼리도 차이가 크며, 개신교 내부에서도 분파에 따라 분위기가 매우 다른 경우가 있으니 구분하여 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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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대인들의 유대교중 시한부종말론과 메시아의 재림을 강력하게 믿었던 에쎄네파, 기원 원년 부근에 예수 그리스도는 소외받은 자들, 그리고 자신을 따르는 자를 규합하여 기독교를 만들었다. 초기 전파자들 중엔 예수 그리스도, 베드로, 사도 바울 등이 있다. 또한 325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기독교 공인 전까지는 우리가 아는 기독교의 모습이 아니라 오히려 영지주의 등의 여러 종파들이 이단, 정통 구별 없이 존재했었다.


 기독교의 시작은 로마와 함께하는데, 예수는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티베리우스 시대의 사람이었으며, 로마황제가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 공인하기 전까진 지도적 위치에 있지 않았다. 초기 기독교가 사이비로 불린 것은 기독교가 로마에 전파되던 당시, 기독교도는 피와 살을 먹는다는 속설이 있어 초기 기독교에 대한 반감의 한 원인이 되었기 때문인데 이것은 '최후의 만찬' 때의 "빵은 내 살, 포도주는 내 피."라던 예수의 말이 비 기독교도들 사이에서 와전되어 퍼진 것으로 여겨진다. 


 재미있는 사실은 비슷한 시기의 미트라교에서도 "내 살과 내 피."라는 말로서 성찬례를 했지만 미트라교는 전혀 핍박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다음의 이유로 판단 가능하다. 미트라교는 이미 상당수의 로마군인들 사이에 퍼져있는 정말 메이져급 종교였다. 군인은 물론 로마 고위 관직자들과 심지어는 로마 황제들도 이 종교를 좋아했다. 특히 고대로부터 전해져오는 군신의 이미지와 계약과 중보의 이미지로서 미트라교는 로마에서 기독교보다 인기가 좋았다. 


 그리고 유일신교인 기독교는 다른 신을 섬길 수 없다는 이유로 신격화된 황제 숭배가 포함된 로마의 국가적 의례를 거부하였다. 이는 로마인에게 있어서 바로 반역으로 여겨졌다. 이로 인하여 64년부터 네로 황제부터 시작하여 기독교를 금지하기 이른다. 전체적으로 로마인들이 기독교인의 문제라고 생각한 것은 황제 앞에 충성을 맹세하는 국가적 의례를 거부하는 모습이었다.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의례를 거부하면 바로 처벌을 받게 되었다. 그 이외에는 딱히 문제로 여겨지지 않았고, 기독교 자체를 국가의 문제로 여기는 생각은 적었다. 원래 로마는 다신교이며, 기독교 이외에도 많은 종교가 공존했기 때문에 종교 자체보다는 '개인의 행동'을 문제로 삼았다. 공공연한 기독교인이라 해도 의례를 거부하지 않으면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그러나 이를 거부할 경우 법적조치에 취해지게 되었다. 


 따라서 기독교인에 대한 탄압은 간헐적이었다. 기독교인의 순교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반응은 잘 알 수 없다. 감명을 받아 귀의했을지도 모르고, 그냥 어리석은 멍청한 사람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탄압 때문에 기독교 세력은 그다지 뿌리를 박지 못했는데, 예를 들어 신약 성서 초기에 등장했던 교회들은 그 뒤의 행방이 묘연해지는 경우도 많았다. 


 다신교의 로마에서 기독교만 유일하게 간헐적이나마 종교를 이유로 탄압받는 이유는 기독교인들이 유난히 미움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이들이 미움을 받는 이유는 수많은 축제나 스포츠 행사에 일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로마는 일년에 3분의 1 가량이 축제로 도배를 할 정도로 많은 축제가 있었다. 이는 국가적인 레벨이거나 혹은 지방적인 레벨의 축제들이었다. 많은 종교를 믿는 사람들 중 기독교인들 만은 이런 축제들에 일절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으며 이러한 태도는 다른 로마인들에게 '자기네가 뭐 그리 대단한가?' 라는 생각을 품게 했던 것이다.


 사실 기독교의 박해가 처음 시작된 것은 네로였는데, 그가 대화재의 책임을 기독교인들에게 돌리는 이유는 그들이 종교적인 문제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그 사회에서 미움받는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즉 기독교에 대한 탄압은 기독교인들이 스스로 생각한 것처럼 종교를 믿었다고 탄압받은 것이 아니라, 그들이 로마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다양한 축제와 행사에 일절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에 대해 미움을 받아 탄압을 받은 것이었다. 


 그런데 서기 110년 트라야누스 황제는 기독교들의 행방을 밝히지도 캐지도 말라는 명령을 내린다. 종교 조직으로서의 기독교는 탄압할 생각이 없다는 의미로, 공공연하게 로마의 국가적 의례를 거부하는 개인의 행동만을 문제로 삼은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로마의 신을 거부하는 기독교는 불법요소였다. 지도자들도 곧 세계가 멸망할 거라고 생각해서 순교와 죽음을 장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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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세기 로마 제국은 사회적 불안정 때문에 종교적 욕구가 늘어나서 기독교 세력이 크게 팽창하였다. 이와 더불어 많은 황제들이 기독교에 대한 탄압을 시도하였는데 군인 황제 중엔 데키우스, 발레리아누스 황제등이 대표적으로 탄압하였다. 이들이 탄압한 이유는 기독교인들의 사회적인 단합을 망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기독교인들은 국가적인 행사등 에 일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며 로마인들이 3세기의 위기 때 신전에 가서 울고 불고 했을 때 역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군인 황제들은 이들이 사회적인 단합을 해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을 탄압하고, 이로 인해 다른 로마인들이 단결하길 바랐다. 


 군인황제 시대가 끝난 후에 정권을 잡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역시 전례없이 강경한 탄압을 시도하였다. 사실 전임 황제였던 데키우스나 발레리아누스 황제도 강도는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비슷했는데, 문제는 전임 두 황제는 일찍 비명횡사하는 바람에 탄압이 중단되었던 것. 반면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오래 살았으므로 오랫동안 강력한 탄압을 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목적도 전임황제와 비슷하여 로마 사회의 단합 그리고 황제의 권위의 강화하기 위한 탄압이었다. 디로클레티아누스는 트라야누스처럼 "국가의례를 거부하는 기독교인 개인"만을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조직 자체"를 겨냥해서 파괴하려 하였다. 그 결과 기독교는 굉장히 큰 타격을 입었다. 하지만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중도에 퇴위하였고 그 결과 기독교 탄압도 애매하게 중단된다. 


 콘스탄티누스 1세가 사회, 정치적 요인으로 기독교를 공인한다. 그가 공인한 목적은 기독교의 유일신을 섬기게 하고 로마 황제를 그 유일신과 신도의 중간에 위치한 존재로 만들어 대중들에게 숭배받게끔 하기 위해서였다. 황제를 신으로 숭배하는 것은 당시엔 낮선 것이 아니었는데 이는 이집트의 파라오나 페르시아 제국의 황제들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런데 로마 황제는 특이하게도 제국민들에게 신으로써 숭배받는 전통이 약했고 따라서 조금만 실책을 저지르면 즉시 암살당하고 내전이 발발하는 패턴이 계속되었다. 콘스탄티누스는 따라서 로마 황제를 아예 유일신인 야훼를 지키는 종교의 수호자로 만듦으로써 오리엔트에서 황제를 신으로 섬기는 것과 비슷한 효과를 내고자 한 것이었다. 


 사실 이러한 시도는 군인황제 시대 때의 아우렐리아누스가 최초로 시도하였었다. 그는 기독교의 신이 아닌 태양신을 내세우고자 하였다. 하지만 태양신보다는 기독교의 유일 신앙이 콘스탄티누스의 목적에 더 걸맞았는데, 그 이유는 기독교는 오랜 전통의 유태교의 영향으로 인해 상당히 정교한 이론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콘스탄티누스의 어머니가 기독교신자였기 때문에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에 대해 꽤나 친숙하였고 따라서 기독교야말로 그의 목적에 걸맞다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다. 사실 콘스탄티누스의 이 방식은 그의 예상을 뛰어넘을 정도의 대성공을 거두어 100년간 지속된 황제 암살 → 내전 → 승자의 황제계승의 패턴이 거짓말처럼 중단된다. 그 뒤 매우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테오도시우스 1세가 기독교를 제국의 국교로 선포해버렸다. 


 콘스탄티누스는 죽을 때쯤 가서야 세례를 받았는데 그 이유는 자신이 저지른 모든 죄를 씻을 수 있고, 살인등의 죄를 지어야 하는 황제라는 점 때문이었다. 물론 현대 교리상으로는 저런 이유로 세례 받기 전에 뭘 해도 괜찮다는건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4세기 당시에는 세례가 모든 죄를 씻어준다고 여겼기에 최대한 늦게 받는 것이 유행이었다. 이로 인해 기독교는 피탄압종교에서 순식간에 지배종교로 변모한다. 하지만 도리어 로마에 적대적인 국가들은 그 이전 관용을 배풀던 기독교를 탄압하게 된다. 이 때부터 자신들의 지위상승을 잃고 싶지 않았던 종교지도층은 본격적으로 정치에 개입, 기독교에 적대적인 국가들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독실한 이교 신자였던 율리아누스 황제가 기독교의 입김을 정치에서 완전히 제거하려 했으나 사산조 페르시아에 대한 원정 중 병사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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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독교의 분열의 기준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면, 기독교의 공인 이후 혼란이 심해지자 이를 정리하기 위해 니케아 공의회가 열려 이단세력(아리우스파)를 구별하고, 결국 아리우스파는 게르만족으로 주 표교를 옮기게 된다. 동지중해에서 출발한 수도원 운동은 초기 중세 유럽 문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고전 문화의 보존 및 전달, 이교도들의 개종이 그들의 주요 임무였다. 이교도들의 침입으로부터 고전 문화를 보존하면서 동시에 그들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전도 사업이었던 것이다. 


 동지중해와 이집트의 사막에서 출발한 엄격한 수도원 운동은 갈리아로 전파되었다. 이집트 출신의 수도사들은 주변이 온통 이교도로 넘쳐났으므로 그들의 개종에 나섰던 것이다. 갈리아에 전파되었던 수도원은 다시 잉글랜드와 아일랜드로 건너갔다. 6세기와 7세기에 걸쳐, 이 두 섬에서는 믿을 수 없을 만큼의 전도 활동과 수도원 운동이 전개되었다. 사실상 7세기와 8세기에 들어가면서 아일랜드와 잉글랜드에서의 선교 사업은 큰 성공을 거두었고, 거꾸로 그들이 보존한 여러 고전 문화들이 대륙으로 역수출되는 일까지 발생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라틴어로, 아일랜드 수도사들은 고전 문법책을 구해 그것을 완벽하게 재현했다. 반면, 대륙의 라틴어들은 지방 속어들과 융합되면서 본래의 모습을 잃어가고 있었던 것이다(오늘날의 유럽 대륙 국가들의 언어가 형성된 시기이다). 


 그들은 단순히 고전문화만을 보존하고 전파한 것이 아니었다. 초기에 대륙에서 섬나라로 들어갔던 기독교가 이제는 다시 섬나라에서 대륙으로 퍼지게 되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아일랜드 출신 수도사인 보니파키우스(Boniface, 680년 ∼ 755년)이다. 그의 별명이 ‘독일인의 사도’(또는 게르만 사도) 였으니, 그의 활동 무대와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는 서로마 교회가 위기에 처했을 때 프랑크 왕국과의 제휴를 위해 정략적으로 파견되었으며, 프랑크 왕국의 새로운 왕조인 카롤링거 왕조의 첫 번째 왕 피핀 3세에게 왕으로서 자격을 부여하는 세례식을 한 장본인이다. 


 아일랜드와 잉글랜드 출신의 수도사들은 농촌 지역의 미개하고 원시적인 농민 대중을 대량 개종시켜 유럽을 기독교 대륙으로 만들었다. 참고로 여기서 말하는 기독교는 삼위일체설을 주장하는 아타나시우스 계열의 기독교로, 그의 출발지는 로마를 중심으로 한 이탈리아 반도였다. 대륙의 기독교 수도원들은 대부분 보니파키우스의 영향을 받아 아일랜드 베네딕토계의 계율을 받아들였다. 특히 보니파키우스의 업적은 두 방향에서 이후 서방 교회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친다. 첫째는 그의 전도 사업으로 대부분의 게르만족이 최초로 기독교 세계에 편입되었으며, 둘째로 갈리아 지방에서 그의 활약으로 프랑크 국왕과 로마 교황 간의 관계가 전례없이 밀접해지게 되었다.


 이 상태에서 서로마가 멸망해 중세가 시작된다. 서로마를 멸망시킨 게르만 인들 중 고트족은 아리우스 파를 신봉했으나, 나중에 세력을 잡게 된 프랑크 족은 아타나시우스 파를 받아들였고, 결국 아타나시우스 파 기독교가 정통파 교회가 되었다. 5세기에는 안티오키아의 네스토리우스와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로스 간의 신학 논쟁으로 인해 네스토리우스파와 단성론파의 종파가 정통파에서 갈라져 나왔다.


  이후 정통파 교회는 후에 신학적, 정치적, 문화적 문제들이 뒤얽혀 두 거점인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세력이 나뉘게 되었다. 양대 교회는 중세 초에는 서로 협력하는 관계였으나 점점 상황이 안정되면서 소원해져가기 시작했고, 그리스-헬레니즘적 동방과 게르만-라틴적 서방의 문화적, 정치적 차이가 심해지면서 양대 교회의 관계가 악화되어가기 시작했다.


 동서 로마가 분리되었지만, 제국의 중심은 동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있었다. 서로마 제국은 476년 공식적으로 막을 내렸을 뿐만 아니라, 이교도와 야만인들이 설치는 폐허나 다름없는 상태였으므로, 동로마 제국이 중심을 이루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5세기와 6세기를 통틀어 동로마 제국의 황제들은 자국을 지켜내기에도 버거운 형편이었다. 간신히 동방 지역에서 황제권을 수호할 뿐, 서방 속주의 탈환은 꿈도 꾸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6세기 중엽 이후,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등장하고서야 겨우 타개된다. 게다가 그는 라틴어를 사용하는 등 라틴 문화를 고수했던 황제였다. 그 이후에 동로마 제국은 급속히 그리스화 하였다. 7세기 들어 동로마 제국의 관심사는 동지중해 지역에 집중되었다. 게르만계열의 야만족들에게 유린당한 서유럽의 속주들은 그들에겐 더 이상 관심사가 아니었다. 이미 그리스화 한 그들은 서방보다는 동방에 관심을 더욱 집중시켰고, 강력한 적인 이란의 사산 왕조와 맞부닥치게 되면서 그러한 경향은 더욱 강해졌다. 중요한 점은, 동로마 제국이 동방에 관심을 집중하면서도 계속 이탈리아 반도에 대해 간섭하고 있었다는 것과 그러면서도 이탈리아 반도에 대해 아무런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러나, 로마와 이탈리아가 갖는 역사적 중요성, 그리고 사도 베드로가 가지는 의미 등으로 인해 동로마는 여전히 8세기에 들어서면서도 이탈리아 반도를 수중에 넣고자 끊임없이 시도하고 있었다. 


 동지중해에서 옛 대제국의 영광을 되찾으려던 동로마 제국은 새로운 적과 마주치게 되었다. 새로운 적은 이슬람 세력이었고, 동로마 제국은 이들과 오랜 투쟁에 들어가야 했다. 8세기 초, 동로마 제국은 이슬람 세력의 침략을 격퇴하는 데 성공했으나, 그로 인해 심각한 재정 위기를 맞게 되었다. 


