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news.donga.com/Series/70020000000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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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교 50년, 교류 2000년 한일, 새로운 이웃을 향해]시리즈를 시작하며

칠지도 보러 온 日관람객들 2월 일본 후쿠오카 규슈국립박물관이 개관 10주년 특별전으로 연 ‘고대 일본과 백제의 교류’전에 모인 일본인들. 중년의 관람객들이 백제와 왜의 문화 교류를 보여주는 중요한 유물인 칠지도 앞에 서서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 일본 국보 중 국보로 평가받는 칠지도는 이번 전시를 위해 특별히 신궁에서 빌려왔다고 박물관 측은 전했다. 후쿠오카=허문명 국제부장 angelhuh@donga.com



《 올 2월 23일 일본 후쿠오카(福岡) 다자이후(太宰府)에 있는 국립규슈박물관 1층 전시장은 관람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조용히 줄을 지어 관람하던 일본인들은 유물 앞에 서서 한동안 뚫어지게 보거나 뭔가를 열심히 적는 등 매우 진지한 모습이었다. 
관람객들은 대부분 50대 이상 중년들이었다. 전시를 보기 위해 멀리서 온 사람들도 있었다. 금융회사에서 일하다 은퇴했다는 기시모토 씨(65)는 “도쿄에서 5시간 신칸센 기차를 타고 왔다. 평소 일본 고대문화에 관심이 많았는데 신문에 난 전시 소식을 듣고 짬을 내 왔다”고 했다. 

올해로 개관 10년째를 맞는 규슈박물관은 후쿠오카 시에서도 차로 30여 분 가야 닿는 비교적 외곽에 있지만 규모와 건물 디자인 면에서 동서양의 미학을 제대로 살린 건축물이라는 평을 듣는 곳이다. 연 평균 관람객이 10여만 명에 달할 정도로 시민들에게 인기가 있는 공간이지만 그중에서도 이번 전시가 2개월(2~3월) 동안 무려 5만 명을 불러 모을 정도로 각별한 주목을 받았던 것은 ‘고대 일본과 백제의 교류’라는 제목을 내건 특별전 때문이었다. 

일본 미술관이나 박물관들에 가보면 문화 전파를 언급할 때 ‘중국에서 건너왔다’고 두루뭉술하게 표현되어 있기 일쑤이다. 그러나 이번 전시에서는 제목에서부터 아예 ‘백제’를 내걸고 일본과의 문화 교류를 강조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끌었다.》 

우리에게도 친숙한 반가사유상을 내걸고 ‘고대 일본과 백제의 교류’를 소개한 전시장 입구.

실제로 둘러본 전시장 곳곳에 걸린 시대별 유물을 설명하는 글들에서는 백제인에 대한 존경과 헌사의 내용들로 가득했다. 전시장 입구에서부터 백제가 왜(倭)와 연합군이 되어 신라와 중국에 맞서 전쟁을 치른 ‘백천강’ 전투를 조명하면서 두 나라가 혈맹(血盟)이었음을 강조하는 다음과 같은 대목은 파격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강렬했다. 

‘신라와 중국 당나라(나당) 연합군의 공격으로 660년 백제가 패하자 백제 유민들은 너도나도 규슈로 왔고 3년 뒤 유민들을 중심으로 백제 부흥 운동이 일어나자 왜와 손을 잡았다. 663년 백제와 왜 연합군은 백제왕조 복원을 위해 백천강(지금의 금강 하구) 전투에서 나당연합군과 싸우지만 대패한다.’

‘백천강 전투’는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하지만 한일 고대 사학계에서는 익히 알려진 사건이다. 한반도에 고대 국가가 만들어진 330년부터 백제·고구려가 잇따라 망하는 660년대까지 백제는 고구려 신라와는 적으로 싸웠지만 왜에게는 문명을 전해주고 군사적 지원을 받았다. 백천강 전투 때 왜군들은 무려 3만여 명의 군사를 파견했다가 대부분 희생됐다. 

전시를 기획한 구스이 다카시 전시과장은 “전투 후 신라와 중국이 쳐들어올 것을 우려한 일본인들은 백제의 병법과 건축 기술을 활용해 미즈키(水城), 오노조(大野城), 기이조(基肄城) 세 성을 쌓았는데 ‘일본서기’는 이 건축물들에 ‘백제에서 망명한 관료들이 관련돼 있다’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며 “백제인들은 고대 일본이 국가를 건설하는 과정에 깊게 관여한 매우 중요한 사람들이었다”고 했다.

전시에는 백제와 고대 일본의 문화 교류를 상징하는 토기, 장식품, 기와, 불상 등이 공개됐는데 이중 가장 눈길을 끈 것이 백제 칼 ‘칠지도(七支刀)’였다. 일본 국보로 지정된 ‘칠지도’는 고대 일본의 수도였던 나라(奈良) 현 덴리(天理) 시 이소노카미(石上) 신궁에 보관된 것으로 일본인들에게조차 잘 공개되지 않는 국보 중의 국보로 통한다. 비록 일주일 한정이긴 했지만 이번 전시에서 진품이 공개되자 일본인들은 물론이고 한국인들까지 관람을 했다고 박물관 측은 밝혔다. 

전시를 보고 나오며 기자는 박물관 관계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지금으로부터 1350년 전 이곳 규슈로 이주한 백제인들을 떠올리며 전시를 기획했다”고 했던 말이 귀에 생생했다.

작금의 한일 관계는 매우 답답한 형국이다. 뭔가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고들 말한다. 이에 본 시리즈는 다음 두 가지 시각으로 기획되었다.

첫째, 위안부문제 독도문제 등 현안도 중요하지만 동아시아 문명사의 전래와 확장이라는 역사적 시각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동아시아 문명사는 북에서 남으로, 바이칼 황하 등 물에서 육지로, 기마민족에서 농경민족으로 확산되어 왔다. 우리 선조들이 수렵과 어업이 주축이던 일본에 벼농사와 문명을 전파하고 진출한 것은 어쩌면 역사의 필연에 가까운 것이었다.

둘째, 지금 이 시점에서 한일 관계는 양국의 평화와 더불어 지구촌 공영에 공동 기여 한다는 미래지향적 시각이 중요하다. 특히 젊은이들에게 역사를 잘 가르쳐 미래의 주역이 되도록 도와야 한다. 

한일 두 나라 관계가 단순한 일방적 교류나 식민 피지배 시기로만 한정되는 적대적 관계가 아니라 오랜 시공간적 시간으로 보면 지구상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동질적인 문명적 복합체 성격이었음을 드러내는 것은 그래서 중요하다고 본다. 차제에 한일 젊은이들이 미래에 함께할 수 있는 공통분모를 한일 간의 2000년 교류 역사 속에서 재발견해야 하는 이유이다.

2001년 日王 “일본인에게 백제인의 피가 흐른다” 한일 월드컵을 한 해 앞둔 2001년 12월 23일 아키히토 일왕이 68세 생일을 맞아 왕실에서 한 기자회견에서 “속일본기에 간무 천황의 생모가 백제왕의 자손이었다는 기록이 있다”고 말한 것을 제목으로 뽑은 석간 아사히신문 23일자 1면. 출처 아사히신문PDF

한편 이 대목에서 일본인들 스스로 자신들의 피 속에 백제인의 피가 흐르고 있음을 고백하면서 한국과 일본인들이 서로를 더 잘아야 한다고 말한 사람이 있으니 다름 아닌 아키히토 일왕이었다. 

한일 월드컵 공동 개최를 1년 앞둔 2001년 12월 23일 아키히토 일왕은 68세 생일을 맞아 왕실에서 한 기자회견에서 한국에 대한 생각을 묻는 질문에 “나 자신으로서는 간무 천황(일본 고대문화 전성기 헤이안 시대를 연 왕)의 생모(生母)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에 기록돼 있어 한국과의 인연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었다. 

이어 “두 나라는 한층 더 서로의 과거를 정확하게 알기 위해 노력하고, 개개인으로서는 서로의 입장을 이해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일왕의 이 말은 같은 날 아사히신문 석간 1면과 4면에 대서특필되었다. 그로부터 14년이 흐른 2015년 한일 수교 50주년이라는 뜻 깊은 해를 맞았지만 한일관계는 그때보다 오히려 후퇴했다는 느낌이다. 

옛 조상들의 흔적을 살피며 과거 고대로부터 이어진 두 나라의 인연을 되살려 새로운 이웃으로 만드는 것이야말로 이제 우리 두 나라 후손들에게 남겨진 몫이다. 

:: 칠지도 ::

쇠로 된 긴 몸체에 좌우 여섯 가지가 엇갈려 배열돼 몸체와 함께 모두 7개의 가지를 가진 칼(刀)이라는 뜻. 몸체에 백제왕이 왜왕에게 전한 외교 문서가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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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교 50년, 교류 2000년 한일, 새로운 이웃을 향해] 
한일 중간지점의 쓰시마섬, 부산-日가라쓰서 모두 보여… 항해 기준점-피신처 역할


지금으로부터 1만여 년 전 지구의 마지막 빙하기가 끝날 때쯤 중국 대만 한반도와 일본 열도는 하나의 땅덩어리였다. 빙하기가 끝나 수천 년 동안 해수면이 상승하면서 낮은 지대에 바닷물이 차오르기 시작하면서 서해가 생겨나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땅은 반도가 됐고, 대한해협이 생겨나 동해가 태평양과 연결되면서 일본은 섬나라가 됐다. 

일본이 떨어져 나간 뒤에도 한반도와 일본의 교류는 이어졌다. 한반도와 가장 가까운 규슈는 일본 열도와 한반도를 이어주는 통로였다. 규슈 가라쓰 시에 가면 우리 옛 조상들이 뗏목을 타고 거친 바다에 나가 위험한 항해 끝에 일본에 도착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오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다름 아닌 쓰시마(對馬) 섬 때문이다. 

경남 함안 지역에 존재했던 아라국(561년 멸망) 후예들의 일본 이주를 연구한 정효운 동의대 교수에 따르면 쓰시마섬은 양국 해상 교류를 쉽게 만드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부산에서 멀리 쓰시마섬이 보이듯 가라쓰에서도 쓰시마섬이 보인다. 이는 일본으로 배를 타고 간 우리 조상들에게 정처 없는 항해가 아닌 정확한 목적지를 보면서 가는 항해였다는 것을 뜻한다.

정 교수는 “전라도 영산강이나 섬진강 하구 등의 한반도 서남해안에서 출발하여 남해안의 섬들을 거점으로 삼아 쓰시마섬까지 가는 해로가 백제가 이용한 주요 해상교통로였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바다의 흐름인 해류(海流)도 교류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요즘도 가라쓰 해변을 거닐다보면 한국 상표가 붙은 생수 병이나 라면 봉지 같은 한국에서 떠내려온 각종 쓰레기를 볼 수 있다. 가라쓰 시 이데 겐조(井手憲三) 국제교류과장은 “그 옛날 한반도인들도 이 해류를 타고 일본 섬에 이르렀을 것”이라고 했다.

가야 고구려 백제에 살았던 우리 조상들의 일부는 자신들의 국가가 멸망하자 때로는 좌절하고 때로는 부흥의 꿈을 안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멀리 보이는 일본 땅은 그들에게 또 다른 희망이었다. 그리고 한반도와 매우 비슷한 이곳 규슈에서 일본인들과 함께 새로운 나라 건설에 힘을 보탰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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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교 50년, 교류 2000년 한일, 새로운 이웃을 향해]

일본 도쿄에서 차로 한 시간가량 떨어진 히다카 시의 ‘고마 신사’에는 고구려 조상들을 모셨다는 것을 명확하게 밝힌 ‘고려왕묘’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히다카=허문명 국제부장 angelhuh@donga.com

일본 도쿄에서 서북쪽으로 70km 떨어진 사이타마(埼玉) 현 히다카(日高) 시에 가면 고려천, 고려산, 고려치(峙·고개), 고려역, 고려소학교 등 도처에 ‘고려(高麗·일본어로 고마)’로 시작하는 지명이나 시설이 있다. 히다카 시 역시 통폐합 전 ‘고려군’으로 불렸다. 여기서 고려란 ‘고구려’를 뜻한다. 지금으로부터 1300여 년 전인 668년 나당연합군의 공격으로 평양성이 무너지면서 나라를 잃게 된 고구려 유민들이 대거 건너와 뿌리를 내린 곳이기 때문이다. 유민 1대(代)를 시작으로 장자 상속으로 무려 60대를 이어 온 가족이 있으니 ‘고구려 신사’(이하 고마 신사)를 지키고 있는 궁사(宮司·일본 신사를 운영하는 책임자) 고마 후미야스 씨(49·사진)다. 

5월 신사에서 만난 고마 궁사는 피는 속일 수 없는지 언뜻 봐도 선 굵은 외모가 전형적인 일본인보다는 한국인과 가깝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임진왜란 때 3형제가 뿔뿔이 흩어져 두 명은 전사하고 장손만 숨어 살아남아 겨우 대를 이을 수 있었다. 32대 할아버지는 ‘절대 전쟁에 나가거나 나랏일에 끼어들지 말라’라는 유언을 남겼고 이후 자손들은 종교인으로 이곳 신사를 지키는 것을 평생의 과업으로 알고 살았다.”

한국의 생활한복과 비슷한 궁사 유니폼에 왼쪽 손에는 최첨단 명품 시계를 찬 그의 모습에서 과거와 현재를 잇는 시간의 연속성이 느껴졌다. “한일 관계를 언뜻 임진왜란이나 일제강점기만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 뿌리가 고대로부터 깊다는 것은 우리 집안이 증거이다. 한일 근대사에는 전쟁도 있었고 지배와 피지배도 있었지만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한일 교류 2000년 역사에는 좋은 시절이 더 많았다.”