 630년, 메카 시(市)의 정복을 시작으로 전 아라비아 반도와 북아프리카, 그리고 동지중해를 장악하고 동로마 제국을 노린 이슬람, 그리고 거의 동시대에 서유럽을 통일한 프랑크 왕국. 이슬람이 우상파괴령에 영향을 미쳤다면, 프랑크 왕국은 우상파괴령을 둘러썬 동서 교회의 대립에 서로마 교회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이미 이란과 이슬람을 상대로 한 오랜 전쟁에 지쳐 있던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서로마 교회가 독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거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프랑크 왕국은 두 개의 새로운 서로마제국을 만들어냈다. 800년의 서로마제국과 962년에 신성로마제국의 수립이다. 서로마교회는 프랑크 왕국 덕분에 동로마로부터 독립할 수 있었고, 새로운 서유럽을 본격적으로 만들어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7세기에 상대적으로 안정을 되찾은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교구는 자신의 우월성을 입증하려고 했다. 로마 교회는 이전부터 총대주교구들 중 첫 번째 지위를 가지고 있었으나, 서방에서의 교황권 강화를 계기로 삼아 로마 교황이 전체 그리스도교 교회를 지배한다고 천명했다. 그러나 동로마 황제가 비호하는 콘스탄티노플에서는 로마 교황이 단지 다섯 총대주교 중 한명이라고 반박하며 자신의 칭호에 전 그리스도교 세계의 총대주교를 덧붙였다. 


 8세기 초 이슬람의 침략을 물리친 동로마 황제 레온 3세는 심각한 문제에 처했다. 하나는 성상 공경이었고, 다른 하나는 대토지 소유에 의한 조세 수입의 격감이었다. 새로 개종한 지역일수록 우상 숭배는 심했다. 여기서 '성상'(이콘(icon))이라 함은 성인들을 그린 그림, 조각, 모자이크 등을 총칭하는 것이다. 그것들은 문맹인 야만족들을 개종하는 데에 제법 짭짤한 효과가 있었지만, 기독교 자체보다는 오히려 지나치게 그 성상들을 공경하는 경향이 심해지고 있던 것이다. 성상 공경에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던 황제 레온 3세는 이런 폐단을 제거하고자 하였다. 


 다른 문제는 소토지 보유 자유농의 몰락과 대토지 겸병의 증대였다. 소규모 자영농은 제국군의 주력을 이루었으므로 제국 정부로서는 그들의 몰락을 방치할 수 없었다. 그대로 방치하게 되면 동로마 제국은 이슬람에게 넘어갈 지도 몰랐다. 대토지 소유자들 중에서도 레온 3세가 적대시한 것은 수도원과 교회가 소유한 대영지였다. 게다가 이 양자는 면제의 특권을 누리고 있었던 것이다. 레온 3세는 성상파괴령을 이용하여 토지 개혁을 달성하고자 했다. 토지 개혁이 이뤄지면, 소규모 자영농이 증대하고, 조세 수입도 증대될 것으로 기대한 것이다.


 이런저런 이유와 목적으로 726년에 첫 성상파괴령이 내려졌다. 이 파괴령은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결정적으로 갈라놓았다. 이전까지는 교리상의 논쟁에도 불구하고 로마 교황들은 동로마 황제의 충성스런 신하로 자처했으며, 황제를 자신들의 군주로서 존경과 예의를 갖추었다. 그러나 교황 그레고리오 2세는 레온 3세의 성상파괴령을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황제에게 도전하기까지 하였다. 그는 이제 막 개종한 북방 야만족들의 힘을 빌려 무력을 행사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던 것이다. 이러한 도전에 격분한 레온 3세는 라벤나 총독에게 그레고리오 2세의 체포를 명령했고, 동로마 제국의 라벤나 총독은 황제의 명을 받아 그레고리오 2세를 체포하고자 군대를 이끌고 출동했다. 그러나 그들은 롬바르드군에 의해 격퇴되었고, 격분한 레온 3세는 남이탈리아와 일리리쿰에서의 교황의 권리를 모두 몰수하여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에게 넘겨주었다. 동로마 제국에서 한 세기가 넘은 내전 끝에 843년 동방에서 성상이 재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두 교회의 결합은 요원해 보였다. 거기에 동로마 제국이 내전에 시달리는 동안 로마 교황 레오 3세가 프랑크 왕국의 왕 카롤루스를 서방황제로 등극시킨 것은 두 교회 중심지의 골을 더욱 깊게 파는 결과가 되었다. 


 사건에 영향을 미친 마지막 요인은 롬바르드족이었다. 기독교를 신봉하였기에 교황에게 우호적이던 롬바르드족이었으나, 아이스툴프 왕이 들어서면서 이탈리아 전체를 제패하려는 야망을 드러냈다. 그는 로마 교회를 새로운 이탈리아의 중심 교구로 삼을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성 베드로의 유지를 이어받아 전 서방 세계의 기독교를 다스린다는 체면이 있던 로마 교황은 로마와 그 주변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포기하면서 롬바르드 왕국의 최고 성직자에 불과한 존재가 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렇다고 동로마 제국의 보호를 청할 생각도 더더욱 없었다. 결국 새로운 보호자를 찾아야 했고, 이때 등장한 인물이 피핀이었다. 


 751년, 왕이 되고자 했던 피핀 3세는 보호를 약속하는 대신, 그의 왕위 계승에 대한 재가를 로마 교황에게 요구했고, 교황 자카리아는 즉시 보호를 댓가로 그를 새로운 프랑크 왕국의 군주로서 인정하였다. 피핀은 752년에 로마를 위협하던 아이스툴프를 완전히 패배시키고, 중부 이탈리아와 라벤나를 차지했다. 이를 가만히 보고만 있던 동로마 제국은 라벤나를 제국령으로 귀속시키라고 요구했으나, 피핀은 이를 거부했다. 그는 자기가 롬바르드족과 싸운 것은 어디까지나 성 베드로를 위한 것이며, 따라서 성 베드로에게, 즉 그의 후계자인 교황에게 넘긴다고 선언하였다(이것이 교황령의 시초이며, 그 중에 일부 남은 것이 오늘날 바티칸이다). 이로써 서로마 교회는 프랑크 왕국과 밀접하게 결합되었으며,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하게 된다.

 

 그리고 1054년, 양대 교회는 최종적으로 분리되었다. 이 사건을 교회의 대분열(Great Schism)이라고 한다. 대분열의 주요 쟁점은 필리오케 논쟁이었다. 필리오케 논쟁이란 즉 성령의 이중발현 문제이다. 이는 얼핏 간단해 보이지만 삼위일체의 위격 정립과 직결되는 중요한 문제였다. 초기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앙고백에서는 성령이 성부 야훼에게서만 나온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서방교회의 톨레도 대주교구에서는 이렇게 되면 성자의 위격이 성부에 비해 뒤쳐진다고 생각하였고, 성령이 성자 예수에게서도 발현한다고 수정하였다. 동방 교회에서는 이를 두고 신성모독이라고 할 정도로 불쾌해 하였으며, 이전부터 소원했던 사이가 결국 돌이킬 수 없게 되어 1054년 로마 추기경들과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가 서로를 파문하여 양 교회는 영원히 분리되었다.




3, 정교회


 본래 가톨릭 - 공교회에 속하지만, 11세기의 동서대분열과 그후 종교개혁 등으로 가톨릭, 개신교 등의 서방교회가 많은 변화를 겪자 이들에 비해 자신들은 변치 않는 정통성을 지키고 있다는 뜻으로 정교회라 한다. 사실상 정교회 전례는 초대교회와 동로마 제국 시대로부터 거의 변화가 없다. 다만 대성당 양식의 화려한 전례는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 시기에 더 이상 유지할 수가 없어 사멸하였고, 수도원에서 이루어지던 상대적으로 간소한 전례만이 남았다.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은 서로 간 차이점이 많긴 하지만 서로를 정통으로 인정하는데, 정교회는 정통성을 더 강조하고 로마 교회는 보편성을 더 강조할 뿐이다.


 이 두 보편교회들은 정교회와 가톨릭 외의 다른 교단을 모두 분열되어 나간 교회라는 뜻의 '열교' 또는 '종교 공동체'로만 언급하고 있다. 보편교회와 달리 만민 제사장론을 주장하는 개신교들은 완전한 교회의 구조를 이루고 있지 못하다고 보기 때문에 한지붕 아래의 기독교인이긴 하되,교회로는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정교회 신자들의 경우 자신들은 서구의 가톨릭이나 개신교 같은 세속화 되지 않은 정통교회를 유지하고 있다는 자부심에 가득 차 있고, 이 점은 타 종파들도 인정한다(정교회는 유일하게 초대 교회가 생성한 교회의 개념을 보존하고있는 기독교 종파다.) 하지만 정교회나 카톨릭이나 엄밀히 말하면 초대 교회에서 세속화되지 않은 직통 후신라 하긴 어렵다. 정교회는 그리스 현지화가 되면서 교회가 변형되어 생성되었고, 카톨릭은 서로마 멸망이후 게르만 현지화가 되면서 정교회에서 변형되어 떨어저나갔다. 둘다 현지화를 거치면서 변형되었으며, 진짜 초대 교회와는 다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교회의 원본 구조를 흔적이나마 보존하고 있는 것이 정교회기 때문에 초대 교회에 가장 근접해 있는 것이다.


 옛 교회의 본산인 콘스탄티노폴리스(현재의 이스탄불)이나 다른 총대교구들은 로마가 망했어요가 되면서, 전부 이슬람권에 넘어갔다. 현실적인 교세로는 가톨릭에 밀리는 편이나, 형식적으로는 동등한 위치에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정교회는 스스로를 칭할 때 Orthodox라고 하기 보다는 Ecumenical Church(라틴어: Ecclesiae oecumenicum)라고 칭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정교회는 엄밀히 말해 정교회가 아니라 그냥 교회다. '에큐메니컬'은 단순히 '세계의, 세계적인' 이란 뜻 외에도 상당히 복잡한 개념인데, 교회, 즉 에클레시아(Ecclesia)가 본디 어떤 뜻인지를 이해해야 한다. 에클레시아는 불러내어 만나다란 의미, 나아가 하느님 앞에 불러 모여진 성도의 모임이란 뜻이다. 에큐메니컬이라는 것은 '세계적인', '하나됨', '하나된 공동체', '하나된 교회'를 모두 아우르는 말이다. 정교회는 초대 교회의 교회 개념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며, 그 개념이란 Ecclesiae oecumenicum이란 말 그대로 '세상 만국의, 불러모인 성도들의 공동체', 즉 교회다. 본디 가톨릭과 정교회는 한 몸이었고, 동서대분열 이전에는 세계에 단 하나의 교회만이 있었다. 당연히 기독교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정교회는 문자 그대로 교회인 것이다. 동서 대분열이 없었다면 정교회(Orthodox)란 말 자체가 없었을 것이다.


 총대주교는 영어로 Patriarch라고 하며, 뜻은 파트로네(아버지)다. 가톨릭의 교황(본래는 주교)과 마찬가지로 아버지란 뜻이며, 로마 제국에 있었던 파트로네스 개념을 반영하고 있는 셈이다. 총대주교란 표현은 원어와 좀 많이 동 떨어젔다. 가톨릭의 주교와는 달리, 정교회는 초대교회에서 생성된 개념을 그대로 달아두었기 때문에 한국어로 번역하면 뜻이 좀 많이 빠져버린다. 마찬가지로 세계 총대주교도 에큐메니컬의 다소 모호한 뜻이 빠져버리기 때문에 완전하게 번역할 수는 없다. 세계 총대주교는 대략 세상 만국에서 불러모여진 성도들의 아버지(겸 파트로네스)인 것이다.


 실시간으로 쉴 새 없이 이성의 발전에 따라 두들겨 맞은 가톨릭이나, 그 사이 올라와서 나름의 포지션을 잡은 개신교와 다르게 현대 서구문명의 영향권을 벗어난 위치에 있기 때문에 저 두 종교에 비하면 해당 사회 내에서는 종교적 영향력이 더 강하다. 사회발전 대신 치고받은 이슬람교와 비슷한 정도. 정교회가 이토록 사회에 대한 영향력이 강한 이유는 교회의 게르만 현지화에 반발한 반카톨릭 운동과 별 관계가 없었으므로 교회에 대한 비판이 적고, 또 까일 점이 비교적 적은 편이며, 무엇보다도 정교회 특유의 "독립 교회"(Autocephaly) 구조의 영향이 크다.


 정교회는 교회들의 집합체이기 때문에 어느정도 규모가 커진 교회는 각 나라별로 "독립"된 교회가 되게 되어있다. 옛날 초대 교회의 구조를 꽤 보존하고 있는 것으로, 지금은 문화권을 따라서 독립 교회들이 있는 경향이 크지만, 옛날에는 아예 왕국마다 교회가 따로따로 있었다. 따라서 각 지역들이 카톨릭에 비해 훨씬 적은 통제하에 알아서 교회를 꾸려나가기 때문에 각 지역의 문화 그자체인 것이 정교회다. 이 영향력은 중세때 서방세계에서 카톨릭이 가지는 입지의 그것을 방불케할 정도다. 러시아 정교회는 러시아 문화 그 자체이며, 그리스 정교회도 그리스 문화 그 자체이고, 기타 비 칼케돈파 정교회 계열 교회들도 마찮가지다.


 동유럽이나 중동의 가톨릭 교회 중에서는 외견이 정교회 같은 종류도 있는데, 이는 로마 교황의 수위권 아래로 들어간 옛 정교회 소속 교회들이다. 그 외 콥트 정교회나 시리아 정교회 등 단성론적 교리를 가진 오리엔탈 정교회나 아시리아 동방교회등 네스토리우스파 교회들도 외견상 정교회와 유사한 경우가 많다.


 네스토리우스파 및 단성론 교리를 유지하는 오리엔탈 정교회와는 다르다. 이들 초기 분리교회는 공의회에서 의견차로 갈려 나갔기 때문에 정교회라는 명칭을 쓸 수 없지만, 자신들이 정통이라는 논지로 정교회를 자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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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 가톨릭과는 원래 하나의 교회였지만, 초대 교회의 다섯 총대주교구(로마, 콘스탄티노폴리스,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들 중 동방의 세 총대주교구(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가 이슬람의 세력권하에 들어감으로써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가 2강으로 부상했다.


 이 때부터 로마 교황은 '그리스도의 대리인'를 자칭했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는 '전 세계의 총대주교'를 자칭했다. 그 이후로 계속 뭔가 이상한 타이틀이 계속 덕지덕지 붙어가기 시작하는데,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아무튼, 이 두 교구의 수장들이 관할하는 교회들이 지금의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의 시초이다.


 두 교회는 중세 초의 혼란기에는 서로 협력하고 있었지만, 상대적으로 시대가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그리스-헬레니즘적인 동방과 라틴-게르만적 서방의 이질적인 정체성과 국제 정치 알력 등으로 점점 사이가 멀어졌다. 그 이후 성상파괴론과 삼위일체론 등 신학적 문제, 그리고 현실적인 세력권 문제로 격하게 치고받고 싸웠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가 허수아비인 다른 세 총대주교들의 서명을 받아 로마 교황에게 파문장을 날리거나, 교황이 서방 주교들만이 참석한 공의회를 열어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를 파문하거나... 물론 파문당한 장본인들은 서로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동방과 서방 교회간의 쟁점은 수도 없이 많았지만 가장 중요한 것들만 뽑자면 대략 세 가지 정도이다.


 첫 번째는 교황의 수위권. 로마 제국 시절에 다섯 총대주교좌에는 서열이 매겨졌는데, 이는 순서대로 로마, 콘스탄티노폴리스,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이었다. 이 서열에 관해 동방과 서방에서는 격한 논쟁이 오고갔다. 로마에서는 서열을 근거로 로마 교황이 모든 교구를 지배할 권리가 있다고 보았고, 콘스탄티노플에서는 로마의 교황이 베드로부터 교황직을 이어왔으며 예수의 후예라는 점은 인정하나, 다섯 대주교 중 한 명이며 그들과 동등한 위치에 있다고 주장했다. 로마정교회는 교황도 그 서열이 단지 명예에 해당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는 신학적이라기보다는 정치적인 쟁점으로, 현실적으로 보았을 때 가장 중요한 갈등이었다.


 두 번째는 성상 논쟁이다. 이슬람과 접해 있는 소아시아의 귀족들은 성상을 우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후 8세기에 권력을 잡은 소아시아 출신의 레온 3세가 성상을 거부하면서 성상파괴주의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의 아들 콘스탄티노스 5세가 신학적인 사유를 동원하여 나름대로 논리적으로 성상숭배론자들을 열심히 까댔으나 신학적 지반은 이슬람과 단성론의 논지를 거의 그대로 따온지라 매우 빈약했다. 이후 무수한 박해와 동시에 수많은 문화재가 파괴되고, 결국은 다시 성상을 인정하게 되었다. 성상파괴주의는 내적으로는 유럽 및 소아시아 해안지대 속주들과 대립하는 소아시아 내륙 속주 간의 알력, 비잔티움 제국의 세속 권력과 교회 권력 간의 내부 투쟁이 얽혀들어 전개되었다. 대외적으로는 콘스탄티노플 교구를 굴복시키려는 로마 교황의 세력까지 합세하였고, 이는 결국 한세기 반에 걸친 내전으로 치달았다. 이 논쟁은 서기 787년 레온 4세의 부인으로서 아들 눈알 뽑고 여제가 된 아테네의 이레네가 니카이아 공의회에서 성상파괴파를 이단으로 간주하였고, 서기 843년 섭정 황후 테오도라에 의해 종식되고 성상이 다시 인정받게 되었다. 그렇다 해도 성상파괴파에 대한 양보로 정교회권에서는 되도록이면 성상 중 성화(그림)만을 사용하도록 권고하였고, 정교회권에서는 이 날을 축일로 지정하였다. 맥락 상 많이 다르긴 하지만 어떻게 보면 정치적으로 이용된 자문화 파괴적 사건이라는 점에서 중국의 문화대혁명과 비슷한 면이 있기도 하다.


 세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쟁점은 삼위일체론이다. 7~8세기 경 톨레도 대주교구에서는 니케아 신경에 수정을 가했다. 기존에는 성령이 성부에게서 발현한다고 되어 있었으나, 톨레도에서는 성자의 위격 또한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래 '성령께서는 성부에게서 발하시니'라고 되어있던 것을 '성령께서는 성부와 또한 성자에게서 발하시니'라고 수정하였다. 라틴어 신경에서 '또한 성자에게서'를 뜻하는 것이 'filioque('filio(아들에게서)'+'que(또한)')'라는 단어이기 때문에, 이것을 필리오케 문제라고도 부른다. 한 세기가 지나자 전체 서방교회가 이를 받아들였으나, 동방교회에서는 당연하게도 이 수정을 서방 교회의 독단적인 결정으로 여겨 크게 분노했다. 서로의 입장이 팽팽히 갈리는 가운데 타협안은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었고, 두 교회간의 사이에는 불화만이 오갔다.


 그러다 결국 1054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미카일 케룰라리오스와 로마의 사절단의 상호 파문으로 최종적으로 두 교회가 분열되었다. 이는 동로마 제국의 특이한 상황과 남부 이탈리아에서의 엇갈리는 이권에서 기인하였다. 전통적으로 동로마 황제는 너무나 거대하고 강력한 자국의 교회를 견제하기 위해 항상 로마와 제휴하곤 했다. 11세기 동로마 제국은 내부의 세력 다툼으로 약해져 있는 상태였고, 황제의 권력 또한 매우 약해져 총대주교의 권력이 황제를 압도할 정도로 강해져 가고 있었다. 따라서 당시 황제였던 미카일 7세는 로마 교황에게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를 찍어눌러달라는 의미의 서한을 보냈다. 당시의 교황 레오 3세는 즉각 황제의 요구에 부임하여 로마 교회에서 가장 완고하며 호전적인 세 추기경을 사절로 보내 공의회를 개최하도록 했다.


 그러나 당시 총대주교였던 미카일 케룰라리오스 또한 만만치 않은 인물로, 황제를 구워삶아 황제로 하여금 로마 추기경들을 오히려 적대하게 했다. 11세기에 노르만인들은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를 정복하여 이곳의 정교회 교구를 강제로 교황에게 복속시켰는데, 이를 구실로 삼아 오히려 교황을 비난하게 한 것이다. 이 기간 중 내내 격렬한 논쟁이 오갔으며 양자간 합의는 없었다. 결국 열이 단단히 뻗친 세명의 추기경들은 어느날 밤 성 소피아 대성당의 제단 위에 총대주교에 대한 파문장을 올려놓고 로마로 떠나버렸다. 다음날 아침 이것을 보고 격노한 총대주교는 그 세명을 파문하고 로마 교황의 이름을 제단에서 지워버렸다. 당시 동서 교회간의 파문 사건들은 위에 말했듯 무척이나 빈번했지만, 이번 사건은 꽤나 양측이 격노할 만한 일이었기에 학자들은 이 날 이후로 동서 교회가 최종적으로 분열되었다고 본다. 재밌는 점은, 당대인들은 이 사건들에 대해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만큼 동서교회 간의 불화와 분리가 이미 놀랍지 않은 일이었다.


 이후 교회 분열은 십자군 전쟁 시기에 더욱 심화되었다. 동로마 제국은 1차 십자군 때부터 십자군들을 적으로 규정하였다. 즉, 십자군 세력으로는 동로마의 지원이 절실한 상황이었으나 동로마는 동방의 십자군 세력들을 이이제이의 장기말 중 하나로 취급하였다. 이 때문에 십자군과 동로마 제국 간의 사이에는 깊은 골이 파이게 되었다. 이 불신은 제4차 십자군 전쟁 중 일어난 1204년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으로 이어졌고, 이후 동방과 서방은 돌이킬 수 없는 불화에 빠져들게 되었다. 그리스의 한 역사가는 십자가를 내미는 악마보단 초승달을 내세우는 이교도가 훨씬 낫다고 기록할 정도였다.


 십자군 이후로도 많은 신학적 차이들이 발생했다. 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14세기의 수도사 그레고리오스 팔라마스가 주창한 헤시카즘이다. 헤시카즘은 인간의 이성으로 신을 이해하자는 골자의 당시 서방 신학 주류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이론이다. 이는 간단히 말해 인간의 인지능력으로는 신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전제 아래에 논리적인 생각을 거부하고, 단순한 기도와 묵상을 통해 신을 영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평신도들에게는 호응을 얻었으나, 당연하게도 당대의 지식인들과 신학자들에게 큰 반발을 샀다. 헤시카즘은 고대 그리스부터 이어진 학문적 전통상 받아들이기에 매우 불쾌한 것이었고, 결국 팔라마스는 교회에 의해 파문되었다. 하지만 그의 사상은 당시 동로마 제국 내부의 정치적 투쟁에 이용되었고, 결국에는 세력의 방향추가 돌아가 교회가 팔라마스의 파문을 철회하고 헤시카즘을 정식 교리로 인정하게 되었다. 이로써 삼위일체론 이외에도 서방과 동방의 신학에 큰 괴리가 생겨났다.


 15세기 초반에는 동로마 제국의 황제들이 멸망 직전의 국가를 구하기 위해 교황에 굴복하였다.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는 피렌체 공의회 이후로 교황의 수위권을 따를 것을 선언하였으나, 전체 정교회 세계에서 극심한 반발이 있었고 이를 인정하는 국가는 동로마 제국 뿐이었다. 하지만 동방교회 내에서도 반발이 대단해서 황제 따라간 통합 찬성파 일부는 돌아가면 맞아죽을까봐 이탈리아에 눌러앉았다. 이들 성직자들과 학자들은 르네상스의 촉진제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예컨대 그리스 출신의 베사리온 추기경이 베네치아에 기증한 장서가 교황청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던 장서의 수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어쨌든 결국 정교회는 당시의 총대주교가 사임하고 10년도 되지 않아 피렌체 공의회의 결정을 무효화하였다. 그렇지만 동로마 제국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는 다시 교회 통합을 선언했다. 대체 뭐 어쩌란 거야. 하지만 교회 통합은 말뿐인 것이었고, 실질적으로는 동로마 제국을 친통합파와 반통합파로 분열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거기에 동유럽의 정교회권이 반발하여 정교회 측에서도 각 교회 간 연결이 크게 약해지게 되었다.


 이후 양대 교회의 관계는 20세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에큐메니컬 운동에 양 교회가 참여하고서야 어느정도 회복되기 시작했다. 1965년 교회 분열 이후 1400년 만에 교황 바오로 6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문해,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아테나고라스가 역사적인 만남을 이루었으며 1054년의 상호 파문을 철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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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흔히들 가톨릭에서 정교회가 분리되었다고 이해하나, 그렇게 간단히 규정짓기는 힘들다. 정확히는 똑같이 강력한 두 중심지 사이의 연결이 끊어진 것이지, 한 쪽에서 한 쪽이 떨어져 나왔다고 하기에는 명확한 계기가 되는 사건도 시기도 찾기 어렵다. 상호파문도 한두 번 한 게 아니니(…).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은 고대 로마 제국 이래로 기독교 세계의 두 중심지로 기능해 오고 있었으며, 상호간의 위계는 세속권과 성직권이 서로 얽혀 복잡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처음에 세속권은 동로마 황제가 우위에 있었으나, 9세기 초반 동방 제국의 황제인 미카일 1세가 샤를마뉴를 프랑크인의 황제로 인정하여 형식적으로는 두 황제가 존재하게 되었다. 교회 서열로는 교회법 상 교황이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보다 우위에 있었으나, 이 우위를 전체 교회에 대한 지배력인지 아니면 그저 같은 총대주교들 중 첫 번째의 지위인지에 대해서는 전 세기를 막론하고 의견이 팽팽히 갈리고 있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서열이나 권위 같은 것이 아니라, 5세기 말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후 동방과 서방 교회가 서로 아무런 간섭을 받지 않고 관할 교구들에 대해 영향력을 유지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어느 한 쪽에서 다른 한 쪽이 떨어져 나갔다고는 볼 수 없다.


 이 당시 황제가 교황의 직위까지 대신하는 황제교황주의가 있었다고 여겨지고 있으나, 사실 황제교황주의는 없었다. 황제교황주의라는 말은 당대 동로마 황제의 전제권력을 비유해서 나타내는 단어이지, 황제가 교회까지 장악하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어째선지 한국에선 황제가 교황까지 겸한다고 왜곡되어 있는데, 아마 먼나라 이웃나라 탓이 클 것이다. 그런데 수능 교과에서도 황제교황주의라는 용어가 사용된다.(…) 과학교과서도 그렇고 대체 왜 이 모양이야. 황제는 그리스도교 세계의 보호자이며 총대주교 선출 동의권을 가지지만 결국은 평신도이다. 황제는 교회의 수호자이며 사도들과 동격으로 여겨지긴 했으나, 교회 내부에 관련된 것은 건드릴 수 없었다. 물론 13세기까지는 황제가 총대주교에 비해 우위를 점하고 있으며, 교회가 대체적으로 황제의 입김을 받았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총대주교들 또한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을 토대로 열심히 황제들을 꺾어누르려고 시도했으며, 어떤 때는 총대주교가 황제를 폐위시키기도 했다.


 가톨릭에서 부제(Deacon)라고 하는 직위를 정교회에서는 보제라고 한다. 하지만 한국어 번역상의 문제로 '받들다'라는 의미의 그리스어 '디아코노스(Διάκονος)'에서 나온 것은 같다. 결혼한 이가 사제가 되는 건 가능하나 주교는 결혼하지 않은 이에서만 뽑고, 서품 뒤의 사제는 결혼, 재혼이 불가능하다.


 성체성사는 성체(빵)만을 주로 모시는 가톨릭과 달리 양형 영성체(빵+포도주)를 주로 한다. 가톨릭의 양형 영성체는 빵을 포도주에 적셔 입에 넣어주지만, 정교회의 양형 영성체는 포도주가 담긴 성작에 빵을 넣어 수저로 떠먹이는 방식을 취한다. 성찬예배의 예식은 가톨릭의 미사와 비교해도 화려하다. 가톨릭에서는 부득이한 경우 정교회에서 예배를 볼 수 있게 하고 있으며, 이론상 정교회의 성찬례는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의 적법한 성사이므로 여기에 참석하여도 미사참례의 의무를 충족한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가톨릭 교회가 공심제 전통을 성찬례 당일에서 성찬례 1시간 전으로 완화하였고, 현실적으로 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단식 및 금육 등의 의무를 소홀히 하고 있기 때문에[7] 가톨릭 신자가 정교회의 성체성사를 하면 정교회의 입장에서 독성이 될 위험이 매우 높다. 결국 신자 개인이 정교회 성당에 찾아가서 성찬 전례까지 포함하여 예배에 참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가톨릭과는 달리 완전한 중앙통제가 아니라 그리스 정교회, 러시아 정교회 식으로 지역별로 분산되어 있다는 특징이 있다. 원래 독립 교구는 서열 상으로 로마, 콘스탄티노폴리스,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의 다섯 총대주교구 뿐이었으나 이후 다른 교구들이 독립적인 위치를 획득하면서 몇몇 교구가 총대주교좌로 격상되었다. 이 중 대표적인 경우가 모스크바 총대주교좌.


지금의 정교회의 각 국가별 독립적 위치는 동로마 제국 시대에서 유래하였다. 슬라브족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과정에서 동로마 제국 정부가 불가리아, 러시아 등의 슬라브족 교구들에 독립적인 지위를 보장해 준 것이 독립수장교회의 시초이다. 이후 동로마가 몰락하면서 총본산인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구가 마비되었기 때문에 정교회 각 교구들은 각각 독자적인 행보를 걷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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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의 교구 목록들은 모두 정교회 세계에서 공인받는 교회들로 전례 중 이 순서대로 주교들에 대한 축복을 기원하는 '딥디크(Diptych)'라는 기도문을 읊을 때 나온다. 하지만 첫 타자인 로마 교회는 1054년의 교회 동서분열 이후 삭제되어 버렸다.


초대 교회에서 이어온 5개 총대주교구: 서열 순서로 정리되었다.