그에게선 한국인의 후손으로서 일본에서 겪어 온 차별이나 소외라는 말 대신 “나의 뿌리는 한국이지만 내가 크고 자란 곳은 일본이다. 내 조국은 둘”이라는 말이 나왔다. “옛 조상들처럼 한국과 일본이 다시 새로운 이웃으로서의 인연을 이어 갔으면 좋겠다”는 말도 했다. 

22일 한일 수교 50주년이 되는 역사적인 날을 기념해 한일 관계를 교류의 역사로 보는 ‘한일, 새로운 이웃을 향해’ 시리즈를 기획했다. “동아시아의 미래는 한일 두 나라가 고대로부터 쌓았던 인연을 어떻게 성공적으로 재발견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미국의 석학 재러드 다이아몬드(‘총, 균, 쇠’의 저자)의 말을 새기며 연재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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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교 50년, 교류 2000년 한일, 새로운 이웃을 향해]<1>日에 벼농사를 가르치다



한국과 더불어 수천 년 동안 자포니카(단립종) 쌀을 주식으로 먹고 살아 온 나라는 일본이 유일하다. 둥근 모양의 자포니카 쌀은 밥을 지으면 차진 것이 특징으로 동남아에서 생산되는 길고 점성이 없는 인디카(장립종) 쌀과 밥맛이 확연히 다르다. 

일본의 논농사는 2500∼2600년 전 한반도에서 전해진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벼농사 유적이 있는 곳은 규슈(九州) 사가(佐賀) 현 가라쓰(唐津) 시이다. 가라쓰 시는 규슈의 최대 도시 후쿠오카(福岡)에서 서남쪽으로 약 40km 떨어져 있다. 인구는 약 13만 명. 후쿠오카 공항에서 내려 JR 지쿠히(筑肥)선을 타고 환승 없이 1시간 만에 닿을 수 있었다.

가라쓰는 부산까지의 거리가 약 180km로 일본에서 한국과 가장 가까운 도시다. 가라쓰의 ‘가라’는 일본말로 ‘외국’이란 뜻으로 본래는 한국을 의미한다는 게 일본 학계의 정설이다. 현재 가라쓰를 표기하는 한자 ‘唐津’은 옛날에는 ‘한진(韓津)’이라고 쓰고 가라쓰라고 불렀는데, 이후 당나라와의 교역이 늘어나면서 ‘韓’ 자만 ‘唐’으로 바뀌었다고 일본 고서들은 기록하고 있다.

이런 지리적 요인 때문에 가라쓰는 오래전부터 한반도와의 교류가 활발했다. 훗날 조선 도자기가 처음 전해진 곳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임진왜란을 일으키기 전 병력을 집결시켰던 히젠 나고야 성도 이곳에 있다. 이런 지역에서 일본 최초의 벼농사 유적이 발견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유적이 발견된 가라쓰 나바타케에는 ‘마쓰로칸(末盧館)’이라는 이름의 벼농사 박물관이 있다. 기원전 가라쓰 지역에 존재했다는 마쓰로(末盧)란 원시 국가의 이름을 따온 것이다.

마쓰로칸은 가라쓰 시내를 울타리처럼 둘러싸고 있는 산자락 안에 있었다. 가라쓰 역에서 걸어서 15분밖에 걸리지 않는다. 일본식 주택들이 늘어서 있는 동네에 높은 통나무 울타리로 가려져 있어 대문에 ‘마쓰로칸’이란 표지판이 없었다면 그냥 지나치기 쉬웠다. 

현장에 와 보면 왜 옛날 사람들이 이곳에 터를 잡았는지 고개가 끄덕여진다. 뒤에는 울창한 산이 있고, 1km 정도 평지를 사이에 두고 바다가 있다. 수렵과 채집, 어업이 가능한 데다 산골짜기로 흘러내려오는 물을 이용해 논농사를 짓기엔 최적의 장소로 보였다.

다지마 류타(田島龍太) 마쓰로칸 관장의 안내를 받으며 박물관을 둘러보았다. 일요일인데도 찾아오는 관람객은 한 명도 없었다. 

마쓰로칸은 땅에 기둥을 박고 그 위에 집을 짓는 고상식(高床式) 형태의 특이한 2층 목조 건물이다. 고상식 가옥은 맹수나 독충을 피하고 장마철 습기를 최소화할 수 있는 장점 때문에 신석기시대 동굴을 벗어난 원시인들의 대표적 주거 형태이다. 나바타케 유적에서도 고상식 가옥 흔적으로 보이는 나무 말뚝이 2개 발견됐다.

박물관에 들어서니 입구에 이 일대에서 발굴된 검은색 탄화미(炭化米)를 확대경으로 볼 수 있게 전시해 놓았다. 나바타케 유적에서 발견된 탄화미는 기원전 600년경 재배된 것으로 분석됐다.

주요 전시물은 2층에 있었다. 2층 중앙에는 조몬시대(기원전 1만3000년∼기원전 300년) 말기 이 지역에 존재했던 마을을 상상으로 복원해 만든 큰 모형이 놓여 있었다. 당시 사람들이 벼농사와 수렵, 축산업, 어업을 어떤 방식으로 진행했는지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이때 이미 제사를 지내는 풍습도 있었다.

마쓰로칸에 전시된 유물들을 보면 한반도 고유 문명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발굴된 독 항아리 사발 굽접시 등은 토기의 주둥이 부분에 검은 반점이 있거나 소뿔형 손잡이로 마무리한 점이 눈에 띈다. 이는 한반도와 규슈 지역을 중심으로 공통적으로 발굴되는 유물의 특징이다.

홈자귀라고 불리는 돌도끼나 손잡이 부분을 깊게 판 마제석검, 버들잎 모양의 석촉 등 한반도에서 고유하게 발굴되는 석기들도 이곳에서 나왔다.

다지마 관장은 석검 하나를 가리키며 “이것을 만든 재질의 돌은 일본에 없으니 한반도에서 넘어온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마쓰로칸을 둘러보면 일본의 농경문화는 한반도에서 농경문화를 향유하던 주민들이 직접 일본 열도로 이주함으로써 개화한 문화라는 확신이 굳어진다.

박물관 안내문에도 ‘나바타케는 2500∼2600년 전 조선 반도에서 건너온 사람들에 의해 벼농사가 전해진 곳으로, 이는 일본 벼 재배의 시작으로 알려졌다’라고 적혀 있다.

눈에 띄는 것은 이곳 유적 발굴 과정에 다양한 석기와 함께 세형단검, 청동거울 등 청동기문화 유적도 나온 것이다. 벼농사와 청동기의 도입은 수렵과 채집에 의존하던 일본의 신석기시대 조몬인들을 농경문화에 기반을 둔 야요이(彌生) 시대로 이끌었다. 

동국대 윤명철 교수는 “한 나라가 다른 나라에 벼농사를 전했다는 것은 단순한 식량 문제의 해결을 넘어서 농업 기술력은 물론이고 식량을 담는 그릇 문화(토기)에서부터 무기의 전파까지 이뤄지는 과정으로 원시인들을 촌락에 이어 국가로까지 만드는 결정적 계기”라며 “한반도가 일본에 벼농사를 전한 것은 명실상부하게 일본인들이 공동체를 만들게 하는 데 매우 중요한 전수”라고 했다. 

그의 말은 나바타케 유적에서 산 하나를 넘어 약 40km 떨어진 일본 청동기 문화 유적 요시노가리(吉野ヶ里)에서 확인할 수 있다. (2회는 요시노가리 유적편으로 이어집니다.)

:: 탄화미(炭化米) ::

불에 타거나 지층 안에서 자연 탄화된 쌀을 말한다.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을 통해 분석한 재배 연도는 벼농사의 기원과 전래를 밝혀내는 중요한 기초 자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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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교 50년, 교류 2000년 한일, 새로운 이웃을 향해]<2>청동과 토기를 전하다

2300여 년 전 우리 고조선과 삼한시대 조상들이 집단이동하면서 전해준 벼농사가 본격화되자 일본 역사는 수렵과 채집이 생산 기반이었던 조몬(繩文)시대(기원전 1만 년∼기원전 5세기)와는 질적으로 다른 야요이(彌生) 시대(기원전 5세기∼기원후 3세기)로 넘어간다. 

미국의 문명사학자 재러드 다이아몬드는 세계적 베스트셀러이자 퓰리처상 수상작인 ‘총, 균, 쇠’의 개정 증보판(2003년)을 내면서 야요이 시대에 선진 농업기술을 갖고 이주한 한국인들이 오늘날 일본인의 조상이라고 주장해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이론은 단순한 주장이 아니라 DNA 분석이라는 과학적 실험 결과에 따른 것이었다. 

즉, 일본 고대인인 조몬인과 야요이인의 두개골 유전자를 채취해 현대 일본인과 일본에 살던 원주민족 아이누족과 비교 분석해보니 조몬인이 현대 일본인이 아니라 아이누족을 닮았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현대 일본인의 유전자는 야요이인 것을 닮았다. 더 충격적이었던 것은 이 유전자가 한국인과도 닮았다는 것.

다이아몬드 교수는 유전자 분석 외에 고고학 분자생물학 인류학 언어학 등의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한 논문 말미에 “과거 현재의 여러 요소를 종합적으로 고려해볼 때 한국과 일본은 성장기를 함께 보낸 ‘쌍둥이 국가’와도 같았다”며 “이런 사실은 이후 역사를 거듭하며 불편한 관계를 맺었던 양국을 생각한다면 아이러니한 사실이 아닐 수 없다”고 말했다.

가혹한 식민 지배와 아직도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일본 정치인들의 후안무치를 생각한다면 ‘쌍둥이 국가’라는 말에 불편해하는 한국 독자들이 있을 것이다. 일본인도 자신들이 조몬인으로부터 진화해 최소 1만2000년간 독자성을 지켜왔다는 학설을 선호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한반도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조상이라는 다이아몬드 교수의 주장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고대 한국과 일본의 교류사 흔적이 짙게 배어 있는 현장을 돌다보면 다이아몬드 교수의 주장이 무리가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 대표적인 유적지를 우리는 한반도와 가까운 일본 규슈 열도 내에 위치한 사가(佐賀) 현에서 만나게 된다. 


○ “한일은 쌍둥이 국가”

시치다 다다아키 혼마루역사관 관장이 요시노가리 유적을 둘러싼 해자와 적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나무를 뾰족하게 깎아 만든 울타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요시노가리=유덕영 기자 firedy@donga.com

한반도와의 직선거리가 200km 정도밖에 되지 않아 과거부터 현재까지 매우 긴밀한 교류가 이뤄진 한일 교류 현장인 사가 현 일대에 위치한 간자키(神崎) 군 간자키 정과 미타가와(三田川) 초, 히가시세후리(東背振) 촌 등 3개 마을 87만 m²(약 26만3000평)에는 요시노가리(吉野ヶ里) 역사공원이 넓게 펼쳐져 있다. 이곳은 야요이 시대 말기 생활상이 정밀하게 복원된 역사적 장소이다. 

3월 후쿠오카역에서 한 시간가량 기차를 타고 요시노가리공원역에 도착했다. 역 밖으로 나서니 ‘요시노가리’가 한국어로 ‘좋은 들판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란 것이 새삼 실감났다. 멀리 보이는 산들을 배경으로 풍요롭고 넓은 들판에 청명한 날씨는 일본이 아니라 호남평야 같은 포근함과 친근감을 주었다. 배를 타고 건너온 낯선 땅이었지만 전혀 낯설지 않은 이곳에 도착한 우리 조상들이 정착하기에는 최상의 조건이었을 것 같았다.

실제로 해양교류학자인 윤명철 동국대 교수는 “어제 동아일보가 소개한 가라쓰를 굳이 인천으로 비교한다면 요시노가리는 서울이라 할 수 있다. 배를 타고 인천에 도착한 이들이 정주하기 좋은 땅을 찾아 육지로 들어와 정착한 곳이 바로 요시노가리이기 때문”이라며 “이곳에서 일본 고대 문화의 최전성기를 보여주는 야요이 시대 유물이 대거 쏟아져 나온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했다.

기원전 2세기경부터 한반도인들이 이주해 형성된 야요이 시대 대표적 집단 취락지인 요시노가리 전경. 현재 3세기경의 모습으로 복원돼 역사공원으로 지정됐다. 사가현 제공

역에서 내려 10여 분 걸어가면 ‘요시노가리 역사공원’이라는 간판이 나온다. 

문 안으로 들어서자 성 밖을 둘러 판 도랑인 해자(垓子)가 있었고 해자 바깥쪽으로는 끝이 뾰족한 굵은 나무 말뚝으로 만든 울타리가 있었다. 


○ 한국인에게도 친근한 옹관묘

요시노가리 유적에서 출토된 한국식 동검. 당시 요시노가리의 지배층은 한국식 동검과 유리대롱옥 등으로 위세를 드러낸 것으로 추정된다. 시치다 다다아키 씨 제공

이날 취재는 야요이 시대 전문가이며 1986년부터 22년간 요시노가리 유적 발굴 책임자로 일했던 시치다 다다아키(七田忠昭·63) 사가 성 혼마루(本丸)역사관 관장과 동행했다. 시치다 관장은 나무 울타리를 가리키며 “논농사를 시작하면서 생긴 잉여 생산물을 지키고 식량 쟁탈이 일어나자 외부의 적을 막기 위해 만든 방어물”이라고 했다. 