로마 총대주교구 - 서방 교회의 총대주교, 보편 교회의 최상주교, 사도들의 으뜸인 사도 베드로의 후계자, 그리스도의 대리인

교회 분리 이전의 공식 칭호로만 칭한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로마도 엄연한 초대 총대주교구 중 하나이다. 이러한 이유로 서로 인정한 이후에도 가톨릭에서는 정교회의 교구들을 로마 교황청 산하의 교구들로 보며, 정교회에서는 로마 교황청 역시 총대주교구의 하나로 본다. 이것은 애초에 교회 분열의 가장 큰 이유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구 - 새로운 로마인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이자 전 그리스도교 세계의 총대주교, 사도 안드레아의 후계자

전성기의 관할구역은 전 발칸 반도와 소아시아,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 그리고 조지아와 러시아였다. 원래의 서열은 4위로 안티오키아 다음이었으나 중세 초에 2위로 격상되었다.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구 - 알렉산드리아와 전 아프리카의 총대주교

안티오키아 총대주교구 - 안티오키아와 전 중근동의 총대주교

초기 명칭은 전 동방의 총대주교였으나, 아시아가 워낙 넓은 대륙인데다 당시의 로마 제국 국경 밖에서는 관할권을 행사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중근동으로 수정되었다.

예루살렘 총대주교구 - 예루살렘과 전 팔레스타인의 총대주교

예루살렘과 팔레스타인이 기독교에 있어서 성지 중의 성지이기 때문에 총대주교구가 되었으나 관할범위가 가장 작다. 

주의해야할 점은, 칼케돈 공의회에 따른 비칼케돈파 교회가 분열되어 나갔을 때, 비칼케돈파가 우세했던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 총대주교구의 대다수 교회공동체들은 자기네들의 비칼케돈파 교계제도를 계속 유지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설명하고 있는 정교회의 세 총대주교좌 중 두 곳은 엄밀히 말하면 비칼케돈파 성직자들이 해임된 이후 콘스탄티노플에서 후임으로 임명한 성직자들의 후계인 것이다. 즉, 위의 두 총대주교좌는 해당 지역의 기독교도 중에서도 극소수인 칼케돈파 교회만의 총대주교좌라는 것이다. 예컨대 안티오키아 총대주교좌는 시리아 기독교도들의 다수를 차지하는 비칼케돈파 시리아 정교회의 총대주교좌와, 극소수인 칼케돈파 정교회의 총대주교좌가 따로 있다. 덤으로 마론파 총대주교좌도...


10개의 독립교회: 이하는 따로 서열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스 정교회 - 아테네와 전 그리스의 대주교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구의 몰락 이후 오스만 제국의 지배 시절에도 기독교 신앙을 유지하여 정교회의 신앙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 사회 및 전체 정교회에 상당한 영향을 주고 있다. 이 때문에 한때 정교회를 '그리스 정교회' 또는 '희랍 정교회'라고 표현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리스 정교회의 수장이 왜 총대주교가 아닌가 하면, 형식상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의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본래는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구에 소속되어 있었지만, 그리스가 독립한 뒤에도 이스탄불=콘스탄티노플은 계속 오스만 제국의 영내에 있었으므로 정치적인 문제로 아테네에 대주교구를 설치하여 분리한 것이다. 단, 그리스 영토 내에 있는 '아토스 산'의 수도 공동체, 그리고 크레타섬과 도데카네스 제도는 총대주교구 직할이다.

러시아 정교회 - 모스크바와 전 러시아의 총대주교

세르비아 정교회 - 세르비아의 총대주교이자 베오그라드와 카를로비치의 수도대주교

루마니아 정교회 - 왈라키아의 수도대주교이자 루마니아의 총대주교

불가리아 정교회 - 소피아와 불가리아의 총대주교

알바니아 정교회 - 티라나와 전 알바니아의 대주교

폴란드 정교회 - 바르샤바와 전 폴란드의 수도대주교

체코와 슬로바키아의 정교회 -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도대주교

조지아 정교회 - 트빌리시와 므츠헤타의 대주교이자 조지아의 총대주교. 카톨리코스(Catholicos)라는 명칭으로 불린다.

키프로스 정교회 - 신 유스티아니아와 키프로스의 대주교

자치독립교회

시나이 정교회 - 예루살렘 총대주교구 소속, 수장은 시나이와 라이트의 대주교이자 성 카타리나 수도원의 대수도원장 겸임

일본 정교회 - 모스크바 총대주교구 소속, 수장은 도쿄의 대주교이자 전 일본의 수도대주교.

핀란드 정교회 -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구 소속이며 수장은 카렐리야와 전 핀란드의 대주교.

에스토니아 정교회 -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구 소속이며 수장은 탈린과 전 에스토니아의 수도대주교.

우크라이나 정교회 - 모스크바 총대주교구 소속이며 현재 키예프 총대주교구와 키예프 수도대주교구로 분열 상태로 모스크바 총대주교구 소속의 우크라이나 자치교회가 공인되고 있다.

중국 정교회 - 청과 러시아가 수교할 때 중국에 전래되었다. 베이징 대교구, 상하이 대교구가 존재했고 1956년 모스크바 총대주교구에서 자치권을 얻었으나... 문화대혁명으로 작살났다. 안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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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 정교회의 경우 10세기에 키예프 대공국이 국교로 받아들였고 11세기 러시아 전역에 확고히 자리를 잡았다. 초기에는 동로마 제국에서 파견된 그리스인 수도대주교의 지도를 받았으나, 동로마 제국이 멸망한 15세기를 기점으로 독자적인 대주교구를 가지게 되었다. 이후 로마노프 왕조 시대에 모스크바 대주교구가 총대주교구로 격상되었으며, 지금까지도 러시아인의 70% 가량이 믿고 있다.


 러시아에서는 정교회를 받아들인 시점이 늦었기에 몇몇 왜곡된 정보들도 있었고 이것이 러시아의 민속 신앙과 어우러져서 상당히 미신적인 성향을 많이 보인다. 예를 들자면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심은 전통적인 슬라브 신앙의 대지모신과 결합되었고, 이런 경향은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죄와 벌》에서도 나올만큼 대중적이다. 17세기의 대주교 니콘이 이를 바로잡기 위해 가톨릭과 그리스 정교회의 전례를 도입하여 교정 운동을 펼친 적도 있었지만, 오히려 교회가 심각하게 분열된 데다가 정치적 논리 때문에 피만 잔뜩 보고 교회가 국가에 완전히 종속되는 결과를 빚었다. 심지어 황제가 총대주교를 임명하지 않아서 러시아 제국이 몰락할 때까지 약 250년 간 총대주교좌가 공석이었다. 이 구도는 러시아 제국이 해체되고 소련 시기까지도 계속되었다.


 키예프 러시아에서 국교를 정할 당시 블라디미르 공은 정교회, 가톨릭, 이슬람교, 유대교 4개 중에서 선택하려고 했는데, 이슬람교는 술과 돼지고기를 못 먹게 하니 아웃, 유대교는 블라디미르 공이 "왜 유대인이 선택받았다는데 당신네는 나라 없이 떠돌아 다닙니까?"라는 질문에 랍비가 아무 말 못해서 아웃. 그래서 두 기독교가 남아서 두 쪽 다 사절을 보냈는데, 가톨릭측 사절이 갔던 독일은 거의 암흑시대로서 야만족과 다름없는 안습이었기 때문에 아웃, 정교회측에서는 휘황찬란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대성당에 데려가서 그 화려함에 당장 정교회를 선택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런데 사실 그보다는 접근성과 당시 권력의 차이 문제가 있었다. 러시아는 로마보다는 비잔티움과 훨씬 가까우며 당장 직접적인 무역루트나 영향력 면에서 여러모로 정교회를 택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 크기만큼 신자 수도 많지만, 소비에트 연방 당시 극심한 탄압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제2차 세계대전 때 스탈린은 나치 독일의 침략을 막는 데에 종교적 열의를 이용하기 위해 다시 정교회 신앙을 부활시켰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위험한 곳에는 정교회 이콘(성화)을 갖다놓을 정도. 러시아의 도시전설에 의하면 스탈린이 꿈을 꾸다가 정교회가 부활되면 전쟁에서 이길 것이라는 계시를 받았다고.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스탈린 치하에서 어느정도 정교회가 복원되기는 하지만, 다음에 집권하는 흐루쇼프의 탄압을 받았다.


 소련이 붕괴된 이후에는 거의 국교화되어, 보리스 옐친이나 블라디미르 푸틴은 예배에도 자주 참여했다. 특히 공산당 붕괴 이후 러시아에서는 아노미 상태에 빠진 국민들이 사이비 종교에 홀리는 예도 적지 않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대비로서 정교회를 밀어주는 정책이 강화되었다. 실제로 옴진리교가 한 때 러시아에서 크게 세력을 떨쳤으며 러시아인 신도들은 아사하라 쇼코 교주가 체포되자 무력으로 아사하라 교주를 탈환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소비에트 연방 몰락 이후 각 국가별 교회문제 때문에 대판 다투기도 하였다. 우크라이나 등 구 러시아 영토의 교회는 각 국가의 교회이나 그 교회 건물의 소유권을 러시아 정교가 소유하고 있었는데, 각 국가들의 독립 이후 러시아 정교회가 이를 바탕으로 수위권을 주장하면서 독립교회를 인정하지 않아 갈등을 빚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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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정교회는 구한말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성당 부지(지금의 경향신문 자리)를 수여한 것으로 시작된다. 이후 1900년에 입국한 러시아 정교회 소속 흐리산프 솃콥스키 신부의 주도로 이해 2월부터 선교가 시작되었고 1903년에는 성당을 건립했으나, 러일전쟁으로 선교사가 모두 추방되는 바람에 1906년 재입국이 허용될 때까지 제동이 걸렸다. 게다가 1910년에는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그래도 1912년에는 첫 조선인 사제인 강탁 신부를 배출했고 이어 자체교육기관인 보정학교를 세우기도 했지만, 러시아 본국에서 1917년에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면서 해외 선교부가 폐쇄되는 등 복잡한 사정으로 인해 한국을 신경쓸 수가 없게 되었다.


 한국 정교회는 강탁·김희준·김의한 신부 등 3명의 사제를 배출하면서 러시아인 선교사와 교인이 간신히 명맥을 이어나갔고 1946년에는 교구도 개설했다. 하지만 1947년에 서품을 받은 한국인 김의한 신부가 한국전쟁 중 납북되어 처형되고 성당도 파괴되고 말았다.


 교회의 핵이 되어야 할 성직자의 부재로 인해 맥이 끊어질 위기에 처했던 한국 정교회는 한국전쟁 당시 그리스군의 종군 신부로 입국했던 안드레아스 할키오플로스 신부가 선교에 힘쓰고 한국인 문이춘 신부가 일본에서 신부 서품을 받도록 도와주면서 점점 교세가 확장되었다. 참전한 그리스 병사들이 월급에서 1달러씩 갹출하여 성당 재건 기금으로 보태기도 했다. 현재 성당에 걸려 있는 종 5개 중 2개는 러시아 정교회 시절부터 남아있는 종이고 3개는 한국전쟁 후에 제작한 것인데, 이 종 제작에도 그리스 참전군인들의 성금이 들어갔다고 한다.


 이로 인해 한동안 괴멸 상태나 마찬가지였던 한국정교회의 소속은 러시아 정교회 관할에서 그리스 정교회로 넘어갔고, 1956년부터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구 소속의 그리스 정교회 관할로 들어가 지금에 이르렀다.


 규모가 작은 한국 정교회는 한동안 다른 나라 정교회의 교구에 속했다. 1956년에서 1970년까지는 미국 대주교구, 1970년부터 2004년까지는 뉴질랜드 대주교구 소속[13]으로 뉴질랜드를 거쳐야만 콘스탄티노플과 소통할 수 있었다. 하지만 교회 규모의 확대를 인정받아 2004년 6월 20일부로 총대주교좌 소속의 독립 대주교구가 되어 콘스탄티노플과 직접 오갈 수 있게 되었다.


 2010년 현재 그리스 출신의 암브로시오스 아리스토텔리스 조그라포스 대주교가 제2대 한국교구 대주교로 재임하고 있으며, 초대 교구장인 소티리오스 트람바스 대주교는 첫 그리스 출신 주임사제로서 1975년 12월 1일부터 2008년 7월 20일까지 30여 년 이상 한국에서 성직자로 재임하였다. 한국에서 선박 제작 주문을 많이 한 그리스인들이 한국에서 선박을 만들고 인양식을 할때는 그리스 정교 사제가 축복을 해주는데, 특히 돈이 많은 그리스 부자들은 아무래도 체면상 한국에서 모실 수 있는 최고위 사제이신 트람바스 대주교를 많이 모셔와서 배에 축복을 내렸다. 조선소 근처에서 살았거나 근무한 사람들이라면 볼 기회가 있었을 수 있는데, 검은 수단을 입고 검은 길다란 사각형 모자에 나무 구슬로 이루어진 목걸이를 착용한 백인 노인이 이상한 나뭇가지에 물을 적셔 새로 제작된 배에 뿌리면서, 저울 같은 것에 향을 태우는 걸 봤다면 트람바스 대주교였을 가능성이 높다.


 현재 한국 내의 신자 수는 대략 2~3천명 (최대 4천명 예상) 정도이며, 한국 정교회의 중앙성당인 성 니콜라스 성당은 서울 마포구 아현동에 소재한다. 주로 재한 러시아인을 비롯한 동구권 신자들이 많이 미사를 드리고 있다. 이 성당은 돔 양식으로 건축되어 있으며, 그리스 정부에서 건물을 지어주었다. 한국 정교회 대교구 다만 이 건물이 지어진 부지를 과거 러시아 정교회가 있던 바로 그 자리를 팔아서 마련한 돈으로 구입했던 탓에, 한러수교 이후 러시아 정교회 측에서 자기들 거니 돌려달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물론 들어줄 리가 없는 소원이라 할 수 없이 한국 주재 러시아인들은 러시아 정교회가 아닌 그리스 정교회 예배에 나가고 있다. 한국 정부에다가도 옛 부지에 대한 보상 요구를 한 모양인데 한국 정부가 들어줄 기미는 없는 듯하다.


 러시아 정교회 측에서 다시 한국에 관심을 보이는 듯, 한국러시아정교회라는 정교회가 생겼다! 말 그대로 러시아 정교회 교구 현재 강원도 삼척에 성안나 성당이라는 성당이 하나 있다. 하지만 이는 한국 내 정교회 신자들에게 전혀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이와 별도로 한국 내 러시아인들을 위한 고려인 신부가 파견된 상태이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러시아 정교회 교구에서 러시아정교와 해외러시아정교를 구분하는 것인데, 전자는 러시아 본토의 정교회이고 후자는 소비에트 당시 공산정권에 협력하던 정교회에 반발해 몇몇 주교들과 신부들이 미국으로 망명해 세운 교구이다. 이 두 교구는 현재 통합되었으나 운영은 따로 하고 있다. 한국러시아정교회는 해외러시아정교 소속이다.


 바르톨로메오스 세계 총대주교가 2005년에 방한, 직접 정교회 한국대교구 총대주교청 관할 50주년 기념 대영광식을 집례하기도 했다. 1995년과 2000년에도 방한한 적이 있으며 2005년에는 환갑을 맞이한 바르톨로메오스 총대주교는 그리스계 터키인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감독 출신이다. 정확한 칭호는 새 로마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대주교 및 세계 총대주교 바르톨로메오스 1세 성하로서, 터키에서는 '이스탄불의 그리스 정교회 총대주교 바르톨로메오스 1세'로만 인정한다.