공원을 통과하면 ‘내곽(안쪽 테두리)’이라는 이름의 울타리가 처진 특별한 구역과 만난다. 북쪽과 남쪽에 하나씩 있어 북내곽, 남내곽이라 불린다. 북내곽 안에는 건물 여러 채가 복원되어 있었는데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이 ‘주제전(主祭殿)’이고 나머지는 제당 망루 등이었다. 2층에는 지배층이 회의하는 모습을, 3층에는 제사장이 제의(祭儀)를 진행하는 모습을 모형으로 꾸며 놓고 있었다. 

시치다 관장은 “북내곽은 당시 지배층이 모여 중요한 일을 결정하는 회의를 하거나 제사를 지내던 곳이었고 남내곽은 거주 공간이었다”고 소개했다. 

북내곽을 나와 북서쪽으로 조금 걸어가니 대형 항아리가 두 줄로 묻혀 있는 특이한 곳이 나왔다. 이곳에서 일하는 한국인 안내원 황성민 씨는 “한국인들에게도 익숙한 옹관묘열(甕棺墓列)”이라고 했다. 일부 항아리 안에는 뼛조각이 그대로 있는 것도 있었다. 

옹관묘는 초벌구이한 대형 토기에 시신을 구부려 넣고 흙 속에 묻는 매장 방식으로 우리나라 마한 지역에서 유행하던 장례 방식으로 알려져 있다. 학자들은 마을 공동체 안에 이와 같은 매장문화가 있었다는 것은 많은 의미를 준다고 했다. 

1990년대 초 옹관묘 발굴 당시 현장을 볼 기회가 있었다는 윤명철 교수는 “옹관묘는 지금으로 따지면 하이테크놀로지 기술이 응집된 초호화판 무덤이었다. 그만큼 지배층의 힘이 강했다는 것”이라며 “먹고 사는 공간에 묘지가 함께 있다는 것은 공동체가 부족 수준이 아니라 초기 국가 형태로 본격적으로 진입했음을 의미한다”고 해석했다. 


○ 한국은 문명 전수자, 일본은 매개자

공원 안 유물 전시실로 발길을 옮겼다. 논농사의 발전이 필연적으로 가져온 농경사회 변화를 상징하는 다양한 유물들이 있었다. 

보통 벼를 재배하면 생활시스템이나 경제활동에 일대 변화가 일어난다. 종자 선택, 모 키우기, 물 대기, 피 뽑기, 벌레 제거하기, 비료 주기, 수확하기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을 효율적으로 통제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 가래나 괭이 같은 목제 농기구가 필요해지고 이를 만들기 위한 돌도끼 돌자귀 대팻날 같은 도구와 돌칼이나 돌낫 등 수확용 도구도 필요해진다. 요시노가리 유물전시실에도 이런 다양한 유물이 있었다.

시치다 관장은 이런 유물들이 한반도의 영향을 깊게 받았다고 했다. “야요이 시대 유물들에서는 수렵 채집 시대와는 다르게 저장용 단지, 취사용 항아리, 음식용 굽다리 접시 등이 많이 나왔는데 한반도에서 발견된 것과 비슷해 한반도에서 전파된 농경문화 요소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청동기 유물에서도 한반도계 토기가 출토됐는데 당시 청동기 주조 기술은 아무나 가질 수 없는 고급 기술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전부터 청동기 주조 기술을 가진 한반도인이 요시노가리에 정착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이 같은 문명 교류에 대해 서울시립대 정재정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전했다는 것만 강조하며 우위를 내세울 것이 아니라 한국과 일본이 각자의 문명 전환기에 상대방에게 매개자 또는 촉매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즉, 일본의 선사 고대 시대에는 한국이 중국 문명을 전한 전수자(傳授者)였고, 한국 근현대 문명 형성기에는 일본이 서구 문명의 매개자(媒介者) 역할을 했다. 고대 문명 교류도 이런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 야요이(彌生) 시대 ::

본격적인 벼농사로 농경 및 정착 생활이 시작되면서 ‘일본 문화의 원점’이 시작되는 시대이다. ‘야요이’라는 명칭은 1884년 이 시대 토기(사진)가 처음 발견된 도쿄 외곽 지명에서 유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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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교 50년, 교류 2000년 한일, 새로운 이웃을 향해]<3>왕인이 일본으로 간 사연

한옥 기와에 ‘백제문’… 곳곳에 한국의 숨결 오사카 시에서 동북쪽으로 30km 정도 떨어진 히라카타 시에 자리한 왕인묘 입구. 출입문 격인 ‘백제문’은 2006년 10월 한일 양국의 문화친선협회가 건립한 것이다. 아래쪽 사진은 백제문을 통과한 뒤 몇 발짝 떨어진 곳에 자리한 왕인묘. 가운데 비석에 ‘박사 왕인지묘’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히라카타=이유종 기자 pen@donga.com

《 백제인 왕인(王仁)은 4, 5세기 정도에 일본으로 건너가 고대 일본에 백제 문화, 나아가 선진적 한반도 문화를 전한 대표적인 지식인이다. 그는 백제에서도 박사(博士) 칭호를 받은 당대 석학으로서 일본으로 건너가 문자를 만들어 주고 학문을 가르치고 도자기, 기와 기술까지 전해줬다. 일본 고대 역사서들에 기록된 그에 대한 이야기는 이렇다.

‘15대 천황인 오진(應神) 천황이 백제국에 “만약 현인(賢人)이 있다면 보내 달라”고 청했다. 백제왕은 왕인을 추천했다. 일왕은 백제에 사신을 보내 왕인을 초청해 왔다. 왕인은 논어 10권과 천자문 1권을 갖고 일본으로 건너왔다. 16년 봄 2월의 일이다.…태자는 그를 스승으로 모시고 전적(典籍·여러 사상 등이 적힌 책)을 배웠는데 (왕인은) 통달하지 못한 것이 없었다.’<일본 역사서 고사기(古事記·712년), 일본서기(日本書紀·720년), 속일본기(續日本紀· 797년) 종합> 

이러한 일본 고대서의 기록들은 왕인이 당시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었고 일본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덧붙여 고대 왜(倭)와 백제 왕실이 당대 석학을 청하고 또 선뜻 보내줬다는 것을 보면 두 나라가 매우 가까운 관계였으며 또 백제가 왜에 문명 전달자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일본 전역에 흩어진 왕인 박사의 흔적


왕인 박사의 흔적은 일본 전역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1699년 건립된 사가(佐賀) 현 간자키(神埼) 시에는 왕인신사(王仁神社)와 왕인천만궁(王仁天滿宮)이 있는데 ‘천만궁’은 ‘학문의 신’을 모시는 신사라는 뜻이다. 교토 야사카신사(八坂神社) 경내에도 왕인신사가 있으며 오사카 마쓰하라(松原) 시 왕인성당지(王仁聖堂址), 사카이(堺) 시의 다카시노신사(高石神社) 등도 왕인을 신으로 추앙하고 있다. 

일본인들에게 마음의 고향이라 불리는 도쿄 우에노 공원에서도 왕인의 흔적을 만날 수 있다. 수목 울창한 경내에 각각 높이 3m, 1.5m에 달하는 두 개의 대형 대리석 비(碑)가 있는데 비석 앞뒷면에 박사의 위업이 앞뒤로 빼곡히 적혀 있다. 뭐니 뭐니 해도 박사의 흔적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은 오사카(大阪) 히라카타(枚方) 시에 있는 박사의 묘이다.

올 4월 9일 관광책자에 적힌 대로 시내에서 동북쪽으로 약 30km 정도 떨어진 히라카타 시 나가오(長尾) 역에 내렸다. 작은 간이 역사가 말해주듯 일본의 작고 조용한 전형적인 시골 마을이었다. 하지만 그 옛날에는 이 일대가 일본 고대국가 형성의 요람으로서 군사 외교적으로 매우 중요했던 가와치(河內) 국의 영역이었다고 한다. 

왕인묘가 역에서 멀지 않다고 책자에 적혀 있어 금방 찾으리라 생각했지만 오산이었다. 어디에서도 표지판을 찾을 수 없었다. 길 가던 일본 청년을 붙잡고 ‘왕인묘’의 일본어 발음인 ‘와니쓰카(王仁塚)’라고 물으며 종이에 한자로 ‘왕인(王仁)’이라는 단어를 적어 보여 주었다. 청년은 대번에 알고 있었다. 손짓 발짓으로 그가 가르쳐 준 길을 따라 걸으며 일본 정부가 과거의 많은 기록들을 왜곡하고 은폐하려 노력하고 있는 와중에도 다행히 아직도 일본인들이 왕인 박사를 잊지 않고 있는 것 같아 으쓱했다. 

10분 정도 걸으니 기와를 얹고 ‘백제문’이라는 현판을 단 한국식 전통 문이 나왔고 그 앞에 사람 키만 한 커다란 돌에 ‘오사카부 지정 사적 전 왕인묘’라는 글이 한자로 새겨진 조형물이 보였다. 드디어 왕인 박사 묘에 온 것이다.

묘역에는 한국인들의 흔적이 곳곳에 보였다. 백제문 왼쪽에 설치된 철제 표지판에는 ‘이 백제문은 2006년 10월 한일 양국의 문화친선협회가 건립했다’는 내용과 ‘왕인 박사는 왕실의 사부로 학문과 경사(經史)를 전수하시어 일본 문화의 원류인 아스카 문화의 시조라고 전해지고 있다’는 소개 글이 적혀 있었다. 문 안으로 들어서니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1999년 9월 5일 심은 기념식수도 보였다. 2008년 2월 29일 전남 영암군수의 무궁화 기념식수도 있었다. 정자도 하나 세워져 있었는데 왕인묘를 사적으로 지정한 60주년을 맞아 축하한다는 내용의 김대중 전 대통령의 글(1998년 5월 9일)이 적힌 액자가 보였다.

눈을 돌려 앞을 보니 ‘박사 왕인지묘’라고 해서체로 쓰인 비석이 있었다. 높이는 1m 정도 됐고 앞에는 누가 갖다놓았는지 생화 몇 송이도 있었다. 묘비 앞에 서니 만감이 교차했다. 천년도 더 전에 이 낯설고 물선 땅에 와 일본인들에게 문자를 가르치고 학문을 전해준 왕인 박사의 혼(魂)이 시공간을 훌쩍 뛰어넘어 전해지는 듯 숙연해졌다. 짧은 참배를 하고 밖으로 나와 10∼15분 정도 걸어가니 테니스장에 수영장까지 갖춘 꽤 큰 공원이 나왔는데 이름이 ‘왕인공원’이었다. 

영암군에 세운 왕인 동상 왕인 박사의 출생지로 알려진 전남 영암군 군서면에 세워진 동상. 영암군에서 세운 것이. 삼국사기 삼국유사에도 등장하지 않는 왕인 박사의 존재는 조선시대 일본을 다녀온 사신들을 통해 비로소 알려졌다. 동아일보DB

○ 왕인박사의 숨결을 그대로 간직한 묘역

백제인 왕인, 그는 일본에서 과연 어떤 일을 했기에 이렇게 천년의 세월을 훌쩍 넘어서도 존경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일까. 고대 일본 역사서들은 왕인 박사가 일본에 문자를 만들어 준, 이를테면 한국의 ‘세종대왕’에 비견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751년 편찬된 일본 최초의 한시집 가이후소(懷風藻)에서는 ‘왕인은 왜어(倭語)의 특질을 훼손하지 않고서 한자를 이용해 왜어를 표현하는 방법을 개발했다’고 표현해 그가 일본 문자 가나(假名)를 창안했음을 명시하고 있다. 또 ‘고사기’와 ‘일본서기’에는 ‘서수(書首)와 문수(文首)의 시조’라고 적고 있다. 즉, ‘책(書)과 글(文)을 다루는 전문직의 우두머리(首)’라는 뜻이다. 

왕인 박사는 또 고대 일본 귀족들이 짓거나 암송했던 전통 정형시 와카(和歌)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905년 발간된 노래집 ‘고킨와카슈(古今和歌集)’는 ‘난파진에는, 피는구나 이 꽃이, 겨울잠 자고. 지금은 봄이라고, 피는구나 이 꽃이’라는 내용의 ‘난파진가(難波津歌)’를 소개하는 대목에서 ‘왕인 박사가 지은 최초의 와카’라며 박사를 ‘와카의 아버지’라고 적고 있다. ‘일본서기’는 또 박사가 오진 일왕의 4남인 닌토쿠(仁德) 일왕을 ‘난파(難波) 일왕’이라고 부르며 즉위할 것을 권고하며 난파진가를 지었다고도 했다. 이 기록들로 미뤄 볼 때 박사가 일왕에게 직접 조언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왕인 박사의 위업은 당대에만 그치지 않았다. 그의 후손들이 대대로 일본 조정에서 문필과 외교, 군사 등 각 분야에서 활약한 것으로 전해진다. 불교계에도 진출해서 큰스님이 된 사람도 많다. 특히 설법과 사회 사업을 병행한 생활불교를 펴서 ‘민중의 구제자’로 일본인들이 흠모하는 대상인 교키(行基·668∼749) 스님도 왕인 박사의 후손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왕인의 가문 전체가 일본 문화 확립에 크게 기여한 것이다. 

오사카에서 만난 오사카오타니대 다케타니 도시오(竹谷俊夫) 역사문화학과 교수는 “한류(韓流), 한류 하지만 사실 고대 일본에도 한류가 불었다고 생각하면 된다”며 왕인 박사야말로 한류의 1대 전도사였던 셈”이라고 말했다. 


:: 도래인(渡來人) :: 

일본 말로는 ‘도라이진’이라 읽으며 ‘물을 건너온 사람’이란 뜻이다.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온 한국인을 일컫는 말이다. 도래인의 유형은 왕인 박사처럼 일본에 문명을 전해주러 갔다가 눌러앉은 사람과 고구려나 백제처럼 나라가 망해 삶의 기반을 잃자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떠나 일본으로 건너갔던 사람, 두 유형으로 나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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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교 50년, 교류 2000년 한일, 새로운 이웃을 향해]<4>오사카의 백제 도래인들

① 일본 오사카 시 이쿠노 구 한인촌 입구에 위치한 미유키모리 신사. 신사 관계자는 “한일 관계, 북핵 문제 등 남북한 관련 뉴스를 전할 때면 ‘한인촌’의 상징인 이곳을 배경으로 사용한다”고 했다. ② 이쿠노 구와 나란히 붙은 히가시스미요시 구의 남백제 소학교(미나미구다라 소학교). 오사카 시에는 백제역, 백제시계점, 백제대교 등 다양한 백제 관련 지명이 존재한다. 미유키모리 신사 제공

한반도의 주도권을 놓고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가 본격적인 쟁탈전을 벌이던 4세기 무렵부터 고구려가 멸망한 668년까지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는 아직 국호(일본)도 없이 초기 국가 형성 단계로 들어간 왜(倭)와 긴밀하게 교류한다. 우리 조상들이 서로 피 튀기는 각축전을 벌이는 와중에 ‘왜’와는 각자 긴밀한 정치 경제적 교류를 했다는 사실은 일반인들에게 생소하다. 뒤집어 말하면 그만큼 한반도 도래인들이 왜에 끼친 영향이 크다는 이야기이다.

3국 중 가장 활발한 교류를 한 나라는 백제였다. 지리적으로 가까운 데다 항로상으로도 제일 유리했다. 문화적으로도 수준이 높았던 백제는 점차 기울어가는 국가적 운명 앞에 왜에 문명과 기술을 전해주고 군사적 지원을 받으며 상생(相生)을 도모했다.

일본에서 백제의 흔적이 두드러진 곳으로 일본 제2의 도시이자 항구 도시인 오사카(大阪)가 꼽힌다. 이는 지리적 위치 때문이다. 

일본 열도를 이루는 4개의 큰 섬 중에서 한반도와 가장 가까운 규슈(九州)에서 세토나이카이(瀨戶內海)라는 내해를 거치면 열도에서 가장 큰 섬인 혼슈(本州)의 오사카 항에 닿게 된다. 오사카를 초입으로 삼는 혼슈 간사이(關西) 일대에는 이코마(生駒) 산을 경계로 2개의 큰 평야(오사카·나라 평야)가 자리 잡고 있다. 생활환경이 우리와 비슷하고 물산도 풍부해 백제인들이 생활의 터전으로 정착하기에 안성맞춤인 땅이었다. 


○ 오사카 곳곳에서 만난 백제의 흔적들 

오사카의 최대 중심지이자 한국인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다는 난바(難波). 이곳에서 차로 20분 거리에 위치한 이쿠노(生野) 구(區)는 오사카 내 최대 한인촌이다. 구민 4분의 1 이상이 한국인이다 보니 구청 홈페이지에 한글 버전이 따로 있을 정도이다. 이쿠노 구에는 백제 관련 유래가 전해 내려오는 신사는 물론이고 ‘백제’의 일본 음독인 ‘구다라’라는 명칭을 그대로 쓰는 지명이나 시설물이 많다. 미유키모리(御幸森) 신사만 해도 백제인들과 긴밀한 교류를 맺어온 왕인(王仁) 박사의 제자 닌토쿠(仁德) 천황을 모시는 신사이다. 

이쿠노 구 옆 히가시스미요시(東住吉) 구도 한국과의 인연이 남다른 곳이다. 백제역(구다라 에키), 백제강(구다라 가와), 백제 시계점(구다라 도케이텐) 등 다양한 백제 관련 지명이 있었다. 이 중에 ‘미나미구다라(南百濟) 소학교’가 있다.

어찌된 연유로 일본 초등학교가 ‘남백제’란 이름을 갖게 되었는지 그 연유가 궁금해 학교를 찾아갔다. 학교는 한적한 주택가에 위치하고 있었다. “백제의 역사를 알고 싶다”는 기자의 청에 선뜻 응해준 오가 마사노리 교장(56)과 나루세 모리카즈 교감(51)이 직접 마중을 나왔다. 두 사람의 안내를 받아 교장실로 들어섰다. 

작고 소박하게 꾸며진 교장실에 들어서자 양쪽 벽면을 가득 채운 역대 이사장과 교장들의 얼굴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1874년에 개교해 현재 141년에 이르는 학교의 긴 역사를 대변하는 사진이었다. 오가 교장에 따르면 학교는 처음에 ‘스미요시 구 제4번소학교’라는 이름으로 출발했다가 ‘유타카 소학교’로 바뀌었고, 1889년 이쿠노 구의 행정 지명이 개편되면서 ‘미나미구다라 소학교’로 최종 이름이 확정됐다. 이 초등학교는 1950년 전교생이 2400명일 정도로 컸지만 저출산 탓에 취학 아동이 대거 줄면서 지금은 규모가 작아졌다.


○ 미나미구다라 소학교에 얽힌 사연


나루세 교감은 “오사카 지방에 백제 도래인이 대거 몰리자 서기 646년 이 일대는 백제군(群)이라는 정식 행정구역으로 지정됐다”며 “이후 서기 765년 일본 왕실이 펴낸 ‘정창원문서(正倉院文書)’나 서기 791년에 일본 왕실이 펴낸 역사책 ‘속일본기(續日本紀)’에도 ‘백제군(百濟郡·구다라고리)’이라는 명칭이 보인다”고 전했다. 실제로 1098년 일본이 제작한 오사카 고지도 ‘난바팔랑화도(難波八浪華圖)’에도 오사카를 ‘백제국’이란 지명으로 표기하고 있다.

연민수 동북아역사재단 역사연구실장은 “일본서기 등 일본 고대 문헌에 따르면 5세기부터 백제 도래인들의 오사카로의 진출이 대거 본격화됐는데 결정적 계기는 660년 백제 패망이었다. 나라를 잃은 유민들은 이미 일찍이 왜에 정착해 있던 가족과 지인들을 찾아 집단으로 망명 이주했다”며 “왕인 박사를 비롯해 5세기 이후 일본에 건너온 백제 도래인들은 다양한 유·무형의 선진 문물을 일본에 전파했다”고 전했다. 

당시 일본 왕실도 오사카 히가시스미요시 구와 이쿠노 구 일대에 도래인들이 거주할 수 있도록 땅을 주고 생활기반 시설을 만들어 주는 등 배려했다고 한다.

오사카로 온 백제 도래인들의 활약은 눈부셨다. 일본 지배층들의 성씨 1182개의 내력을 기록한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815년)’에는 “4세기 대규모 치수공사, 제방공사 등은 백제인이 설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들은 토목 직물 제철 도기 농경 목축 등의 분야에서 기술력을 인정받아 지역 엘리트로 자리 잡았다.

미나미구다라 소학교 오가 교장은 “처음에는 우리도 잘 몰랐다. 기자와 학자들이 찾아와 학교의 역사를 묻는 일이 많아 교사들과 함께 공부를 시작했다”며 “여러 문헌을 통해 오사카는 백제인들이 건너오면서 도시의 기틀을 갖추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전했다.

실제로 오사카에는 백제인들의 손끝에서 탄생한 유적들이 셀 수 없이 많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오사카 항 근처 높이 15.4m, 폭 62m에 달하는 대형 저수지 사야마이케(狹山池)이다. 홍수 방지는 물론이고 현재까지 오사카 주민들의 농업·생활용수를 담당하고 있는 이 저수지 역시 백제의 기술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사야마이케 박물관은 밝히고 있다. 

오사카 시 최초의 다리 ‘인덕교(仁德橋)’를 세운 것도 도래인이었다. 이쿠노 구를 설명하는 책자에는 ‘인덕교는 서기 323년 구다라 강(백제강)에 건설된 다리로, 일본 문헌에 나오는 다리로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전해진다”고 소개하고 있다.  

▼ 베틀… 부뚜막… 흙벽… 의식주까지 통째로 바꿔 ▼

백제 도래인들이 日에 끼친 영향


백제 도래인들은 학문이나 사상(불교)은 물론이고 의식주까지 고대 일본인들의 생활을 통째로 바꾸었다. 2005년 오사카 부 히라가타(枚方) 시 인근 나스즈쿠리(茄子作) 유적에서 나온 5세기 백제 베틀은 백제인들이 왜인들에게 재봉술을 가르쳤다는 문헌 기록을 고고학적으로 입증했다. 백제 역사를 연구하는 일본인들의 시민단체 ‘백제회’를 이끌고 있는 하나무라(花村·77) 회장은 지난달 12일 기자와 만나 “일본서기에 5세기 초반 백제 재봉사가 일본 왕실에 건너왔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방사성 연대 측정을 한 결과 발굴된 베틀과 시기가 일치한다”고 했다. 

주거 형태도 일대 변화를 맞았다. 5세기 전까지만 해도 벽이 없이 지붕만 있는 움막집에서 살던 일본인들이 본격적으로 단단한 지붕과 흙벽을 만들어 살게 된 것도 백제인들로부터 영향 받은 바 크다. 오사카 부 나라(奈良) 현 가시하라(강原) 시에서 이런 형태의 집터가 처음 발견됐는데, 1990년대 중반 한국 공주에서도 비슷한 형태의 집터가 나오면서 백제식 주택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동북아역사재단 연민수 실장은 “6세기에는 백제식 부뚜막이 널리 퍼져 일본의 식생활을 크게 바꿨다”고 했다. 그전까지 일본인들은 캠핑장처럼 야외에서 취사를 했다는 것이다. 사비를 들여가며 한일고대사를 연구하고 있는 하나무라 회장은 “어린 시절 친구들이 건너온 나라(한국)와 내 조국(일본)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너무도 닮은 것이 많아 전율이 일 정도”라며 “교류의 역사를 젊은이들에게 더 많이 가르쳐야 한다”고 했다.

:: 구다라 ::

일본 사람들은 백제를 ‘百濟’라 쓰고 ‘구다라’로 읽는다. 고대 오사카를 구다라스(百濟州)로 불렀다. 백제를 일본말로 ‘구다라’라고 부르게 된 것은 부여의 백마강 나루터인 ‘구드래’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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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교 50년, 교류 2000년 한일, 새로운 이웃을 향해]<5>닌토쿠 왕가의 비밀

세계 최대 면적을 자랑하는 닌토쿠 왕릉 앞에서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거나 참배를 하고 있다. 잡목이 우거져 거대한 구릉처럼 보인다. 참배소 뒤쪽 다이센 공원에서 바라본 장면. 사카이=정위용 기자 viyonz@donga.com

어제(18일) 소개한 일본 최대의 코리아타운 오사카에 있는 미유키모리 신사에는 왕인 박사의 노래비가 서 있다. 재일교포와 일본인들이 6개월간 모금운동을 해 한국 돈 4600만 원을 들여 만든 이 비석에는 왕인 박사가 일본 16대 왕인 닌토쿠(仁德)의 즉위를 축하하며 지은 것으로 알려진 ‘나니와쓰(難波津·지금의 오사카를 지칭하는 말) 나루터의 노래’라는 제목의 간단한 시가 한 줄 적혀 있다. ‘나니와쓰에 피는구나 이 꽃은/겨울잠 자고 지금은 봄이라고 피는구나.’

시비 옆 안내판에는 ‘닌토쿠 왕이 왕위에 오르니 오사카에도 봄이 오고 매화꽃이 다시 피는 것처럼 새로운 왕의 즉위를 축하한다는 의미’라고 한일 양 국어로 친절하게 적혀 있다. 미유키모리 신사는 일본 최초의 통일국가인 야마토 정권의 기틀을 세운 닌토쿠 왕을 모시는 신사이다. 이런 신사에 백제인 왕인 박사의 노래비가 서 있는 연유는 무엇일까. 또 닌토쿠 왕은 누구이고 두 사람은 어떤 인연을 맺었기에 백제인이 일왕의 즉위를 축하하는 시까지 짓게 된 것일까. 이런 궁금증을 풀기 위해 닌토쿠 왕이 잠들어 있는 왕릉을 찾아 떠났다. 

오사카가 일본의 중심지였던 시대, 궁궐 옆에 세워졌던 대형 창고를 재현한 모형. 일본이 백제와의 교역에서 얻었던 물품들이 이곳에 가득 찼던 것으로 추정된다. 앞쪽의 여러 둥근 콘크리트들은 이 창고의 기둥들이 세워져 있던 곳이다. 사카이=정위용 기자 viyonz@donga.com

○ 세계 최대 무덤을 만든 절대 권력자 

닌토쿠 왕릉은 그 면적에서 이집트 피라미드, 중국의 진시황릉을 넘어서는 세계 최대 무덤으로 일본이 자랑하는 문화유산이다. 

지난달 21일 오전 11시 오사카 난바 역에서 전철을 타고 20분쯤 달려 사카이 시(市) 미쿠니가오카 역에서 내리자 바로 거대한 구릉과 맞닥뜨렸다. 길이 486m, 높이 35m의 거대한 왕릉이라고 해서 잔뜩 기대하고 왔는데 왕릉 안으로는 들어갈 수가 없었다. 처음과 끝을 가늠하기 어려운 산 하나를 보는 게 전부였다. 7분 정도 걸어 내려가 참배소 앞에서 카메라를 꺼내 들었지만 능 규모가 너무 커서 한 화면에 담기지 않았다. 

왕릉의 실체는 옆 다이센 공원 안에 자리 잡은 사카이 시 박물관에서야 어렴풋하게 접근할 수 있었다. 박물관은 닌토쿠 왕릉을 포함해 이 일대 20여 개 왕릉과 고분들을 관리하는 관리사무소 격이었다. 