 북한 지역은 엄밀히 말하면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구와 모스크바 총대주교구가 미묘하게 겹친다. 우선 콘스탄티노폴리스 측 정교회 한국대교구의 관할권은 대한민국 전체가 정식이다. 그러나 평양에 세워진 최초의 정교회 성당인 '성 삼위일체 성당', 일명 정백사원은 모스크바 총대주교구에서 세워준 성당이므로 사실상 북한 지역은 모스크바 총대주교구가 관할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아무래도 정치적으로 그나마 가까운 나라이기 때문에 가능한 점으로 보인다. 더군다나 같은 보편교회이자 북한선교로는 훨씬 오래되고 융성했던 가톨릭이 사제조차 없어서 공소예절로 겨우 버티는 와중에 이쪽은 신부가 한 명도 아니고 둘, 그것도 북한인 신부로 상주하면서 성사를 집전한다. 역시나 러시아와의 교류가 그래도 많다는 점에서 기인한 듯, 국가차원에서 조직한 '조선정교위원회'라는 신자 단체가 존재한다. 조선그리스도교연맹, 조선가톨릭교연맹과 비슷한 집단이지만, 진짜 북한인 신자 수는... 아무도 모를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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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동방 정교회'라고 불리지만 그냥 '정교회'라고 해야 옳다. 동방 정교회라는 호칭은 서로마 지역에 있던 교회, 즉 로마 가톨릭에 대응한 호칭일 뿐이다. 정교회를 그리스 정교회니 러시아 정교회니 하기도 하는데, 이는 한국 천주교라는 종교가 따로 있지 않는 것처럼 해당 정교회가 속한 교구명을 붙인 호칭일 뿐으로 독립된 분파가 아니다. 예를 들어 '불가리아에 있는 그리스 정교회' 같은 말이 나오는데 역시 있을 수 없는 말. 마찬가지로 정교회의 한국교구는 한국 정교회라고 부른다. 한국 그리스 정교회 이렇게 부르지 않는다.


 다만, 정교회란 정확히는 각 지역들의 독립된 교회들을 세계만민의 하나된 공동체로 묶어둔 것이며, 따라서 개별 교회들이 있다. 이런 구조를 Autocephaly라 한다. 그리스 정교회나 러시아 정교회처럼, 총대주교구별로 교회가 분리되어있으며, 이 모든 교회들을 묶은 Ecumenical Church가 바로 정교회다. 모든 교회들의 총대주교인 Ecumenical Patriarch 를 통해 이 독립 교회들이 묶여있는 것이다. 각 교회들은 기본적으로 스스로 교회를 꾸려나가야한다.


 따라서, 대부분의 정교회들은 그냥 Ecumenical Church라고 하지만, 개별 정교회에 소속된 신도들을 위해 해외에 설립된 교회의 경우에는 지역명을 정교회 앞에 붙여서 표현하기도 한다. 주로 이민자들이 중심이 된 미국의 정교회들이 이렇게 하는 경우가 많다. 그 이유는 미국의 정교회의 경우 이민자들의 출신 지역의 정교회에서 파견된 선교사들에 의해 설립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각각의 독립 교회들과 총대주교구들은 신앙의 큰 틀에서는 같지만 전례나 의식 등에서 다소의 차이를 보이기 때문에[15], 각각의 독립 교회들의 해외 신자들을 위한 교회를 설립하게 되어 이러한 형식이 된 것이다. 위의 한국 러시아 정교회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미국에 지어진 교회들도 그냥 Ecumenical Church라고 하고 딱히 독립 교회 이름을 안 붙이는 일도 많다. 이게 더 에큐메니컬하기도 하다.(...)


 한국은 각 이민자들의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지 않아, 외국인 신자들과 한국인 신자들이 모두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으며, 오리엔탈 정교회 신자들이 일부 참석하기도 한다. 이 중에는 에티오피아인들도 가끔 있었으며, 콥트 기독교인들도 있었으나 신촌에 새로이 그들의 성당을 만든 이후엔 나오지 않게 되었다. 또한 조금은 여러가지 면에서 다른 모습을 보이는[16][17] 러시아 교인들을 위해 모스크바 총대주교청에서 고려인 신부를 파견하여 러시아어 전례를 실시하기도 했었다. 이 신부가 2011년까지 봉직하다가 러시아의 투바 공화국의 주교로 서품되어 한국 정교회를 떠난 이후, 러시아인들을 위한 성직자는 공석이었다가 우크라이나인 신부가 파견되어 이르고 있다.


 한국러시아정교회는 해외러시아정교회 소속인데 이 해외러시아정교회의 위치가 다른 교회들과의 관계 속에서 꽤 애매하게 처리되었기 때문에 사실 보편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공동체였다. 다만 해외러시아정교회와 본토러시아정교회의 통합이 이뤄졌기 때문에 향후 이 공동체에 대한 위치는 변동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의 정교회에서는 이른바 '살아있는 교회'라 일컬어진 본토 모스크바 총대주교청을 비록 공산당에 공식적으로 순종한다고 해도 적법한 공동체로 인정해주었다. 일단 남아있는 대다수 러시아인들을 위해 갖은 수난을 당하는 공동체라는 점을 높이 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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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톨릭과 달리 이슬람교의 공세에 직접적으로 노출되어 있었다. 물론 가톨릭 역시 이베리아 반도측으로 공격을 받았지만, 프랑크의 샤를마뉴 이후 공세가 적어진 반면 정교회측은 이슬람의 중심권 바로 옆이였기에 훨씬 엄청난 공세를 받았다. 그래서 이슬람교와 유대교의 영향을 받았는데, 그 중 하나가 성상파괴주의. 그러나 결국 이 성상파괴는 동로마 제국 내부의 교권과 황제권 투쟁에서 나온 것이고, 두 세력이 합의함에 따라 폐기되었다. 다만 성상파괴주의자들에 대한 양보로 정교회권에서는 성상 중 이콘만을 쓰도록 권장하고 있다. 따라서 지금은 기독교 정파 중에서도 가장 많이 이콘(성화)를 이용한다. 이콘은 아무렇게나 그려지는 게 아니라 내려오는 규범이 있다.


 위치가 위치인 만큼 이슬람교와의 사이가 매우 나쁘지만 가톨릭과의 접경지는 가톨릭하고 사이가 나쁜 편. 대표적인 예가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로서 제2차 세계대전 동안 크로아티아는 독일의 위세를 등에 업고 악랄하게 정교도를 잡았고, 세르비아는 보복으로 더 강하게 가톨릭을 공격했다. 독일이야 개신교 국가에 가깝지만 나치 독일은 종교적 성격이 기독교와 다르기에 아쉽게(?) 기독교 3종파전은 되지 못했다. 이 사이에 끼인 이슬람 교도들은 양측 모두에게 학살당했다(...).


 더불어 아랍권에선, 과거 십자군 전쟁 같이 전쟁 규모가 컸던 가톨릭이나 지금 가장 미워하는 나라인 미국하면 떠오를 개신교에 비하면 그나마 이미지가 나쁜 편은 아니다. 그러나 카프카즈 지방이나 체첸의 이슬람교 신자들은 정교회라면 치를 떤다. 이곳을 정복했던 러시아 제국의 국교가 정교회였고, 정복의 이유도 정교회를 퍼트리기 위함이라고 공식적으로 천명했기 때문에.



4. 오리엔탈 정교회


 Oriental Orthodox Church, Oriental Orthodoxy. 오리엔트 정교회 또는 동양 정교회라고 한다. 기독교의 한 분파로서, 에페수스 공의회, 칼케돈 공의회에서 결의된 교리를 거부한 서아시아, 이집트, 에티오피아의 전통 기독교 교회들이다.


 이에 속하는 교회로는 이집트의 "콥트 정교회", 시리아와 인도의 "시리아 정교회", 아르메니아의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 에티오피아의 "에티오피아 테와히도 정교회"등을 들 수 있다.


 오리엔탈 정교회라는 명칭때문에 동방정교회와 혼동할 수 있는데, 오리엔탈 정교회는 3차 공의회인 에페수스 공의회에서 결의된 교리까지만 인정하며 4차 칼케돈 공의회부터 결의된 교리를 거부한다. 흔히 아시리아 동방교회와 더불어 취급되나, 아시리아 동방교회의 네스토리우스파가 예수의 인성과 신성을 분리한 데에 비해서 오리엔트 정교회는 예수에게는 신성만이 존재한다고 천명한다. 오리엔탈 정교회 중 하나인 시리아 정교회, 단성론 교회로 불리는 것을 매우 싫어한다. 왜냐하면 단성론이라는 말 자체가 이들을 이단으로 규정하는 정통파 측의 입장에 가깝기 때문. 애초에 단성론이라는 낙인자체가 이들에게는 표현상의 문제나 다름이 없었다. 어떠한 표현방식이던 이들 역시 신성이 육화했으니 인성을 수용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때문에 단성론이라는 낙인자체를 싫어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 자세한 내용은 후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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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교회들은 451년 칼케돈 공의회에서 결의된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은 한 위격 안에서 나누이지도 섞이지도 않으면서 서로 간의 속성을 공유한다.'라는 교리를 거부하였다. 대신에 이들은 '육화하신 하나의 본성'이라는 키릴로스의 주장을 그대로 밀고나가 하나의 본성이 육신을 취해 두 개의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는 뭔가 조금 다른(?) 형식의 표현을 하였고 결국 그로인해 갈라서게 된 것이다. 이들은 키릴로스의 주장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였던만큼 키릴로스가 관광보내버린(...) 네스토리우스파와는 구분해야 하며, 실제로 오리엔탈 정교회에 속하는 많은 교회들은 비칼케돈파이면서 동시에 네스토리우스의 양성론 역시 이단으로 취급한다.


 현재는 칼케돈파 교회(동방 정교회, 로마 가톨릭 교회, 개신교회)와 신학적 대화가 활발히 이루어져 칼케돈-비칼케돈 교회들 사이에서 많은 분야의 교류가 이뤄지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완벽한 성사교류가 이뤄지지는 않고 있으며 일부가 동방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 교회, 심지어 신교로 귀일하는 경우는 있다.


 이들 교회의 본고장은 아르메니아, 에티오피아를 제외하면 이슬람교가 거의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기 때문에 사회에서 소수자로 여겨지고 있다.


 다른 기독교 종파와 사이는 별로 좋지 않다. 이슬람의 발흥때는 정통파와 하도 사이가 나빠서 자진해서 항복했을 정도. 그러나 이후의 이슬람 통치는 전보다 오히려 상황이 나빴기에, 자기들이 자진해서 이슬람에 항복했음에도 불구하고 동로마 제국이 알렉산드리아를 잠시 탈환했을 때는 오히려 쌍수를 들고 환영하기도 했다. 십자군 전쟁 당시에는 처음엔 십자군을 해방자로 보았으나 이슬람 통치때나 마찬가지로 차별받았기 때문에 가톨릭과도 사이가 좋은 편은 아니다. 그러나 당시 남아있던 유일한 단성론 독립국 에티오피아는 십자군 전쟁 당시 십자군과 손잡고 북아프리카에서 이슬람군과 싸웠다.


 소수가 된 이슬람권 정교회들은 차별이나 여러 모로 어렵게 지내지만, 다른 기독교 종파의 접근을 더 싫어한다.


 그런데 서방 계열 선교사들은 아랍권에 기독교 형제라고 괜히 기대를 하고 왔다가 그들의 능멸어린 눈빛과 대접에 실망하기 일쑤이며, 원리주의적인 선교사들은 이단이라서 이슬람이나 마찬가지로 개종시켜야 한다는 주장이나 하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의 정교회 신도들은 온갖 탄압과 차별이란 배경 속에서 굳건히 정교회를 믿고 지내기에 (그리고 상당수는 이슬람으로 개종한 척 하고 몰래 정교회 기도나 세례를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개종하기에 무척 어렵다고 한다. 대다수 정교회에선 다른 다수 기독교 종파인 가톨릭이나 개신교에 대하여 이슬람보다 더 오래되었던 역사를 자부심을 가지기에 가톨릭이나 개신교를 나중에 생긴 종파가 괜히 유럽이나 미국 힘을 믿고 우쭐거린다고 비웃는 반응을 보인다.


 참고로 정교회 소수층이 있는 나라에선 다른 기독교 종파의 출입국을 금지하고 있는 것을 정교회 측도 찬성하고 있으며 정교회가 다수인 아르메니아에서도 정교회와 이슬람을 제외한 다른 기독교 종파 선교를 법으로 금지하고 있을 정도로 다른 기독교 종파의 접근을 거부하고 있다.


 이슬람권의 차별을 견디지 못해서 미국같은 곳으로 이주하는 콥트교도들도 일부 있는데 이들은 자유로운 미국에서 이슬람에 대해 극단적인 증오를 드러내고 있고 이들에 의해 무슬림의 순진함이라는 반 이슬람 동영상이 제작된걸로 보인다. 그로인해 중동은 반미바람으로 불바다가 된 상황. 게다가 이들은 자신들의 존재를 숨기기 위해 제작자가 유태인이라고 거짓말까지 한걸로 보여 이 사실이 아랍권에 전해지면 정교회 신도들은 더 고난의 가시밭길을 걸을걸로 보인다. 이건 뭐 팀킬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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콥트 정교회


 콥트 정교회는 "알렉산드리아와 전 아프리카의 총대주교"를 수장으로 하는 교회로 이 교회에서는 고대 이집트 교회가 가지고 있던 전통을 많이 지니고 있다. 이슬람의 전개 이전까지는 단성론 계열 교회의 총본산이었으며[1] 현재도 이집트 인구의 5~10%가 믿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 교회에서 사용하는 콥트어는 고대 이집트어를 연구하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콥트 정교회 역시 그리스 정교회의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처럼 '교황'이라는 직함을 사용하며, 알렉산드리아 전례 문화를 바탕으로 독자적인 콥트어 전례를 사용한다. 이집트에서 차별을 엄청 받기로 유명하다. 직업도 제대로 가지지 못하여 상당수가 쓰레기 마을에서 살면서 쓰레기 재활용품 수거일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무슬림의 순진함 영화 덕분에 더 고난이 커질 듯.


재밌는 사실은 2012년 새로이 착좌한 콥트 교회의 교황 이름이 '타와드로스 2세' 즉, 그리스식으로 명명하면 '테오도로스 2세'인데, 현재 정교회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의 이름 역시 '테오도로스 2세'이다. 각기 역사적 이유로 갈라져 동일하게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좌를 잇는다고 하는 양 교회 수장이 모두 같은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미 착좌해 있던 정교회 테오도로스 2세도 타와드로스 2세에게 보내는 축전에 '이름이 같은 우리 두 사람이 같이 잘해보자'하는 식으로 축전을 보내기까지했다.


시리아 정교회


 시리아 정교회는 "안티오키아와 전 중근동의 총대주교"를 수장으로 하는 교회[2]로 이 교회에서 단성론 신학을 크게 발전시킨 사제 "야코부스 바라데스"의 이름을 따서 흔히 "야코부스 교회(Jacobite Church)"라고 불렸다. 그러나 현재 시리아 정교회에서는 이 명칭으로 불리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으며 자신들을 "Syrian(Syriac) Orthodox"라고 불리길 원한다. 이곳의 총대주교는 1445년 이래로 모든 총대주교들의 이름이 '이그나티우스'로 통일되어 있으며, 다만 '이그나티우스'외에 자신의 부가명칭에 따라서 총대주교를 구분한다.[3] 예를들면 현 총대주교의 이름인 '이그나티우스 자카 1세'도 '자카'라는 명칭으로 '~세'를 구분하는 것이다. 선임 총대주교 중 '이그나티우스'를 공경하는 의미에서 만들어진 전통이며 마치 베네딕토회의 아빠스나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같은 고유명사화가 된 이름이다. 안티오키아 전례에서 유래한 서 시리아 전례를 사용하고 있다. 