마침 박물관에서는 닌토쿠 왕릉 내부와 외부를 재현한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다. 레이저 항공촬영으로 능 안을 찍은 사진을 보니 일부 경계선이 안 보이는 등 심하게 훼손된 모습도 보였다.

전시실 한쪽 벽에는 윗옷을 벗고 커다란 돌 더미를 진 남자들이 오르내리며 능을 조성하는 현장을 재현한 대형 그림이 걸려 있었다. 노예를 부리던 고대 시대 작업방식이었다. 최근 일본 건설 회사들이 첨단 장비로 무덤 공사에 투입된 인력을 계산해 본 결과 하루 2000명의 장정이 15년 8개월간이나 동원되고 이들이 져 날랐던 돌과 흙만도 5t 트럭으로 56만2300대 분량인 것으로 나왔다. 지금 기준으로 보아도 어마어마한 대규모 공사였던 것이다. 무덤의 주인인 닌토쿠 왕은 고대 시대에 그 정도 인력을 동원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통치력을 행사하며 중앙집권적 통일국가를 이끌었음이 분명해 보인다. 

일본 고대사학자들은 일본 고대사에서 실질적 왕권이 시작된 시점을 닌토쿠 왕으로 보고 있다. 그가 집권하던 시절 오사카가 얼마나 큰 번영을 이뤘는지는 오사카역사박물관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지난달 19일 시내 중심부에 있는 오사카역사박물관에 도착했더니 입구에서부터 거대한 고대 양식의 건물이 관람객을 맞았다. 데라이 마코토(寺井誠) 주임 학예원은 “고대 오사카 궁에서 창고로 쓰이던 건물을 복원한 것”이라며 “5세기 왕실의 교역 물품을 보관했던 것으로 총 16동 이상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창고 하나 길이만도 10m에 너비가 9m였는데 이런 건물이 16동 이상이나 있었다고 하니 수천 년 전 고대 시대에 얼마나 교역이 활발하고 절대 권력의 힘이 셌으면 이 정도였나 놀랍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물관은 오사카가 일본의 중심지로 야마토 시대를 이끈 시대를 ‘나니와 대세(難波 大勢)’라고 명명하며 이 시대를 열었던 인물이 바로 닌토쿠 왕이라고 밝혔다.

박물관 10층에 재현된 당시 궁전 내부 생활을 둘러보니 궁의 모습이 어렴풋하게 그려졌다. 눈길을 끌었던 것은 화려한 색상의 옷을 걸친 인형들이 가로 42m, 세로 21m의 대극전(大極殿)에 서 있었는데 입은 의상들이 우리 눈에도 익숙한 백제나 신라 귀족들이 입었던 것과 비슷했다.


○ 백제인을 사랑했던 닌토쿠 왕

닌토쿠 왕이 백제인들을 아끼고 사랑했다는 것은 여러 문헌에서 확인된다. 백제인 신하가 죽었을 때는 매우 슬퍼하며 따로 신사를 지어주었을 정도였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왕은 43년 9월에 백제인 ‘아비코’로부터 사냥용 매를 선물 받고 이 매를 백제인 신하 ‘사케노기미(酒君)’에게 건네주며 잘 기르라고 했는데 그만 신하가 죽고 만다. 왕은 이에 크게 슬퍼하며 따로 장례를 치러주고 그에게 ‘응견신(鷹見神·매를 돌보는 신)’이라는 시호까지 내린다. 

정재정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는 “한일 역사학계에서 닌토쿠 왕을 주목하는 이유는 그가 일본 고대 국가의 틀을 완성한 사람이기도 하지만 한반도에서 건너간 백제 도래인들과 매우 밀접하고 특별한 관계를 맺어 고대 한일 교류의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사람이기 때문”이라며 “도래인이 대거 살던 오사카를 수도로 삼을 정도로 왕실 차원에서 한반도와의 교류의 문을 활짝 열었던 상징적인 사람”이라고 했다. 

백제 왕실과 닌토쿠 왕실의 관계는 닌토쿠 왕릉에서 발견된 각종 유물들이 백제 무령왕릉 고분에서 발견된 유물들과 매우 흡사하다는 사실이 나오면서 더욱 확신을 갖게 했다. 대표적인 것이 청동거울(동경·銅鏡)이었다. 1872년 닌토쿠 왕릉에서 출토된 것이 1971년 백제 무령왕릉에서 발굴된 것과 거의 비슷해 한일 역사학자들로부터 ‘쌍둥이’ ‘복제품’ 소리를 들었을 정도였다. 한국 삼국시대나 고대 일본 왕의 무덤에서 발견되는 청동거울은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무덤 내 부장품으로 알려져 있다.

쌍둥이 유물은 또 있었으니 바로 두 무덤에서 각각 나온 환두대도(손잡이 끝에 둥그런 고리가 달린 큰 칼)였다. 고리 안에 세 발 달린 새가 한 마리씩 들어가 있는 것이 똑같았다. 이런 양식은 중국에서는 볼 수 없어 한반도에서 전래됐다는 학설이 유력하다. 

닌토쿠 왕은 오사카의 건설 과정에서도 백제인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미나미 미쓰히로(南光弘) 동오사카 문화재학회장은 “닌토쿠 왕은 홍수를 막기 위해 오사카의 물줄기를 바꾸는 제방공사를 했는데 이는 일본 최초의 대규모 토목공사였다”며 “당시 공사 때 백제인들이 기술자나 공사 감독관으로 일했다”고 말했다. 

닌토쿠 왕 당시 오사카 거주 인구의 3분의 1이 백제인이었다는 설도 있다. 박영혜 오사카 한국문화원장은 “한일 역사학자들이 마음의 문을 조금 더 연다면 고대 문헌에만 갇혀 있던 왕가들과 한일의 긴밀한 관계가 ‘신화’에서 깨어나 ‘역사’의 무대 위로 다시 올라올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 야마토 정권 ::

일본이 고대 국가를 형성하는 3세기 말부터 야마토(大和·나라 교토 오사카 일대) 지방에 등장한 거대 무덤들의 흔적을 통해 이 일대를 중심으로 고대 통일정권이 만들어졌으리라 보고 ‘야마토 정권’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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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교 50년, 교류 2000년 한일, 새로운 이웃을 향해]<6>日서 태어난 백제 무령왕

1971년 무령왕릉 발굴과 함께 출토된 석판 지석. 가로 41.5cm, 세로 5cm, 두께 3.5cm인 석판에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점선 안 한자)이 나이 62세 되는 계묘년(523년) 5월 7일에 돌아가셨다”고 적혀 있다. 이 지석을 통해 지석의 주인이 무령왕임이 밝혀지게 됐다(위쪽 사진). 아래쪽 사진은 무령왕릉 내부 평면도. 입구로 들어가 벽돌로 축성한 좁고 어두운 널길(연도)을 따라 들어가면 좀 더 넓은 널방(묘실)이 나오는데, 이곳에 무령왕과 왕비의 관이 놓여 있는 구조다. 동아일보DB

옛 문헌에는 백제인들이 왜(倭)로 갈 때 이용하던 주요 해상로로 쓰시마(對馬)∼이키(壹岐)∼가카라시마(加唐島)를 표지(標識) 섬으로 삼고 갔다는 기록이 많다.

2년 전인 2013년 6월 일본 규슈 국립박물관은 한일 역사학자들을 모아 옛날 백제인들과 왜인들이 오가던 이 바닷길을 검증하는 시도를 했었다. 그 결과 문헌 기록이 맞다는 결론을 얻었다. 실제 이키 섬을 출발하면 앞에 보이는 섬은 가카라시마뿐이다. 가카라시마는 수천 년 동안 우리 선조들이 배를 타고 일본으로 갈 때 나침반 역할을 했던 중요한 섬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곳 섬사람들에게는 전설처럼 ‘먼 옛날에 어떤 여인이 이 섬에서 아기를 낳고 샘물을 마셨다, 그때 태어난 아기는 훗날 매우 귀한 분이 되었다’는 이야기들이 전해 내려오고 있었다. 그러다 720년 편찬된 일본서기에 그 ‘귀한 분’이 바로 ‘백제 무령왕’이라는 기록이 나오게 된다. 일본서기의 내용을 현대식으로 요약하면 이렇다. 

“461년 4월 백제 개로왕(蓋鹵王·재위 455∼475년)이 일본 유랴쿠 천황(雄略天皇·재위 456∼479년)에게 백제 여인을 왕비로 추천해 보냈는데 그녀가 입궁하기 전 간통한 사실이 알려졌다. 유랴쿠 천황은 그녀를 죽인다. 

개로왕은 동생 곤지에게 분노한 일왕을 달래고 나라 운영을 보좌하라고 지시한다. 곤지는 ‘임금의 명은 어길 수 없지만 형님의 여인(군부·君婦)을 주시면 명을 받들겠습니다’라고 대답한다. 개로왕은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부인을 곤지에게 내주며 ‘여인이 산달이 가까워오고 있다. 만일 가는 도중에 아이를 낳으면 부디 배에 태워 속히 돌려보내도록 하여라’라고 했다.

개로왕과 곤지 두 사람은 작별인사를 나누고 곤지는 왜로 가는 항해에 나선다. 그러다 결국 임신한 여인이 곧 산통을 느꼈고 배는 가카라시마에 정박했다. 곧 아이가 태어났고 아이의 이름은 섬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사마(斯麻)’라 하였다. 일행이 배 한 척을 내어 아이를 돌려보내니 이가 곧 무령왕이다.” 

일본어에서 한자 ‘사(斯)’는 ‘시’로 발음되기 때문에 시마 왕으로 읽으며 이는 곧 섬에서 태어난 ‘도왕(島王)’이라는 뜻이다. 

일본서기의 내용들은 오랫동안 한국인들의 신뢰를 받지 못했다. 특히 왜왕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동생을 보내면서 임신한 자신의 부인을 딸려 보냈다는 대목은 현대적 시각으론 도저히 이해가 안 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 김현구 전 고려대 역사교육과 교수는 ‘백제는 일본의 기원인가’(창비)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당시 한국과 일본에는 임신한 부인을 총신(寵臣·임금의 총애를 받는 신하)에게 하사하는 풍습이 있었다. 따라서 개로왕이 임신한 부인을 동생 곤지에게 하사했다는 기록도 못 믿을 이유가 없다. 1971년 무령왕릉이 발굴되면서 일본서기의 기록은 더욱 설득력을 얻었다. 발굴된 무령왕릉 지석에 무령왕 이름이 ‘일본서기’와 완전히 일치하는 ‘사마(斯麻)’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곤지가 일본으로 가는 길에 태어난 아이가 무령왕이라는 이야기나 무령왕이 일본에서 태어난 뒤 귀국해 즉위했다는 것은 사실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시계를 돌려 1971년 무령왕릉이 발굴되는 장면으로 돌아가 보자. 그해 7월 한여름 전국은 긴 장마로 신음하고 있었다. 삼국시대 백제 고분군이 밀집해 있던 충남 공주시 서북쪽 송산리(오늘날 금성동) 언덕에서는 문화재 발굴단이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7월 6일 배수로 공사를 하느라 무심코 땅을 파던 한 인부의 삽에 뭔가 단단한 물체가 부딪쳤다. 손으로 헤집어 보니 흙을 구워 만든 벽돌이었다. 그런데 한두 개가 아니었다. 조금씩 더 파고 들어가 보니 이 벽돌은 거대한 아치형 구조물의 일부였다. 처음엔 다들 기존에 발굴한 6호 고분의 연장이려니 생각했다. 하지만 이 구조물이 또 다른 무덤의 입구라는 것을 알고 현장은 충격에 빠진다. 

1971년 7월 8일 발굴단이 무령왕릉 입구를 막은 벽돌을 치우고 무덤 안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위령제를 올리고 있다. 워낙 서두르다 보니 흰 종이 위에 북어 세 마리와 수박 한 통, 막걸리를 올려놓은 것이 전부였다. 동아일보DB

이튿날 서둘러 김원용 국립중앙박물관장을 단장으로 하여 문화재관리국 학예직들로 발굴단이 구성되어 공주에 집결했다. 본격적인 발굴이 시작되자 무덤은 점점 모습을 드러냈다.

입구는 벽돌 구조물로 막혀 있었고 그 틈을 석회가 단단히 봉하고 있었다. 석회를 제거하고 입구 아래까지 내려간 시간이 오후 4시. 누구의 무덤인지는 모르겠으나 백제 왕릉급이 분명해 보이는 옛 무덤 앞에서 발굴단은 왕의 영면(永眠)을 방해하는 것을 사죄하는 위령제를 올렸다. 위령제라고 해봐야 흰 종이 위에 북어 세 마리, 수박 한 통, 막걸리를 올려놓는 게 전부였다. 

맨 윗단의 벽돌 두 장을 제거하는 순간 마치 한증막처럼 흰 수증기가 뿜어져 나왔다. 1400년 넘게 밀폐 상태로 있던 무덤 내부의 찬 공기가 바깥의 더운 공기와 만나 일어난 현상이었다.

숨을 죽이고 들어간 발굴단의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컴컴하고 깊은 연도(羨道·고분 입구에서 시신을 안치한 방까지 이르는 길)였다. 연도 중간쯤 엽전이 올려져 있는 석판으로 다가가자 석판 위에는 이런 글이 새겨져 있었다. ‘寧東大將軍百濟斯麻王(영동대장군백제사마왕).’

발굴단은 다시 한번 놀랐다. 사마왕은 다름 아닌 백제 무령왕(武寧王·461∼523)이었기 때문이다.(이상은 권오영 씨의 책 ‘무령왕릉’에 나온 내용을 재구성한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44년 전 무령왕릉이 1400여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후손들에게 모습을 드러내는 과정은 영화 ‘인디아나 존스’의 한 장면을 보는 것처럼 긴장과 박진감이 넘친다. 

일제강점기 전국 각지의 고분이 파헤쳐지고 도굴꾼들이 활개를 치던 상황에서도 용케 완전한 형태로 살아남은 고분이 있다는 것 자체도 신기했지만 무덤의 주인이 꺼져가던 백제의 맥박을 다시 힘차게 돌려놓았던 무령왕이었다는 게 알려지자 한여름 전국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당시에는 먹고살기에도 바빴던 형편이라 조상들이 남긴 숭고한 문화유산을 감당할 수준이 못 됐다는 게 권오영 씨의 말이다. 

“지석(誌石)을 통해 무덤 주인이 무령왕과 왕비의 무덤이라는 발표가 나오자 현장은 집단 패닉 상태에 빠졌다. … 보도진들은 앞다투어 무덤 안으로 들어가려 했고 무덤 안에 들어가 유물을 촬영하다가 청동 숟가락을 밟아 부러뜨리는 불상사마저 일어났다. 밀려오는 구경꾼들을 통제해야 할 경찰마저 ‘나도 한번 구경하자’며 앞장설 정도였다.”

하기야 그때만 해도 그만큼 중요한 유적을 우리 손으로 발굴 조사한 경험도 없을뿐더러 발굴 조사와 관련된 행정조치도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했을 터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한국 못지않게 무령왕릉 발굴 소식에 흥분한 나라가 있었으니 바로 일본이었다. 일본 언론들은 발굴 시점부터 비상한 관심을 보이며 이듬해까지 현장 답사기를 싣고 관련 심포지엄을 열면서 발굴의 의미를 찾고자 부산했다. 발굴 직후 아사히신문은 ‘백제 왕릉 발굴조사는 역사적인 대발굴’이라면서 ‘일본에 불교를 전해준 백제 성왕의 아버지이면서 일본서기에도 이름이 나오는 백제의 25대 무령왕과 왕비의 무덤이라고 판명됐다’고 대서특필했다. 

동시에 갑자기 일본인들의 눈길이 쏠린 곳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무령왕이 태어난 섬 가카라시마였다. 기자는 이달 초 가카라시마를 향해 길을 나섰다.


:: 지석(誌石) ::

죽은 사람의 인적 사항이나 업적, 자손 등을 기록하여 묻은 판석이나 도판을 말한다. 무덤의 내역을 밝힐 수 있기 때문에 고분 발굴에서 매우 중요한 가치를 가진다. 



 얼마전 알리익스프레스에서 메일을 받고 꽤 고민했던 대륙의 윈도우 타블렛 CHUWI vi10.알리익스프레스 물건 치고는 상당히 빨리 도착해 오늘 드디어 손에 넣고 만져보기에 이르렀다. 결론은 가성비로는 상당히 괜찮은 물건이라는 것. 키보드 커버까지 포함해 175$라는 가격은 꽤나 매력적이다. 사진과 함께 살펴보기로 하겠다.




박스 포장. 나름 깔끔하다.



옆면에 붙은 이 스티커는 약간 촌스럽지만...



패키지 구성품 샷. 전원/USB 케이블과 본체, 설명서 등등과 키보드 커버로 구성된 평범한 구성.



특이했던 점은 출하 단계에서부터 앞뒷면에 액정 필름이 붙어서 나온다는 것. 다만 액정필름의 질도 썩 좋은 편은 아니고 기포도 꽤 들어가 있어서 아주 쓸만한 수준은 아니다. 그냥 생짜 액정으로 나오지 않았다는 정도로 의의를 삼으면 될 듯.



전체적으로 아이폰 4를 연상시키는 디자인. 특히 뒷면의 질감이 많이 닮았다. 저 중국어 로고만 없었으면 좀 더 당당하게 들고 다닐수도 있었을 텐데...



키보드 커버. 솔직히 이 키보드 커버를 주문할까 말까 좀 망설였었는데 받아보고 나니 함께 주문하길 백번 잘했다 싶음. 키보드 자체의 마감이나 촉감도 괜찮은 편이고 조작 반응성도 괜찮으며 스탠드로서의 활용성도 상당히 좋다. vi10을 사실 분이라면 키보드 커버도 함께 장만하시기를 추천.



나름 꼼곰하고 깔끔하게 마감된 키보드.



타블렛 연결단자 부분도 깔끔. 자석이 내장돼 있어 근처에 가져가면 바로 딱 붙으면서 연결된다.



커버 부분은 사진과 같이 위쪽 가운데가 반으로 접히는 구조. 처음엔 어떻게 사용하는 건지 몰라서 좀 당황했는데...



요렇게 우유팩처럼 접으면 양쪽의 자석판이 맞닿아 고정되면서 본체를 지지하게 된다. 나름 머리 썼는데? 하면서 감탄. 접힌 부분이 얇아서 본체가 흔들리지 않을까 걱정될지도 모르지만, 하단의 삼각형 부분이 꽤 견고하게 지지해주기 때문에 본체가 흔들리거나 넘어질 걱정은 안 해도 될 수준.



처음 기동시키면 깔려있는 윈도우 8.1이 기동된다. 언어설정은 중국어/영어로 정할 수 있으므로, 한국 사용자들이라면 먼저 영어로 설정하고 한국어 언어 팩을 설치해주면 OK.



언어팩 설치 후에 본 시스템 사양. CPU인 아톰 Z3736F는 64비트 프로세서이지만 설치된 윈도우는 32비트. 일부러 이렇게 해놓은 건지 아니면 실수인건지는 좀 더 알아봐야 할 듯. 여차하면 나중에 64비트로 새로 깔아보고도 싶다.



시스템 체험 지수. CPU나 메모리의 점수는 제법 괜찮다. 역시나 그래픽 점수가 좀 낮은 편.

뭐 전체적으로 고사양 3D 게임을 돌리는 건 그냥 포기하는 게 정신 건강에 이로울 듯.


처음 구입할 때에는 안드로이드 쪽이 더 비중이 높거나 반반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써 보니 이놈은 윈도우 쪽이 중심이고 안드로이드는 오히려 부가적인 기능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실제로 안드로이드는 4.4 버전이 깔려있고, 메이커 커스텀버전이라 2015년 5월 현재 나와 있는 5.x 버전대의 안드로이드는 아예 시스템 업데이트에서 인식도 못한다. 

윈도우 구동시에도 발열이 어느정도 있는 편이지만, 안드로이드에서 게임을 돌렸더니 좀 불안할 정도의 발열이 나기 시작. 딱히 그래픽이 엄청나게 좋은 게임을 했던 것도 아닌데... 인터넷 상에 올라오는 사용기나 소감을 읽어보면 역시 발열 문제가 있어, 인터넷/워드 등의 가벼운 사용을 주로 하거나, 써멀작업 등의 마개조를 하는 편이 낫다는 듯. 


아, 또 한가지, 이 녀석은 5Ghz 신호를 아예 인식 못하는 것 같다. 기가인터넷 사용을 하고 있어도 5Ghz 회선은 이놈에겐 무용지물이니 알아두도록 하자.



--- 추가정보들 ---


방열작업

http://t.co/jB5lIuRPaS


루팅하기

http://blog.naver.com/jeneria/220379563542

http://www.ppomppu.co.kr/zboard/view.php?id=wintab&no=51377&keyword=vi10


윈도우 클린설치

http://t.co/IqnCGP6L6r

http://techtablets.com/chuwi-vi10/downloads/


**중요**

Double Driver 등을 통해서 드라이버를 재설치할 경우

dd.exe(Double Driver 실행파일)의 속성 탭에서 호환성 모드를 윈도우 XP(서비스 팩 3)로 설정하고 실행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현재 운영체제에서 DPinst.exe를 실행할 수 없습니다' 운운하는 에러가 나오면서 드라이버 설치가 불가능하다. 반드시 설정하고 실행할 것!


SD카드 인식 문제있을 경우

http://m.blog.naver.com/rent83/220376647247


안드로이드 해상도 올리기(뿌연 화면 해결)

yoga2sharpness 설치(알 수 없는 소스 설치 체크 후 apk 설치)

https://github.com/Matshias/yoga2sharpness


전원 불량시 참고될 만한 글

http://m.ppomppu.co.kr/new/bbs_view.php?id=wintab&no=42657


윈도우 10 프리뷰 설치방법

http://www.si02bf.com/doku.php?id=windows10




목적


 - DLNA를 사용한 가정용 홈미디어서버 : 스마트TV, 스마트폰, 태블릿, PS3등 다양한 기기에서 액세스 가능한 멀티미디어 서버

 - Transmission을 사용한 토렌트 서버 : 위 홈미디어에서 볼 동영상 등 자료의 다운로드용

 - VSFTP를 사용한 FTP 서버 : 저장된 멀티미디어 자료들을 외부에서도 액세스 가능하게

 - CUPS를 사용한 프린터 서버 : 스마트폰과 태블릿에서 언제든지 무선으로 프린트가 가능

 - Nginx를 사용한 웹 서버 : MySQL과 워드프레스를 사용한 웹사이트 구축



기본 설정 및 준비


1. 라즈베리파이 준비


 - 본체, 유전원 USB 허브, 외장하드, SD카드, 모니터, HDMI 케이블, 마우스, 키보드(USB 동글 1개로 둘다 접속되는 세트가 좋음), 랜선, 공유기

 - 전원 스위치가 따로 없고 USB 케이블이 연결되면 바로 전원이 켜지므로 주의. 우선은 PC쪽에서 운영체제 설치를 준비한다.

 - http://www.raspberrypi.org 접속 > DOWNLOADS > RASPBIAN 다운로드

 - 윈도우라면 Win32 Disk Imager를, 맥OS라면 Raspberry-PI-SD-Installer-OS-X-master를 다운로드하여 설치(http://echo.tistory.com/34 참고)

 - 이 프로그램들을 사용하여 아까 다운로드받은 RASPBIAN을 SD 카드에 복사

 - 복사된 SD카드를 본체의 SD슬롯에 꽂고 모니터, 마우스/키보드, USB 케이블을 연결. 전원이 켜진다

 - raspi-config를 이용한 기본세팅을 해준다. 파일 시스템 확장, 유저 패스워드 변경, 한글 키보드 세팅 등을 해준다. 특히 터미널 환경의 한글 관련 세팅은 이 부분에서 하게 되므로 유의.

 - 모든 텍스트 편집은 nano를 이용한다. 웹 강좌에는 vi를 이용하는 예제도 많이 나와 있으나 nano로 대신해도 전혀 문제가 없다.


2. 인터넷 연결 및 포트 포워딩, DDNS 사용


 - 랜선이 연결되면 ip주소가 할당되고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게 된다.

 - 기본 설정은 DHCP로 가변 ip 접속이 되나, 다양한 설정을 하거나 외부에서 원격접속을 하는 데에 불편하므로 내부 ip를 고정으로 설정하도록 한다.

   (http://withcoding.com/46 참고)

 - 다른 윈도우 PC에서 192.168.0.1(공유기 설정화면)에 접속한 뒤 NAT/라우터 관리 > 포트포워드 설정 으로 간다.

 - 위쪽란의 '규칙이름'에 원하는 접속의 이름, '내부 ip 주소'에 위에서 고정으로 설정한 라즈베리 파이의 내부 ip 주소를 입력한다.

 - 아래의 프로토콜에서 '외부 포트'는 앞으로 외부에서 접속할 때 사용할 포트(임의대로 설정함, 보통 80부터 시작해서 증가시키게 되지만, 80포트는 일반적으로 포트를 생략할 때의 기본 포트로 지정되므로 빼고 지정하는 것이 좋다)를 지정한다. 옆에 있는 '내부 포트'는 해당 외부 포트로 접속했을 때 집안 공유망 내부에서 접속될 내부의 ip포트를 설정한다. 쉽게 말해서 집 밖에서 안으로 들어올 때 밖에서 여는 문과 안에서 열리는 문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일단은 이런게 있다는 것만 알아두고 넘어간다.

 - 외부에서 집의 라즈베리 파이에 접속할 경우 공유기의 외부 ip 주소를 이용해 접속하게 되는데, 이것도 항상 가변이며 숫자 ip이므로 외부에서 접속하기가 불편하다. iptime 공유기를 사용할 경우 임의대로 받을 수 있는 DNS 도메인이 있어 이것으로 외부 ip를 대신할 수 있다. 굉장히 편리하므로 받아두는 것이 좋다. 메뉴의 고급 설정 > 특수 기능 > DDNS 설정 으로 가서 '호스트 이름'에 원하는 도메인 이름, '사용자 ID'에 원하는 ID, '사용자 암호'에 원하는 암호를 각각 설정하고 추가 버튼을 누른 뒤 아래의 '접속 상태'가 '정상 등록'으로 나오면 OK.


3. 윈도우에서 원격 접속 가능하게 하기


 - xrdp 설치 후 윈도우에서 원격 데스크탑 연결을 사용 (http://www.rasplay.org/?p=2571 참고)

 - 맥에서 원격 접속을 할 경우 맥 앱스토어에서 Microsoft Remote Desktop 앱을 찾아 설치해 사용한다.

 - 같은 공유기의 내부 네트워크에서 접속할 경우 접속이 잘 되나 외부에서 DDNS URL을 사용해 접속하려 할 때에는 원격 데스크탑 전용 포트를 이용해야 한다. 외부 ip는 원하는 ip를 지정하고, 내부 ip는 3389로 설정하면 외부에서도 DDNS URL을 이용해 원격 접속이 가능해진다.