 또한 사도 토마스 이래 뿌리를 내려 온 인도의 기독교 교회들 중 가장 오래된 집단들도 시리아 정교회 계열로 분류된다. 아르메니아 학살이나 쿠르드족 학살 못지않게 1915년 이후로 오스만 제국에서 살아가던 시리아 정교도들도 학살을 꽤 당했다고 하지만 아르메니아인들과 달리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시리아에서 이슬람과 다른 기독교에게 탄압받아왔으나 프랑스가 시리아를 지배하던 20세기 초엽에 이슬람 소수파인 알라위테와 더불어 기득권을 누렸고 아사드 일가의 세속 정책으로 많은 특혜를 받아왔다. 시리아 민주화 운동때도 정교도들이 민병대를 조직하여 아사드 정권을 도울 정도인데 항목을 참조하면 이들이 인권침해가 많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로서 필사적인 게 아사드 정권이 무너지면 시리아에서 자신들에게 재앙이 들이닥친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한편 남인도 케랄라, 고아 지역에 자생하던 사도 토마스로부터 기독교 신앙을 전래받았다고하는 인도 전통 기독교도 이 시리아 정교회로부터 교회문화를 수용받고 통치, 감독과 교류를 해오고있다. 독특한 말라얄람어를 전례어로 사용하는데 전례음악 등 부분에서는 특유의 인도틱한 분위기가 나오지만 어쨌든 제의에서부터 외적인 환경은 시리아 정교회와 동일하다.


에티오피아 테와히도 정교회


 에티오피아 정교회는 원래 이집트 콥트교회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구 휘하에 있던 교회였으나 후에 독립하여 현재 "에티오피아의 총대주교"가 수장으로 있다. "테와히도"라는 말은 "하나로 만들어진, 통일된"이라는 뜻의 게즈어로 그리스도의 본성이 하나라는 그들의 믿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말이다. 에티오피아 제국에서 국교로 신봉하였으며 에티오피아 황실과도 깊은 연관을 맺고 있었다. 공산주의 군부 쿠데타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에티오피아 전 인구의 절반 가까이가 에티오피아 정교회의 신도이며 독특한 그들만의 교회 문화와 이미 일상에서 사어가 된 게즈어를 보존하여 에티오피아 문화의 보고라고 할 수 있다.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


 아르메니아 사도교회는 70인 사도 중 성 타대오의 선교를 바탕으로 세워진 교회이며, 313년 최초로 국교 지위를 받아 아르메니아의 국가교회로써의 위상을 가지게 된다. 아르메니아 지역의 전통 교회로 원래 터키 킬리기아 지역에서부터 현재 아르메니아 지역까지 넓은 교세를 지녔으나, 아르메니아가 여러차례 침략을 받는 과정에서 현재 아르메니아 지역에서 주로 신봉하고 있다. 아르메니아 외에도 콘스탄티노플 예루살렘, 레바논, 이란 등지에도 주교와 신도들이 있다. 아르메니아 사도교회는 6세기 드진 공의회에서 칼케돈 신조를 이단으로 규정하였다.


 이스파한같은 경우엔 이맘 마스지드를 비롯하여 시아파에게도 중요한 성지이지만 이렇게 정교회도 여럿 남아있는데 아르메니아와 우호적인 관계로 남게 된 것이라고 한다.여담으로 렘브란트가 그린 성화나 기네스북에 오른 세계에서 가장 작은 성경같은 것들이 바로 이 교회에 전시되어 있다.


 이 외에도 인도 공화국의 말랑카라 시리아 정교회, 에리트레아의 에리트레아 테와히도 정교회 등이 오리엔탈 정교회에 속한다.


이 교회들은 모두 완벽한 성사교류와 교회일치를 이루고 있는 하나의 지체(Communion)을 이루고 있어, 동방 정교회와 거의 비슷한 체제를 이루고 있다. '그리스도론'을 위시로 신앙의 일치를 이룬 네 개의 교회는 서로간의 활발한 교류가 벌어지고 있으며 교회 수장 착좌식에 서로 대표단을 파견하여 주교 서품 때 참석하기도 한다.


 


 지난번의 도쿄에서 전철타기에 이어, 이번에는 여러 상점에서 물건을 사는 방법에 대해서 조금 설명해 볼까 한다.

 물론 물건 사는 거라는게 간단하다면 간단하기도 하고, 굳이 이런 말이나 표현같은거 몰라도 대충 바디랭귀지로 때울 수도 있는 부분이긴 하지만, 그래도 기왕 사는거 좀 뭐라고 말하는건지 알고 사면 더 좋지 않겠는가. 



 1. 기본 - 잔돈 준비와 관리


 물건 들고 계산대로 간다. 점원이 얼마라고 얘기하면 그 돈 내고 거스름돈 받으면 된다. 끝. (...) 

 사실 물건 산다는게 세계 어디서나 크게 다를 바 없고,  주는돈 거스름돈에 문제가 없다면 사실 별로 말 주고받을 필요도 없기는 하지만... 일본의 경우 소비세가 티나게 붙기 때문에 대부분의 물건 가격이 한국처럼 몇천원, 몇백원으로 딱 떨어지는게 아니라 173엔, 514엔 이런식으로 그야말로 1엔 단위까지 전부 제각각이다. 깔끔하게 떨어지는 한국 물건 가격에 익숙한 한국인들은 매번 지폐로 계산하다가 넘쳐나는 잔돈을 주체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참사를 막으려면 잔돈으로 가격을 맞춰서 계산하는 버릇을 들여야 한다. 빠르게 물건을 사려면(특히 아침 출근시간대라든지) 계산대 가기 전에 미리 잔돈을 꺼내들고 있는 게 가장 좋긴 하지만, 그렇게 미리 준비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계산대에서 지갑 뒤적거려 잔돈 꺼내도 크게 상관은 없다. 다들 그렇게 하니까. 


 참고로, 이런 특성 때문에 일본의 지갑은 위 사진에서 보듯 동전용 주머니가 따로 잘 준비돼 있는 경우가 많다. 



2. 줄서기와 순서


 한국도 간혹 사람 많은 편의점 같은 곳에서는 줄서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계산대에서 오래 줄서서 기다리거나 하는 일은 별로 없고, 점원이 여러 명 있는 곳에서 계산 끝난 점원이 있으면 바로 그쪽으로 가도 사실 크게 상관없는 게 한국이다. 그러나 도쿄는 사람이 워낙 많고 줄 서야 하는 경우도 많아서 이런 순서에 굉장히 엄격해, 몇 명의 점원 중 한 명이 계산이 끝났다고 해도 바로 그쪽으로 가면 점원이 "죄송하지만 줄 서신 순서대로 기다려 주세요"라고 말하며 계산을 안해주는 경우가 종종 있다. 도쿄에서 물건 살 때는 그냥 얌전히 줄 서라는 곳에 서서 순서대로 기다리는 게 제일이다. 



3. 봉투


 편의점이나 작은 가게의 경우, 한국은 물건을 살 때 따로 말하지 않으면 봉투에 넣어주지 않는게 보통이지만 일본은 철저하게 봉투에 물건을 넣어주는 게 기본으로 돼 있다. 뿐만 아니라 따뜻하거나 렌지에 데운 음식(도시락, 오뎅, 호빵, 닭강정 등등)과 차가운 음식(아이스크림 등등)을 함께 살 경우, 각각 다른 봉투에 담아주는 것이 당연시 된다. 다만 온도차가 애매한 음식들의 경우 점원이 물어보기도 하니 이럴 때는 "같이 넣어주세요"(一緒で), 아니면 "따로 담아주세요"(別々で) 라고 말해주면 된다.



4. 포인트카드


 한국은 무슨 코스트코 이런데 아닌 이상에는 사실 일반적으로 물건 사면서 포인트카드를 열심히 주는데도 별로 없고 열심히 모으는 손님도 별로 없지만, 도쿄의 상점들은 정말 포인트 제도를 열심히 운영한다. 특히 큰 편의점이나 체인점들은 포인트를 공유하는 경우도 있고 회원정보도 함께 기록해 필수로 관리하는 곳도 있으므로, 싫든 좋든 한두개 이상의 포인트 카드는 사용하게 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T포인트 카드와 폰타 카드인데, 특히 T포인트는 실로 사용범위가 광범위하니 하나쯤 만들어 두는게 좋다. 패밀리마트, 츠타야, 도토루, 가스토 등의 주요 체인점이 T포인트 카드를 사용하며, 특히 츠타야에서는 회원증으로 사용하여 없으면 렌탈이 불가능하다. 한국 SKT의 T포인트와는 관계가 없다(...)


왼쪽 위가 가장 일반적인 T포인트 카드. 그 외에 T포인트 기능이 결합된 각종 신용카드도 존재.


가게에 이 마크가 보인다면 T포인트를 사용하거나 쌓을 수 있다는 뜻이다.




 폰타 카드는 비디오/게임/만화책 렌탈샵 게오의 회원증이며, 이외에 KFC, 로손, HMV 등에서도 사용된다. 


 사실 일본에는 포인트카드가 진짜 너무너무 많다. 위 두 종류는 워낙 메이저이고 사용되는 곳도 많으니 괜찮지만, 기타 잡다한 포인트카드는 사실 있으나 마나한 경우도 많으니 본인의 이용 빈도가 낮다면 안 만들어도 크게 상관은 없다. 이런 경우는 점원의 "포인트카드 가지고 계신가요(ポイントカードはお持ちでしょうか)?"라는 질문에 "괜찮습니다(大丈夫です)"라고 답하면 OK.



5. 식당


 커피숍이나 KFC 등 패스트푸드점의 경우, 보통은 주문할 때 가장 처음 묻는 것이 "가게 안에서 드실건가요(店内でお召し上がりですか)?"이다. 보통은 네라고 대답하면 되지만, 포장해가고 싶을 경우는 "가져갑니다(お持ち帰りです)"라고 대답하면 된다.

 마츠야, 가스토 등의 간단한 식당 체인을 비롯해 작은 밥집들은 식권 자판기를 운용하고 있는 곳이 많은데, 요리의 이름을 잘 몰라도 사진 등으로 보고 판단하기 좋으므로 외국인이 사먹기에는 좀 더 편하다. 다만 일단 식권을 뽑으면 바로 주방에 주문이 들어가고 요리를 만들기 때문에, 식권을 뽑은 뒤에 주문 취소는 원칙적으로 안된다. 주의하자. 

 요시노야 같은 곳은 대개 앉아서 밥먹는 곳의 메뉴와 테이크아웃 메뉴가 완전히 따로 분리돼 있고, 주문받는 장소도 다르다(테이크아웃 전용 계산대가 따로 준비돼 있고 주문도 거기에서 받는다). 모르고 일반 계산대에서 포장해 가려고 하면 다들 이상하게 쳐다보는 사태가 벌어지니(...), 요시노야 같은 곳에서는 테이크아웃 계산대부터 먼저 확인하자.



6. 기타 유용한 표현


 - 전시품을 보고 맘에 들었을 때 전시된 물건 대신 새것을 달라고 할 때 : これ新品はありますか?(신품 = 신삔이라고 읽음)
 - 품절인가요? : 売り切れですか?(품절 = 우리키레라고 읽음)

 - 이거 재고 있나요? : 在庫ありますか?(재고 = 자이코라고 읽음)


 도쿄에 와서 산 지도 어언 1년이 넘었다. 오늘은 한국인으로써 복잡하기 그지없는 도쿄 전철을 이용하는 데 있어 나름대로 얻은 노하우들을 정리해 보려고 한다.



1. 도쿄 전철의 특징


 - 가장 큰 특징은 서울처럼 모든 노선이 모든 역에 정차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라인이라도 열차의 종류가 다르다는 점이다. 대략 다음과 같은 종류의 열차가 있다. (정확한 분류는 다음 항목을 참조: http://bit.ly/1aiM5Ml)



  * 각역정차(各駅停車:카쿠에키테이샤) : 영어 표기로는 Local. 보통 줄여서 위 사진처럼 각정(各停)이라고 표기하기도 한다. 가장 일반적인 열차로서 모든 역에 전부 정차하기 때문에 각역이라 불린다. 다만 그만큼 운행속도가 느리고, 역에 들어가기 전이나 역에 멈춘 뒤에 다른 빠른 열차의 운행을 위해 정차한 채로 몇 분씩 기다리기도 한다. 출근 등 빨리 가야할 경우에 잘못 타면 낭패를 볼 수도 있으니 주의하자.



  * 특급(特急:토큐우), 급행(急行:큐코) : 영어 표기로는 Express. 빨리 가는 열차. 이용객 수가 적은 역은 정차하지 않고 그냥 지나가 버린다. 어떤 역에 서고 어떤 역을 지나치는지는 각 라인에 따라 천차만별이니 열차가 들어올 때 역사의 전광판이나 열차 내의 안내 전광판을 잘 확인해야 한다. 워낙 일본 전철이 종류가 다양한데다 날씨 등 외부 영향에 따라 운행 상황이 변동되는 경우가 많으므로 전광판을 항상 확인해야 하는 것은 도쿄 전철 이용의 기본. 



   * 쾌속(快速:카이소쿠) : 영어 표기로는 Rapid. 각역 열차 중에서 특정 시간대의 이용객이 적다거나, 특정 역의 이용객이 적어서 일부 역에 정차하지 않는 열차를 일반적으로 쾌속이라 부른다. 도쿄의 전철이 워낙 종류도 다양하고 사업자도 많아 실로 복잡다양한 이름의 파생형태가 있다. (예: 일반 쾌속보다 정차역이 많은 구간쾌속/B쾌속/준쾌속, 쾌속보다 정차역이 많은 특별쾌속, 신쾌속, 출근시간대에만 운행하는 통근쾌속/직통쾌속, 휴일에만 운행하는 홀리데이 쾌속 등등등)



   * 준특급(準特急:준토큐우) : 영어 표기로는 Semi Express. 두 글자만 표기되는게 보통인 열차 전광판에는 준급(準急:준큐우)으로 표기되는게 보통. 급행이나 쾌속보다 좀 더 정차역이 많은 열차. 


 이외에도 다양한 파생형태들이 있으나 여기서는 대충 생략.


 - 2013년 기준으로도 대부분의 노선이 지상노선이기 때문에 날씨 및 천재지변에 취약하다. 전기로 움직이는 교통수단이기 때문에 악천후시 선로에 낙뢰가 떨어질 확률이 높고, 다량의 비/눈, 지진, 태풍 등에도 큰 영향을 받는다. 또한 스크린 도어가 설치된 역이 매우 적고, 이용 인구에 비해 플랫폼 면적도 좁아 선로에 사람이 떨어지거나 열차에 부딪치는 사고(인신사고 = 人身事故, 진신지코)가 빈발한다. 


안그래도 사람 미어터지는 도쿄 전철인데 플랫폼이 좁디좁다. 

계단이나 엘리베이터 근처는 사람 한명 겨우 걸어 다닐 정도의 공간밖에 없는 경우도 다반사. 

이런 주제에 스크린도어조차 없으니 사고가 안 나는게 이상할 것이다.


퇴근시간 신주쿠역의 사이쿄선 플랫폼에선 정말로 생명의 위협을 느낄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사고가 일어날 경우 사고 자체만이 문제가 아니라 열차의 운행이 상당시간 지연된다는 점이다(이러한 열차 운행 지연을 조정(お見合わせ, 오미아와세)라고 한다). 



인신사고 발생...


운전을 조정 중입니다... 이 안내가 뜨면 대략 낭패.


 대부분의 역에서는 문제가 발생해 운행지연이 생길 경우 역사 안내소에서 목적지를 물어본 뒤 확인권을 끊어주며, 이 확인권을 보여주면 다른 버스나 전철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요것이 확인권.