4. X-window 관련


 - 커맨드라인에서 startx를 치면 X-윈도우가 뜬다. 기본적으로는 윈도우 사용법과 크게 다르지 않다. 

 - 커맨드라인에서 sudo su -를 치면 루트권한으로 변경된다. X-윈도우는 루트계정으로 시작했을 때와 일반사용자 계정으로 시작했을 때 약간씩 다르므로 주의.

 - 막 설치한 상태에서는 X-윈도우에서 한글 입력이 불가능하므로 iBus라는 IME를 깔아주어야 한다. (http://www.rasplay.org/?p=3786 참고)

 - X-윈도우에 기본내장된 미도리 브라우저는 상당히 느리고 무거우며 탭 브라우징도 불가능하므로, 에피파니 등의 더 나은 브라우저를 설치해 사용한다. (http://www.itworld.co.kr/news/89324, https://www.raspberrypi.org/web-browser-released/ 참고)

 - 보통 일반적인 모니터에 라즈비안을 깔았을 경우 화면 둘레에 검은 사각형 테두리가 보인다. 이 테두리를 없애고 화면을 꽉 차게 만들 수 있다. http://www.webtechgadgetry.com/2013/12/make-raspberry-pi-use-full-resolution-monitor/ 를 참고하여, /boot/config.txt 파일 안에서 모든 overscan_ 명령 앞에 #를 붙여 주석처리하고, disable_overscan=1 로 지정한다. 재부팅하면 테두리가 없어진다.


5. 외장하드 인식시키기


 - 라즈비안은 외장하드를 접속시켜도 바로 폴더로 인식되지 않는다. 접속된 외장하드는 라즈비안의 파일 시스템에 있는 폴더 중의 하나로 마운트시켜서 사용하게 된다.

 - 윈도우에서 사용하고 있던 외장하드는 보통 NTFS 파일시스템을 사용하나, 라즈비안의 기본 파일시스템은 FAT32이므로 그냥은 NTFS 하드를 읽을 수 없다. sudo apt-get install ntfs-3g 명령을 사용해 NTFS 파일 시스템 지원을 설치한다.

 - 외장하드를 마운트시킬 폴더를 mkdir 명령으로 미리 만들어둔다.

 - 이후에는 blkid 명령으로 연결된 USB 장비를 확인해서 UUID와 타입을 메모해둔다.

 - /etc/fstab 파일을 열어서 부팅될 때마다 자동으로 해당 장비가 원하는 폴더에 마운트되도록 설정한다. (http://www.berrycracker.net/archives/747 참고)



프로그램들 설치 및 설정


1. SAMBA 설치


 - http://webcreate.tistory.com/301 참고


2. VSFTP 설치


 - http://jonghyunkim816.blogspot.kr/2014/01/ftp.html 를 참고하여 설치

 - FTP 서버는 기본적으로는 내부 포트 21번을 사용하므로, 포트 포워딩으로 원하는 외부 포트에 내부 포트 21번을 대응시키면 외부에서도 ftp://DDNS도메인:외부포트 로 접속할 수 있다. DICE플레이어 등의 FTP 서버 연결을 지원하는 미디어 플레이어도 이 주소를 입력해서 사용 가능하다.

 

3. DLNA 서버 설정 


 - http://www.htpcguides.com/install-readymedia-minidlna-1-1-4-raspberry-pi/ 참고

 - minidlna server 패키지 설치 : sudo apt-get install minidlna

 - 미디어 파일을 새로운 폴더에 넣을 경우 mkdir 명령으로 폴더 생성 > chmod로 폴더 권한을 777로 설정

 - 환경설정 : /etc/minidlna.conf 파일 편집

 - 윗단계에서 새로 만든 폴더를 사용할 경우 해당 폴더를 지정하고, 외장하드를 마운트시킨 폴더를 사용할 경우 마운트시킨 폴더명을 지정한다

 - 미디어 폴더를 여러 개 지정(2개 이상의 외장하드를 연결)하고 싶을 경우 단순히 media_dir=폴더명 명령을 여러줄 주면 된다. 1.1.4 버전을 설치했는지 확인하자.

 - minidlna.conf 파일의 가장 윗부분에 DLNA 서버가 사용할 내부 포트의 설정 항목이 있다. 보통은 기본으로 설정된 8200 포트를 사용해도 무방하다.

 - 다른 PC에서 웹브라우저를 띄우고 라즈베리 파이의 고정 ip:8200(기본설정 포트)를 치면 DLNA 서버의 현황이 표시된다.

 - 외부에서 위 DLNA 현황을 보고 싶을 경우, 포트포워드에 내부포트 80 <--> 외부포트 8200을 설정해준 뒤, 외부에서 DDNS 도메인:80을 치면 해당 화면이 보이게 된다.

 - 같은 공유기에 물려 있는 디바이스는 이제 전부 DLNA 서버의 미디어 공유가 가능해진다.

 - 글 편집 시점에서 각 디바이스에 가장 추천할만한 DLNA 어플리케이션은 다음과 같다.

   iOS : OPlayer Lite(무료), MediaConnect(무료), VidOn Player(무료)

   Android : BubbleUPnP, DicePlayer, ES파일탐색기 + MX플레이어(전부 무료)

 - 4K 영상은 LG 스마트 TV에서 miniDLNA로 재생이 불가능한 것을 확인

 - 보통은 위 블로그의 설치방법에 나온대로 따라하고 inotify 등을 수정해주면 자동적으로 DB 갱신이 잘 되나, 가끔 오류로 갱신이 안될 경우가 있다. 이럴 때에는 /var/cache/minidlna/ 에 있는 files.db 파일을 지워주고 minidlna 서비스를 재실행해주면 DB를 새로 만들게 된다. 

 - miniDLNA는 라즈베리 파이의 전원이 꺼지거나, 하드디스크가 분리되면 전체 미디어를 전부 새로 스캔해서 DB를 완전히 다시 만드는데, 라즈베리 파이는 처리속도와 파일복사 속도가 그리 빠르지 않아서 이 미디어 스캔이 상당히 시간이 걸린다. 이 스캔이 완료되기까지는 제대로 미디어 파일을 감상할 수 없으므로 불편하다. 이것을 개선하려면 fastscan을 사용한다. 명령 프롬프트를 띄우고 다음과 같이 입력한다. 재스캔 속도가 10배 정도 빨라진다고 한다.


 git clone https://code.google.com/p/minidlna-fastscan/

 cd minidlna-fastscan/

 ./configure

 make


 - miniDLNA 서버를 이용해 영상을 감상할 때, mkv 파일 중에 다중 자막이나 다중 오디오 트랙이 내장되어 있는 경우 스마트 TV에서 내장 자막을 우선하여 외부 자막을 읽어오지 못하거나, 오디오 트랙 중 원하지 않는 외국어 트랙을 재생하고 원하는 오디오 트랙을 재생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이럴때는 mkv 파일을 수정해서 내장 자막이나 오디오 트랙을 삭제하는게 가장 속편하다. mkvmerge (구버전)나 mkvtoolnix 등의 툴을 사용해서 삭제한 mkv 파일을 새로 만든다. 특히 mkvtoolnix는 여러 편으로 이어진 드라마 등을 한번에 작업 등록해서 빠르게 처리하는 것이 가능하므로 이쪽을 추천한다. 이 툴은 리눅스 버전도 있어서 라즈베리 파이 상에서 apt-get으로 설치해서 쓸 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영상을 새로 생성하는 처리인만큼 라즈베리 파이에서 하지 말고 데스크탑에서 한번에 빠르게 처리하는 것이 낫다.



 Ctrl + N 키를 눌러 새 작업을 만든 뒤 Alt + A나 아래쪽의 Add files 버튼을 눌러 영상을 불러온다. 내장 자막이나 오디오 트랙의 제거를 할 때에는 하나의 작업 당 하나의 영상 파일만 불러오도록 한다.


 


 영상이 로딩되면 위 그림과 같이 아래에 해당 영상 안에 포함된 트랙들이 보이게 된다. Type과 Language 부분을 확인해서, 필요없는 부분(위 예제에서는 영문 음성과 자막을 선택했다) 을 고르고 오른쪽 위의 Mux this track 부분을 no로 선택해주면 지우는 것이 된다.


 


 원하는 트랙을 뺐으면 위의 Output 탭을 선택하고




 Output file 부분에서 저장될 경로와 파일명을 지정해준 뒤 아래의 Start muxing 버튼을 눌러주면 작업이 등록된다. 자막/트랙제거작업을 할 다른 파일을 더 추가하려면 마찬가지로 새 작업 추가 단계부터 반복하면 된다.




 왼쪽의 Job queue 버튼을 누르면 현재 등록된 작업들과 그 진행 상태를 볼 수 있다.



4. Transmission 설치


 - http://dovetail.tistory.com/15 참고

 - 기본 사용 포트는 9091로 설정되어 있으므로 포트 포워드는 외부: 원하는 포트, 내부: 9091 로 지정

 - 외부에서도 https://DDNS 도메인:외부포트 로 접속하면 토렌트 다운로드 상황을 알 수 있고 폴더 아이콘을 클릭하면 새로운 토렌트를 추가할 수도 있다.

 - 트랜스미션의 웹 UI는 /usr/share/transmission/web 폴더에 있는 파일들을 수정하여 고치거나 디자인을 변경할 수 있다(특히 각 파일의 다운로드 상태 바의 정보 부분은 /web/javascript/torrent-row.js 파일을 수정). https://forum.transmissionbt.com/viewforum.php?f=8 에서 웹 UI에 관한 다른 유저들의 정보나 의견 등을 참고할 수 있다. 자신들이 만든 새로운 웹 UI 스킨을 올려놓기도 한다.

 

5. CUPS 프린터서버 설치


 - http://dovetail.tistory.com/29 참고

 - 기본 사용 포트는 631로 설정되어 있으므로 포트 포워드는 외부: 원하는 포트, 내부: 631 로 지정

 - 제대로 설정이 되었으면 iOS 기기의 에어프린트에서 이용이 가능해진다.

 

6. MySQL, nginx, PHP5 설치


 - http://www.withover.com/2014/12/nginx-php5-mysql.html 참고해서 nginx 패키지와 php5-fpm 패키지를 설치한다

 - /etc/nginx/sites-available/default 파일을 편집한다. 위 사이트 링크에도 나와 있으나 주의깊게 고치지 않으면 php가 작동하지 않는 부분이 있으므로 주의.

 - 라즈베리 파이 파일 시스템 중 원하는 위치(외장하드도 관계없다)에 www 폴더를 만들고, root /usr/share/nginx/www; 의 경로를 방금 만든 www 폴더의 경로로 변경

 - 그 아랫줄에 있는 index index.html index.htm; 부분에 index.php를 추가하되, index.html보다 앞쪽에 오도록 한다. index index.php index.html index.htm; 로 하면 된다.

 - 밑에 있는 이하의 부분을 index.html에서 index.php로 바꾼다. 


  location / {

    try_files $uri $uri/ /index.php; 

  }


 - 밑에 있는 이하의 부분을 index.html에서 index.php로 바꾼다.

 

   location ~ .php$ {

    fastcgi_split_path_info ^(.+\.php)(/.+)$;

    #NOTE: You should have “cgi.fix_pathinfo = 0;” in php.ini

    fastcgi_pass unix:/var/run/php5-fpm.sock;

    fastcgi_index index.php; 

    include fastcgi_params;

  }

}


 - http://itscom.org/archives/3486 의 5번 항목부터 참고하여 php 부가 패키지들을 설치해준다.


7. 워드프레스 설치


 - http://www.rasplay.org/?p=1416 를 참고하여 설치

 - /etc/nginx/sites-available/wordpress 를 편집할 때에는 자신이 설정한 경로에 맞게 수정하는 것을 잊지 말도록


   ## Your only path reference.

   root /var/www/wordpress/public_html;

   listen 80;


   이 부분과

   

   access_log /var/www/wordpress/logs/access.log;

   error_log /var/www/wordpress/logs/error.log;

   

   이 부분에 주의.

   

 - 또한 mysql을 사용해서 DB를 만들 때에 아래 부분에서 'pi'는 패스워드이므로 자신이 패스워드를 임의로 설정했다면 그것도 맞게 바꿔 줘야 한다.

 

   mysql> GRANT ALL PRIVILEGES ON wordpress.* TO "wordpress"@"localhost"IDENTIFIED BY "pi"; 

   

 - 잘 설치되었다면 웹브라우저에서 라즈베리파이가 설치된 내부 ip를 치면 워드프레스 설정화면이 나타난다.

   외부에서 접속하기 위해서는 DDNS 설정을 하고 라즈베리파이의 내부 ip를 지정한 뒤 포트포워드에 외부포트 80, 내부포트는 없음으로 규칙을 추가하면 된다.

   

8. 워드프레스 폰트 설정


 - 테마를 설치했으나 폰트(특히 한글)가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자신이 원하는 폰트를 구글 폰트 등에서 가져와 사용하거나, 아예 워드프레스 폴더 안에 넣어서 웹폰트로 사용할 수 있다.

 - 우선은 원하는 폰트를 찾는다. http://www.google.com/fonts/earlyaccess 에 있는 폰트들은 바로 css를 가져와 사용할 수 있으므로 편리하다. 나눔고딕을 사용하고 싶다면 여기에서 찾아다 사용하면 된다. 적용 방법은 http://martian36.tistory.com/1220 를 참고

 - 하지만 원하는 폰트가 없다면 다운로드를 받는다. http://goo.gl/OUyWxy 참고해서 woff 파일을 받고, 워드프레스가 설치된 public_html 폴더 안에 넣어준다.

 - 텍스트 편집기로 적당한 이름의 css 파일을 만들고, 아래와 같은 코드를 넣는다.