 다만 도쿄의 지역 넓이에 비해 시민의 이동 수단이 전철에 편중되어 발달된 경향이 매우 강하고(광역버스 등이 그다지 발달돼 있지 않다) 택시는 이용 요금이 매우 비싸기 때문에, 대체 교통수단이라고 해도 사실 크게 도움은 안 되는 경우가 많다. 여름/겨울의 태풍/폭설 등 악천후나 인신사고로 인해 직장인들이 출퇴근에 지장을 받는 일이 매우 많다.


 - 일본 특유의 규칙이나 룰을 중시하고 남의 것을 건드리지 않으려는 문화 덕분에 도쿄의 전철 시스템 역시 많은 부분에 문제가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역사 건물의 증/개축이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으로, 어떻게든 기존의 것을 최대한 부수지 않으려고 한다. 이것은 옛 것을 그대로 보존하여 역사적인 가치를 존중한다는 측면에서는 좋은 것이지만, 그러다 보니 증축을 할 때에도 무리하게 덧붙이고 억지로 이어붙이는 것을 반복하게 되어, 하루에도 수백만 명이 이용하는 신주쿠 역 같은 경우는 그야말로 지하 던전이 따로 없을 정도의 복잡한 구조가 되어 있다. (참고: http://bit.ly/16AKboS)


처음 보는 사람은 입이 벌어지는 신주쿠 역의 구조도. 이것도 사실 전부 다 나온게 아니다. 


 한국이라면 전부 때려부수고 처음부터 사람들이 오고가기 편리하게 싹 새로 짓겠지만, 그런 과감한 증/개축을 안(못)한다. 주변 건물이나 상가 등의 권리를 건드릴 수 없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보통이지만... 이 때문에 시민들이 겪는 불편함은 상상을 초월한다. 한국의 스트레이트한 구조의 전철역에 익숙해 있는 한국인이라면 처음 도쿄의 전철역을 이용해 보면 불편함이 이만저만이 아니지만, 어쩌랴. 익숙해질 수 밖에... 특히 골아픈 것이 환승인데, 한국처럼 알아서 환승하는 것이 아니라 일단 하나의 노선에서 개찰구로 나간 뒤 다른 개찰구를 통해 다른 노선으로 들어가는 것이 기본이다. 이것을 연락(連絡)이라고 하며, 환승하는 출구를 연락출구(連絡口)라고 한다. 


이것이 연락출구


 처음 도쿄의 전철을 이용하면 그냥 출구인 줄 알고 연락출구로 나가거나, 환승해야 하는데 그냥 출구로 나가버려 다시 요금 내고 들어와야 하는 실수를 하는 경우가 많다. "연락"이라는 글씨가 보이면 주의하자.


 이동 동선의 문제 이외에도 가장 곤란한 점은 역사 자체 출구의 파악이 어렵다는 것이다. 어디로 나가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서울 전철역처럼 교차로 기준으로 출구가 설계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번호로 출구를 일괄적으로 표기하는 것이 아니라 "남쪽출구", "중앙출구" 하는 식으로 두루뭉술하게 표기되어 있어 알기가 더욱 어렵다. (참고 : http://bit.ly/1aiM5Ml) 

 물론 모든 역이 전부 신주쿠 수준의 난해함을 자랑하는 것은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일본 전철역과 출구는 한국 전철에 비해 매우 알기가 어렵고 직관적이지 않으니 정신 바짝 차리는 게 좋다. 


 - 서울의 전철과 비교해 매우 다른 점이, 같은 노선 하나에도 위에 적은 것과 같이 다양한 종류로 운행을 하기 때문에 실제로는 선로가 몇 개씩 배치되는 것이 보통이다. 이 때문에 뒤로 돌아가고 싶을 경우 꽤 멀리 이동해야 하는데, 이게 아주 고역이자 처음 도쿄 전철을 이용하는 한국인들을 애먹이는 경우가 많다. 



 잘못해서 역을 지나쳤을 경우 대부분의 서울 전철에서는 내려서 바로 반대편의 열차를 타면 뒤로 돌아갈 수 있다. 위 사진과 같이 왼쪽 선로에서 내렸으면 반대편, 즉 오른쪽 선로의 열차를 타면 간단하게 뒤로 돌아갈 수 있다. 한국인들에게는 지극히 당연한 풍경이자 익숙한 개념이다. 혹시 승강장이 분리된 역이라 하더라도, 계단 하나 올라갔다 내려오면 바로 반대 선로로 갈 수 있다. 그러나 도쿄 전철에서는 역을 지나쳐 버려, 역 하나 되돌아가고 싶을 때는 내려서 바로 반대편 열차를 타면 안된다. 


요렇게 타면 뒤로 돌아가는게 아니다


 위 사진처럼 반대편에 있는 열차를 타면 십중팔구는 가던 방향으로 더 가는 열차를 타게 돼버린다. 더구나 앞서 설명한 것처럼 한 노선에도 다양한 종류가 있어서 급행이나 쾌속 같은 것을 잘못 타면 역 서너개를 더 가버리는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고, 같은 역에 정차하는 전혀 다른 노선의 열차를 타버려 완전 다른 방향으로 가버리는 경우도 생긴다. 시간이 급할 때 이런 열차를 잘못 타 버리면 시간은 시간대로 버리고 정신적으로 대미지도 엄청나게 입는다. 


 더 골아픈 건 갈아탈 때 들어오는 열차가 같은 노선임에도 불구하고 이 선로, 저 선로로 번갈아가며 들어오는 경우다(...). 분명히 같은 노선인데 홈에서 기다리는데도 열차가 안내된 시각에 들어오지 않아 어떻게 된건가 하고 봤더니 다른 선로로 들어오고 있었다. 도쿄 전철역에서는 정말로 안내판을 주의깊게 봐야 이런 낭패를 당하지 않는다. 신주쿠 역의 쇼난신주쿠라인(湘南新宿ライン) 같은 것이 이런 대표적인 경우이다.


 - 열차 노선/종류에 따라 "XX량 편성"이라는 말로 열차 길이를 안내해준다. 문제는 이에 따라 승차 위치가 바뀌곤 한다는 점. 



 위 사진에서 보듯 같은 문에도 승차 위치가 열차 편성에 따라 달라진다. 가뜩이나 복잡한 러시 아워의 전철역에서 이걸 생각하지 않고 다른 승차위치에 서 있다간 줄 잘못 서고 한참 나중에 타거나 못 타는 경우도 생긴다. 보통은 그 전에 옆에 사람들 줄서는 거 보고 뒤로 가게 되지만(...) 하여간 도쿄 전철에서는 안내 전광판을 잘 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 전철을 탈 때에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일반 1회용 티켓(킷뿌きっぷ)을 끊거나, 교통카드인 Suica나 PASMO를 이용할 수 있다. 다만 요금이 대체로 한국보다 비싼 편이고, 토에이오에도선(都営大江戸線)같은 지하철은 일반 전철보다도 요금이 더 비싸므로 주의. 취업 등으로 오래도록 머물 사람이라면 정기권(定期券:테키켄)을 끊는 것이 좋다. 기본 1개월부터 끊을 수가 있고, 정기권에 설정된 구간 내에서라면 몇 번을 타도 상관없다. 



 Suica나 PASMO는 일반적인 충전식 교통카드이지만, 역사에 설치되어 있는 발권기에서 여기에 정기권 금액을 등록할 수가 있다. 왕복할 구간(출발역/도착역)을 지정하고 금액을 넣으면 카드의 표면에 위 사진처럼 설정된 구간과 금액, 유효기간이 인쇄된다. 잘 지워지거나 묻어나는 재질의 잉크도 아닌데, 매번 정기권을 갱신할 때마다 싹 지워지고 새로 인쇄되는 것이 신기하다. 



역별로 조금씩 다르지만 발권기는 대체로 이런 형태.


보통 이런 화면으로 신규발급이나 갱신을 한다.


요렇게 금액을 넣고 충전한다. 신용카드를 이용해 충전하는 것도 가능(!). 

정기권의 경우 거리에 따라 금액이 1엔 단위까지 설정되곤 하는데, 

1엔 단위의 잔돈 투입이나 거스름돈 반환도 완벽한 어이없는 기계다.


이러한 교통카드의 발급/충전, 정기권의 발급/갱신 외에도 영수증의 발급이나 이용 내역의 인쇄도 가능하다(!)



 언제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얼마만큼의 금액을 이용했고 언제 충전했고 하는 내역이 다 나온다. 어떻게 보면 좀 무섭다... 물론 일본은 워낙 교통비가 비싸서 회사에서 교통비를 지원해 주는 경우가 많으므로, 교통비를 지원받기 위한 근거 내역으로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최근에는 도쿄의 연계버스에서도 Suica나 PASMO를 지원하고 있어서, 카드 한 장으로 대부분의 교통수단을 이용할 수 있게 되어 편리해졌다. 특정 신용카드에 Suica나 PASMO의 기능을 결합한 것도 나오고 있어, 전체적으로는 서울 교통수단과 비교해서 크게 불편하진 않게 되었다. 다만 서울처럼 전철-버스간 30분 내 환승할인 같은 혜택은 없다(...).



2. 실제 이용시 팁


 - 위에 쓴 것처럼 도쿄의 전철은 서울과 비교도 안되는 복잡성을 자랑하기 때문에, 모든 역과 노선을 한번에 보여주는 노선도란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할 수도 없다. 이 때문에 전철을 이용할 때 가장 편리한 방법은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을 이용하는 것이다. 물론 많은 앱이 존재하지만 대부분의 도쿄 사람들이 가장 애용하는 앱은 단연 이것이다. 


換乗案内(환승안내)

무료 애플리케이션이며, iOS/안드로이드판 모두 존재한다.


 기본적인 구조는 위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듯, 출발역과 도착역명을 입력하면 최단 환승절차를 알려주는 방식이다. 물론 최소요금/최단시간 등으로 루트를 다르게 뽑을 수도 있고, 몇시까지 도착/몇시에 출발하는 루트나 첫차/막차 등도 안내된다. 2013년에 업데이트되면서 역 이름의 히라가나 표기가 추가되어 좀 더 외국인들이 알기 쉬워졌고, 환승시 몇번 선로를 이용하는가에 대한 안내도 추가되어 좀 더 이용이 편리해졌다. 회원등록시 안내된 루트의 바로 전/다음 열차 안내도 볼 수 있다.


 다만 서울 지하철 노선도 앱들처럼 한번에 모든 노선을 다 보여주는 직관적 방식이 아닌지라 바로 한눈에 알기 어려운 점은 어쩔 수 없고, 갑자기 일어난 인신사고나 운행조정에는 바로 대응하지 못하는 등 한계도 있다. 근접한 역이라 환승이 가능할 경우 '도보 몇분' 식으로 나오는데 이 경우 환승 부분에 역 이름이 2개 나와서 헷갈리는 경우가 있으니 주의할 필요가 있다. 어쨌든 복잡한 도쿄 전철을 이용하는 데에 가장 좋은 수단임엔 틀림없다. 


 1) 이 앱으로 일단 환승 시간을 확인한 뒤

 2) 역 내의 전광판을 보고 해당 시간의 열차가 몇번 홈에 들어오는지 확인하고

 3) 해당 열차를 탄다


 이것이 도쿄 전철을 타고 이동하는 데에 가장 정확하고 빠른 방법이다.


 - 정기권이나 교통신용카드가 아닌 경우 교통카드의 잔액이 모자랄 때에는 대개 개찰구 내에도 발권기나 정산기가 마련돼 있고 여기에 카드를 넣으면 모자란 금액이 표시된다. 잔액이 모자랄 경우는 당황하지 말고 주변에 발권기나 정산기가 있는지 찾아보자. 역에 따라서는 간혹 없는 곳도 있으므로 이럴때는 개찰 한쪽 구석에 있는 역무원에게 카드를 주고 "정산해주세요(精算お願いします)"라고 말하면 알아서 얼마 더 내라고 말해준다. 


요렇게 들어갑시다


참고로, 밖에서 역무원에게 이야기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이렇게 문을 열고(!) 직접 상담해 주기도 한다.

처음 봤을 때엔 어이가 없던 장면...


 - 도쿄의 전철은 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조용하며, 서울처럼 전철 내에서 전화 통화를 하는 것은 매우 몰상식한 행위에 속한다. 전철 내에서 뭔가 연락할 필요가 있다면 메시지로 연락하는 것이 기본. 또한 노약자 우선석 근처에서는 휴대폰을 끄는 것이 원칙으로 되어있다(페이스메이커 등을 사용하는 환자를 배려한 것인 듯). 일본인들도 사실 잘 안 지키는 부분이긴 하지만 간혹 꼬장꼬장한 노인들의 경우는 우선석 근처에서 휴대폰 만지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괜히 해코지하는 경우도 있으므로 조심하자. 


 - 한국처럼 절대적으로 노약자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는 분위기는 별로 없으며, 젊은이들도 노약자석에 곧잘 앉아서 가곤 한다. 한국인으로서는 꽤 마음 편한 부분일 듯. 다만 역시나 꼬장꼬장한 노인들에게 잘못 걸리면 짜증나게 되는 경우도 있으니 적당하게 알아서 양보하자.


 - 전철역에 화장실이 없는 경우도 종종 있고, 있다 하더라도 역의 크기나 복잡성에 비해 화장실이 적거나 찾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가장 단적인 예가 신주쿠 역. 그 거대한 역 전체에서 화장실 찾기가 손에 꼽을 정도. 큰 전철 역이 있다면 화장실의 위치는 숙지해 두는 것이 좋다. 


 - 도쿄의 경우 이용객이 워낙 많은데다 열차 자체의 폭도 좁아 러시아워 시간에는 한번 타면 한국 전철처럼 열차 안에서 이동해다니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 이 때문에 전철 타고 가면서 사람 만나는게 까다롭다. 한국이라면 승강장에서 기다리게 한 뒤 전화걸어서 "지금 들어오는 열차 타라"라고 말하면 그만이지만, 일본은 전철 내에서 전화통화도 무리이고, 휴대폰이 안터지는 구간도 종종 있는데다 위에 써놓은 것처럼 승차 위치도 열차에 따라 다른지라 참 골아프다. 웬만하면 열차 타고 가면서 사람 만나기보다는 그냥 밖에서 만나는게 정신건강상 이롭다.



 일단 이정도... 생각나면 나중에 더 추가하겠음.













* 프레시안의 무토 이시요우 인터뷰 및 전후 일본의 좌파 운동의 역사에 대한 간략한 정리 :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10111204014040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10111220033007



* 중핵파(정식 명칭 : 혁명적 공산주의자 동맹 전국위원회)란 :


 http://ja.wikipedia.org/wiki/%E4%B8%AD%E6%A0%B8%E6%B4%BE



* 야마모토 타로 당선을 비판하는 일본의 미디어 


 1. 야마모토 타로는 중핵파로부터 지원받고 있는 과격성향의 후보이다 : http://agora-web.jp/archives/1548447.html

 2. 야마모토 타로의 과거 행적을 여러 각도에서 흠집내기 및 비판. 과거 TV프로그램에서 "마약 하고 있다"라는 발언을 했다라든가, "독도는 한국에 줘버리는게 좋다"라고 했다라든가... "해외 로케에는 반드시 피임약을 가져간다" 같은 별 시답잖은 발언까지 가지고 와서 깎아내리는 중. 그린피스를 지원하는 활동을 한 것도 비난하고 있는 중 : http://matome.naver.jp/odai/2137329386914464801?&page=%3Cfont%3E%3Cfont%3E2%3C/font%3E%3C/font%3E

 3. 야마모토 타로의 반 원전 발언을 전부 거짓으로 몰아감 : http://matome.naver.jp/odai/2137395623585939401

 4. 야마모토 타로의 당선은 유감스럽다 라는 논평. "야마모토를 이용하여 중핵파나 북한 관련 단체가 활동할 가능성이 있다" : http://agora-web.jp/archives/1549142.html



* 야마모토 타로에 대해 일각에서 말하고 있는 데맛타(デマッター)란 :


 1. 데마고기 : 원래는 독일어(Demagogie). 영어로는 demagogy. "정치적 효과를 노려 의도적으로 거짓 정보나 악선전을 퍼뜨림", "근거나 확증이 없는 이야기, 유언비어"를 일컫는 말.

 2. 데마정보 : 근거없는 유언비어성 정보를 말함

 3. 데맛타 : 트위터 등에서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트위터러를 말함

 슬슬 일본에 온 지도 일주일. 처음 맞는 주말이 되었다. 가져간 가이드북을 보니, 주말에 요요기 공원에서 프리마켓 같은 것도 열려 꽤 재미있다고 하길래 카츠베씨와 함께 이번엔 요요기 공원으로.

 결론부터 말해 우에노 공원보다 이쪽이 백배 재미있다. 특히 일요일에는 일주일 내내 일에 찌들었던 도쿄의 젊은이들이 죄다 모여들어 온갖 볼거리를 가득 펼쳐 보여주므로 절대로 일요일에 가는 것을 추천한다. 



 공원에 들어가는 입구부터 범상치 않은 무리들이 출현. 거의 주말마다 출현하는 나름 유명한 인간들이라고 함 ㅋㅋㅋ

 사실 원래는 프리마켓 같은 벼룩시장을 보러 갔던 것이 제 1의 목표였지만, 약간 시간이 늦었는지 행사는 이미 끝난 뒤였다. 그나마도 그날 있었던 행사의 테마는 애완견용품(...). 늦지 않았어도 어차피 별로였겠구만 싶어 공원이나 돌아보기로 했지만... 정말 재미있는 것은 이때부터였다.


 웬 외국인들이 덤블링을 하고 있질 않나



 난타가 생각나는 막대기 퍼포먼스를 하는 애들이 있질 않나


 요상한 요요 비스무리한 걸 열심히 돌리는 애들도 있고


 부채춤 군무를 연습하는 애들에


봉고? 같은 퍼커션 세션을 연습하는 젊은이들에


 나이를 잊으시고 멋들어진 댄스 실력을 보여주시는 할아버지까지, 진짜 별 희한한 사람들로 가득했다.

 이런저런 사람들을 구경하며 노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다가,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걸 느끼고 슬슬 출구 쪽으로 향하기 시작. 그런데 또 뭔가 시끄러운 함성소리와 마이크 소리가 왁자지껄하게 들려오길래 뭔가 하고 슬쩍 가봤다.


 관객석으로 둘러싸인 농구 코트. 여기에서는 시간대별로 여러가지 이벤트가 벌어지는 것 같았다. 아까 우리가 들었던 건 힙합퍼들의 랩 퍼포먼스. 재미있겠다 싶었지만 아쉽게도 도착했을 때쯤엔 끝나고 다음 이벤트로 넘어가고 있었다.

 뭔가 했더니 그냥 단체 춤 ㅋㅋ

 다행히 이 단체 몸부림(...)은 금방 끝나고 다음으로는 농구 시합이 벌어졌다. 





 그런데 이 농구 시합이 재미있었던 게, 우선은 여자들의 경기였던 데다, DJ가 랩으로 경기 실황을 중계해주는 거였다. 경기 자체의 수준이야 그냥저냥인 수준일 수밖에 없었지만, 랩으로 중계를 하니 분위기가 상당히 신나는 것이 꽤나 재미있었다. 한국에서도 이런거 하면 좋을텐데 라는 생각을 해봤다.

 요요기 공원은 너무 재미있어서였는지 지금 보니까 거의 동영상만 있고 사진은 많지 않네... ㅋㅋ

 


 아메요코로 가기 위해 우에노 공원을 나서는 나.


 무슨 무에타이였나 킥복싱이었나 이종격투기였나... 암튼 그 써클 같은 곳에서 공원에 놀러온 사람들을 대상으로 시범쇼를 하고 있었다. 불쌍한 외국인이 걸려들어 맞을 준비를 하는 중(...). 나에게도 시합해보지 않겠냐는 권유가 왔지만 "괜찮슴다!"를 외치며 잽싸게 그 자리를 빠져나갔다 -_-;
 

 
 우에노 공원의 반대쪽 나가는 길. 지금 보니 분수를 많이 찍었었군...


 이곳이 아메요코의 입구. 정말 한국에서 자주 보는 재래시장 분위기와 매우 비슷한데 그러면서도 일본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분위기도 느껴져 참 재미있다. 우에노 공원의 재미없음을 여기서 보상 ㅠㅠ
 


 정말 신기했던 문어다리. 
 


 생선도 팔고...
 


  이런 화려한 티셔츠나 스카쟝도 판다.
 


 한참 돌아다니다가 발견한 생선덮밥집. 가격도 전체적으로 꽤나 괜찮은 편인데다
 


 500엔짜리 밥의 퀄리티가 이정도. 아주 맛있었다. 여긴 다음에 도쿄에 가면 또 가보고 싶은 곳 -ㅂ-



 배도 부르고 해서 적당히 거리를 걷기 시작. 그냥 거리가 아기자기해서 찍은 사진인데 지금 보이 저 흰 후드티 입은 친구는 꼭 하야미 모코미치 삘이네...


 고가도로 난간에 걸터앉아 있자니 해가 슬슬 지고 있었다.


 시타야 교회. 일본에서 교회를 본 건 처음이라 신기해서 찍어봄. 다음에 갈 때는 성당도 한번 찾아봐야지.


 길 한복판에도 도리이가...
 


 원래는 아사쿠사까지 가 볼 생각이었지만 우에노 공원에 이어 아메요코까지 돌아다닌 하루였는지라 슬슬 허리 다리가 아파오기 시작. 적당히 이쯤에서 집으로 돌아갔다.

 


 넷째날의 목적지는 우에노 공원과 아메요코. 일단은 우에노 역에서 내려 뚜벅뚜벅.


 우에노 공원은 워낙 도쿄 가는 사람들이라면 많이들 찾는 곳이니만큼 사람도 많고 찾기 쉬운 곳에 있지만 솔직히 말해 전체적으로 큰 임팩트는 없는 그야말로 그냥 "공원"이다. 게다가 오래되어서 시설이 낡고 초라한 부분도 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과천 서울대공원보다도 재미가 없는 편이었다. 나처럼 몇 주씩 머무르거나, 누군가와 데이트(!)할 일이 있는게 아니라면 도쿄 여행 코스에서는 과감히 빼도 될 듯.

 그래도 난 이미 갔다 와버렸으니 사진이라도 올려야지...
 

 입구 앞의 도로쪽 전경. 외국인 가족이 공원에 나들이를 나와 있었다.


 한국인 관광객 - 적어도 나에게 있어 일본의 공원이 재미없는 이유 중의 하나는 먹을거리가 많지 않다는 점이었다. 거의 타코야키나 야키소바 같은 아주 소박한 음식이 대부분이고 한국처럼 편의점 가득 패스트푸드점 득시글로도 모자라서 좌판아줌마들까지 잔뜩 진치고 있는 그런 먹거리들을 찾아볼 수가 없다. 음료수도 한국에서는 편의점이나 매점 냉장고 안에 온갖 음료수가 가득하지만 도쿄의 공원은 팩에 든 주스 몇 가지와 お茶, 물 정도가 전부다. 간혹 콜라를 컵에 담아서 파는 곳도 있지만 이런 곳도 많지 않고. 한국이 정말 먹을것은 풍부한 나라라는 점을 새삼 깨닫게 된다.


 내가 mixi를 비롯한 일본 웹에서 사용하는 닉네임이 Hibiki인데 입구에서 발견 ㅋㅋ




 4월이라 날씨가 좋아서 이런 풍경을 볼 수 있던 것은 좋았다.


 공원이 별거 없길래 공원 안에 있는 동물원도 들어가봤다. 사실 동물원도 별거 없었지만...



 취미: 늘어져있기 특기: 늘어져있기




 결국은 모노레일까지 타보는 나.



 무인열차는 아니고 나이 지긋하신 아저씨가 운전하신다. 딱 운전석 바로 뒤에 앉아서 달리는 모습 구경 ㅋㅋ


 사실 그나마 이 모노레일이 제일 재미있었는데 1분도 안돼서 끝나버린다 ㅠㅠ


 모노레일도 내려서 돌아다니다 보니 뭔가 퍼포먼스 같은 걸 하고 있었는데 나름 유쾌했다 ㅎㅎ


 흐드러지게 핀 꽃.


 여긴 꼭 서울숲 같기도...


 한적한 산책길.


 이미 말했다시피... 민속촌을 연상케 하는 먹거리 골목.


 작은 신사. 거기 외국인 커플! 신사 앞에서 무슨 짓들이냐!


 한국 사람들 여행기 보면 자주 등장하는 손 닦는 물. 나는 똑똑해서 마시지 않았습니다 ㄳ.


 뭔가 가득가득 붙어있다. 


 관광객답게 이런것도 한번 찍어주고...


 신사의 조금 옆에 있던 불상. 다 좋은데 저 빨간... 머플러?; 는...


 이런 길은 참 좋았다.


 지금 보니 참 많이도 걸었네...


 이때는 이 우에노 공원의 신사와 도리 같은 것도 오 나름 멋있네 라고 생각했지만... 나중에 카츠베씨가 구경시켜 준 신사에 비하면 그냥 흉내내기 수준일 뿐이었다.


 여긴 정확히 뭔지는 몰랐지만, 아마 일본식 정원? 혹은 절의 전시회 비슷한 뭐 그런 거였다. 오 그래도 볼만하겠군... 이러면서 들어가볼까 했지만 저 문을 지날 때 입장료를 내야 한다는 걸 알고 orz. 문 밖에서 사진 한방 찍고 미련없이 돌아선 나...

 우에노 공원에 총체적 실망을 하고 이어서 발걸음을 옮긴 곳은 아메요코. 사진 용량이 모자라 다음 글로 넘긴다.

 다행히 사흘째는 다시 날씨가 좋아졌다. 날씨에 민감해지는 걸 보면 확실히 나도 나이를 먹은게지...

 이 날은 저녁에 약속이 잡혀서, 낮에는 적당히 동네를 돌아다니며 산책하기로 했다.


 전의 그 동네 하천을 건너는 다리. 이름은 읽기가 어려웠지만.


 대략 이런 모양으로 가로지르는 다리였지만, 왼쪽의 정겨운 동네 쪽이 더 끌려서 그쪽으로 가보기로 했다.


 이 소아과 간판은 진짜... 내가 2010년의 일본에 와있는게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ㅡㅡ;


 한국과 참 다른 점 중의 하나는 집 주변이 정말 깔끔하다는 것. 작은 공간이라도 참 열심히 치운다. 물론 간혹 지저분한 집도 있긴 하지만 전반적으로 볼때 주택가가 참 깨끗하다.
 


 한국과 일본은 언뜻 무척 비슷해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집의 건축 형태나 이런 면에서 미묘한 다른 점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유리창에 달린 저 덧창 같은 것. 한국에서는 보기 어려운 형태다. 


 인상적이었던 어느 집의 현관. 야마모토라는 명패의 개성적인 글씨도 그렇지만, 돌로 깎은 도라에몽이라니... 집주인이 어떤 사람인지 한번 보고 싶었다.


 절대로 저런걸 돈 주고 일부러 사다가 장식해 놓은 건 아닐 것 같은 버섯 모양의 도자기 장식품. 아이들이 학교 숙제로 만든 작품이었을까?
 


 평범한 현관도 몇 개의 화분만으로 인상이 참 달라진다. 


 아마도 재활용품 수집함 같은 용도의 철제 구조물. 뉴 하이츠 미에라는 맨션? 혹은 빌라? 의 거주민 외에는 버리지 말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근데 참 희한한 건 그게 반말이라는 것. "~~이외에는 버리지 마!" 라고 쓰여 있다.


 카츠베 씨가 넷상에서 쓰는 닉네임이 JOG이다. 혹시 본인의 스쿠터 아니냐고 물었지만 아니라고(...)


 이름모를 꽃나무였지만 참 예뻤다.


 보통 한국사람들은 일본의 주택가라고 하면 비좁고 답답한 곳이 많다는 이미지를 떠올리며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적어도 이 동네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한국보다 오히려 더 넓고 한가로운 느낌.


 작은 문이나 우체통, 그리고 낮은 계단으로 올라가는 현관 등 여러가지로 너무 마음에 드는 예쁜 집. 솔직히 이뻐서 이집 저집 돌아다니며 사진 찍었는데 나중엔 이상한 사람 취급 받는 것 아닐까 걱정되기도...


 "스피드를 내지 마라! 애들이 뛰쳐나올 수 있으니 주의" 라고 쓰여있는 경찰서의 주의안내문. 근데 한번 더 말하지만 왜 이런게 반말이냐고... 우리나라 같으면 분명 사람들이 기분나빠 할 듯.


 "한순간의 방심으로 추억이" 어린이가 그린 듯한 불조심 포스터. 누구나 어릴때에 저런 포스터 한두번은 그려본 경험이 있을 것 같지만 인형이나 사진이 그려진 테이블이 웬지 모르게 좀 섬뜩했다.

 
 동네 이발소 옆 구석에 있던 스트라이다 Mk-1. 한국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물건이다.

 저녁이 되어 약속을 위해 신주쿠로 출발. 다니다가 4월에 퇴사한 G모사의 일본지사 사람들과 연락이 되어, 때마침 그쪽의 퇴사자들도 모여서 한잔 하려는데 함께 오지 않겠냐는 권유를 받았던 거였다. 한편으로는 처음 만나는 외국인들이지만, 한편으로는 그간 같은 업무로 연락을 주고받던 회사 동료들이기도 한 셈인데, 그런 사람들과 술자리를 함께 하게 되니 참 묘한 재미가 느껴졌다. 


 회사가 본래 프랑스 회사이다보니, 한국지사도 그랬지만 일본지사에도 프랑스인들이 꽤 있다. 이미 꽤 마신상태라 얼굴들은 벌겋고(...) 내 옆에 있는 친구는 제롬인데, 일본 여성과 결혼하여 아주 이쁜 딸을 두고 있다. 참고로 딸 이름은 레오나(...).


 디자이너들과 프로듀서들. 이 회사에서 대개 프랑스인들은 프로듀서 직책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 사진에서 옆에 있는 사람은 프레드라는 친구인데 말투가 아주 유쾌한 친구였다.


 한국/일본 관련 프로듀서를 맡고 있던 알릭스와 프로그래머들. 제롬도 일본어를 잘하지만 알릭스는 거의 현지인 수준의 실력을 갖고 있다. 덕분에 영어보다 일본어 쪽이 그나마 편한 나도 일본어로 이야기하곤 했는데, 생각해 보면 한국인과 프랑스인이 일본어로 이야기하고 있는 장면도 참 볼만했겠다 싶다.

 이 일본 여행은 처음 보는 곳에 가서 많은 것을 보고 들었던 것도 좋았지만, 많은 외국 친구들과 어울려 이야기하며 놀았던 이런 경험이 정말 귀중한 추억으로 남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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