   /*

    * Noto Sans CJK KR (Korean) 

    */

   @font-face {

   font-family: 'Noto Sans CJK KR';

   font-style: normal;

   font-weight: 400;

   src: url(http://경로명/NSKR300.woff);

   }

   

   다 넣었으면 저장하고 마찬가지로 public_html 폴더 안에 넣는다.

   

 - http://martian36.tistory.com/1220 에서 한 것과 같은 방법으로 WP Google Fonts 플러그인의 설정에 들어가 Custom CSS 코드를 넣는다. @import url() 부분의 주소에 아까 올린 css 파일의 경로를 넣어주면 된다.


9. 라즈비안 업데이트


 - http://jpub.tistory.com/394 참고


 모 사이트에서 최근 도스 게임들이 무료공개되어 꽤 화제가 되고 있는 것 같다. 시대가 바야흐로 백 투더 퓨처 2의 미래 배경인 2015년이 되고 이젠 2000년대도 10여년 전 이야기가 되다 보니 도스 게임이란게 뭔지도 모르는 세대가 늘어가는 것이 당연해지는 느낌이다. 하지만 나같은 7, 80년대생들에게 도스 게임들은 단순한 옛 추억이 아니라 교과서이고 영원한 마스터피스임에 틀림없다. 


 주옥같은 게임들이 넘치는 도스 시대이지만 특히 나에게 인상깊었던 것은 TITUS사의 게임들이었다. 중학교 시절 불법복사를 통해 처음 접했던 이 회사의 게임들은 나를 단번에 사로잡았고, 다음 게임, 또 다음 게임을 해봐도 그 완성도에는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도 내가 좋아하는 게임들, 내가 만들고 싶어하는 게임관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그들의 발자취를 한번 살펴보고자 한다.



1. 어떤 회사인가



 이 회사의 정식 명칭은 TITUS Interactive이다. TITUS Software, TITUS Games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던 시절도 있었다. 프랑스 파리에 위치한 게임회사로, 1985년에 Eric Caen과 Herve Caen 두 형제에 의해 창업되었다. 


Herve Caen


Eric Caen


창업 시기가 시기인 만큼, 아미가, 아타리 ST, 코모도어 64 등등의 클래식 컴퓨터용 게임을 만들면서 사업을 시작했고 90년대에 들어서는 도스용 게임도 만들기 시작했다. 이렇게 게임 시장의 초창기부터 활동을 해왔으니만큼 하드웨어의 퍼포먼스를 바닥까지 긁어내 만드는 개발력에는 일가견이 있는 회사였다. 하지만 이런 초창기 개발사들의 문제점이 그렇듯 진화하는 플랫폼과 업계의 트렌드에 기민하게 대응하지 못하고 점점 쇠락해 갔다. 특히 90년대 중후반부터는 PC를 벗어나 콘솔 게임을 제작하기 시작했는데 이들 게임의 평이 꽤나 좋지 못했고,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유명 게임 웹진들로부터 부정적인 리뷰를 받는 일도 늘어났다. 결과적으로 TITUS는 2005년에 파산하고 만다. (참고 : http://en.wikipedia.org/wiki/Titus_Software)


 다만 시장의 초창기와 도스 시절까지 TITUS는 상당히 잘 나간 회사였다. 옛날엔 배틀체스와 MDK, 어스웜 짐, 플레인스케이프: 토먼트 등, 그리고 조금 시간이 지나서는 발더스게이트, 폴아웃으로 유명했던 Interplay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이 Interplay는 원래 1983년에 Interplay Productions로 시작했는데(참고로 창업주는 요즘 웨이스트랜드 2로 핫한 브라이언 파고이다), 1998년 자금 위기에 봉착한 Interplay에 무려 3500만 달러를 투자해 구원해준 것이 바로 TITUS였다. 


Brian Fargo


 덕분에 TITUS의 공동 창업자 Herve Caen은 Interplay의 CEO가 되고, 사명도 Interplay Entertainment로 바꿔 새출발을 하게 된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Interplay는 2006년 다시금 파산하는데, 이 과정에서 Black Isle 스튜디오를 분사독립시키게 되고 폴아웃의 IP를 베데스다에 판다. 폴아웃에 관한 베데스다와의 법적 분쟁은 최근에 널리 알려져 있으니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참고 : http://en.wikipedia.org/wiki/Interplay_Entertainment) 


 다만 브라이언 파고는 Herve와 사이가 꽤 좋지 않았던 모양이다. Herve는 콘솔게임을 주력으로 하고 싶어했고 보다 캐주얼한 게임을 만들려고 했다. 브라이언은 웨이스트랜드를 비롯한 그의 캐리어에서 확인할 수 있듯 보다 진지한 성인 지향의 게임을 만들고 싶어했다. 이것이 결국 브라이언 파고가 인터플레이를 떠나 엑자일 스튜디오를 세우는 직접적 원인이 되는데, 그의 시리어스한 RPG를 좋아하는 게이머들에게 있어 TITUS와 Herve는 악당으로 비쳐도 할 말은 없을 것이다. (참고 : http://farfromearth.blog104.fc2.com/blog-entry-97.html)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양측의 게임 철학과 가치관이 충돌했을 뿐으로, TITUS가 본래부터 추구하던 누구나 간단히 즐길 수 있는 아케이드 플랫포머 게임도 절대 잘못된 생각이라고는 할 수 없다. 



2. TITUS가 가장 빛나던 시기의 게임들


 한국의 클래식 게이머들에게 TITUS가 알려진 계기는 아마도 게임월드와 같은 잡지 소개 및 불법 복제라 할 것이다. 위에 소개했듯이 옛날부터 게임을 만들어 오고 있었지만, 이들의 게임이 어느 정도의 레벨에 올라 원숙한 맛을 내기 시작한 것은 실질적으로 90년대의 도스 게임부터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며, 국내 게이머들에게 주목받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이다.


1) 선사시대(Prehistorik) : 1991년




 큰 인기를 구가했던 TITUS의 출세작. 선사시대 원시인을 테마로 한 횡스크롤 플랫포머 액션 게임. 다양한 장르를 만들어온 TITUS였지만 대부분 게임 시스템 자체를 놓고 보면 단순한 슈팅이나 일자 진행형 액션이 많았는데, 이 작품부터 좀 더 복합적인 스테이지 구성과 다양한 오브젝트, 기믹들이 등장한다. 어딘지 모르게 전반적으로 너무 빠르고 허술하던 캐릭터들의 움직임과 조작도 보다 부드러워지고 입체적이 된다. 


  또한 이 게임을 열심히 플레이해본 게이머들은 알겠지만, TITUS 게임들의 특징인 숨겨진 요소들이 이 게임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위 영상 2분 경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첫번째 물구덩이에는 아이템이 가득 숨겨져 있다. 보통은 물에 빠지면 즉사이므로 이런 곳은 들어가 보지 않게 되지만 한번 이런 것을 발견하게 되면 그 다음부터 스테이지 구석구석을 찾고 다니게 된다. 그러다가 숨겨진 장소나 아이템을 찾아내는 데에 성공하면 그 쾌감이란! 일일이 찾지 않아도 클리어에는 전혀 문제가 없지만 이런 숨겨진 요소들을 찾는 재미에 빠져든 유저들은 이 게임과 제작사인 TITUS에 주목하게 된다.


 

 2) 블루스 브라더스(BLUES BROTHERS) : 1991년






 존 랜디스 감독의 1980년도 뮤지컬 코미디 영화를 게임화한 것으로, 위의 선사시대와 같은 1991년에 릴리즈되었다. 아마도 이 게임이 조금 더 나중에 제작되었다고 생각되는데, 선사시대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다양한 시도와 게임플레이가 도입된 작품이기 때문. 


 2인 동시 플레이가 지원된다거나, 스테이지를 선택해가며 진행하는 것이 가능해진 등 다양한 개선점이 있었지만 게임성에 있어서 가장 큰 혁신은 아이템의 존재이다. 필드 구석구석에 놓여 있는 상자를 집어들고 이동하여 원하는 적에게 던져서 공격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 상자는 밟고 위에 올라설 수도 있어서 높은 곳으로 이동할 때 사용하는 퍼즐적 요소도 자연스레 갖추게 된다. 다만 이때는 이런 필드 오브젝트의 개념이 처음 도입된 것이라 들 수 있는 아이템은 상자 한 종류로 제한되어 있었고, 한번 집어든 상자는 무조건 던져서 없애버릴 수밖에 없는 등 한계점이 많았다. 이런 단점은 이후 발매되는 Moktar와 TITUS The Fox에서 획기적으로 개선된다.




 게임의 전체적인 구성이나 위에서 언급한 던지는 상자의 존재는 캡콤에서 패밀리 컴퓨터(NES) 용으로 개발한 '칩과 데일의 다람쥐 구조대'(Chip N' Dale Rescue Rangers) 시리즈로부터 꽤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실제 게임 플레이 영상을 보면 상당히 비슷함을 알 수 있다. 


 전작인 선사시대에서 성공적으로 구현했던 숨겨진 요소도 역시나 확실하게 파워업해 등장하는데, 곳곳에 숨겨진 아이템은 물론 공개 후 꽤 시간이 지나서 밝혀진 2단 점프의 존재도 매니아들의 지지를 얻는 계기가 됐다. 상자를 들면 점프의 높이가 낮아지는데 이 때문에 평소 갈 수 있던 지역을 못 가게 된다. 그러나 2단 점프를 사용하면 평소의 점프 높이만큼 뛰는게 가능해져 상자를 든 채로 평소와 같이 움직여 다닐 수 있게 되는 것. 

 

대표적으로 2단 점프를 활용할 수 있는 곳. 상자를 들면 점프 높이가 낮아져 사다리를 탈 수 없지만, 

사다리 밑에서 두번 점프하면 상자를 들고 사다리를 올라가 위에 있는 적을 해치울 수 있다


 물론 2단 점프 자체는 다른 게임에서도 흔하게 있는 시스템이지만, 이 게임에서는 평소에는 점프를 두번 해도 2단 점프가 나오지 않는다. 오로지 위에 사다리 같은 뭔가 잡을 수 있는 오브젝트가 있을 때에만 2단 점프를 해서 올라가는 것이 가능했기 때문에, 처음엔 아무도 이 게임에서 2단 점프가 가능하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선사시대의 페이지 단위 스크롤에서 벗어나 프리 스크롤을 도입한 덕분에 게임이 굉장히 스무스해지고, 엘리베이터 등의 신 요소가 대거 도입되어 게임의 볼륨도 엄청나게 커졌다. 


 오늘날 1, 20대 게이머들로서는 아마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겠지만, 90년대 초반의 도스용 PC 게임들이라는 것은 현재의 게임과는 개념적으로 완전히 다른 환경이었다. 대부분의 PC는 겨우 16비트 연산이 가능한 시절이었고, 다이렉트X나 OpenGL과 같은 그래픽 가속 솔루션도 없었다. 프로그래머들은 PC의 비디오 메모리를 조작해서 화면에 직접 점을 찍어 그래픽을 나타내야 했다. 이 때문에 이 당시의 PC 게임들은 퍼포먼스가 천차만별이었고, 화면의 스크롤이나 캐릭터의 움직임을 제대로 구현하는 것 자체가 큰 일이었다. 화면 스크롤이 아예 안되거나, 된다고 해도 픽셀 단위로 세밀하고 부드러운 스크롤이 되는 게 아니라 타일 단위로 툭툭 끊어지면서 스크롤되는 것이 일상다반사였다.






 초대 악마성 드라큘라의 도스 버전과 패미컴 버전. 패미컴 버전은 8비트임에도 불구하고 스프라이트 기능이 탑재된 게임 전용 머신인 덕분에 움직임과 스크롤이 훨씬 부드러운 것을 알 수 있다. 뒤집어 말하면 그만큼 당시 도스 환경에서 부드러운 애니메이션을 구현하는 게임을 만들기가 어려웠다는 뜻이 된다. 


 TITUS의 놀라운 점은 이런 시대의 도스 환경에서 게임기에 버금갈 정도로 부드러운 애니메이션과 화면 스크롤을 구현해냈다는 점에 있다. 앞서 언급했듯 이는 어셈블리 프로그래밍을 통해 하드웨어 레벨에서 그래픽 함수를 만든 TITUS의 기술력 덕분에 가능했던 일이다.


 다만 문제는 이렇게 게임 시스템이 정교해지고 복잡해진 덕분에 버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특히 상자를 들고 던지는 부분의 알고리즘이 깔끔하게 마무리되지 못한 덕분에 다른 게임 요소들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대표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증상이 있다.


 - 상자를 들고 던져서 날아가는 상자가 화면에서 사라지기 전에 재빠르게 다른 상자를 들면 날아가던 상자가 공중에 멈춘다. 이 상자는 여전히 판정을 갖고 있어 적이 오다가 상자에 닿으면 상자에 맞은 것으로 처리되어 죽는다. 상자가 공중에 떠 있는 동안 다른 상자를 들려 하면 상자가 없어져 버리니 주의해야 한다. 


 - 2P 캐릭터인 엘우드는 상자를 든 채로 전속력으로 이동해 적에게 몸으로 부딪치면 바로 적을 죽일 수 있다. 아마 캐릭터 스프라이트가 날씬한 덕분에 피격판정도 작아서 가능한 현상인 듯. 버그지만 아주 유용하다. 단 이동 중 멈춰서거나 해서 속도가 전속력이 아닐 경우에는 이쪽이 대미지를 입으니 주의. 원거리에서 총을 쏴대는 경찰 등은 거리 계산을 잘 하지 않으면 좀 위험하다.


상자를 던지지 않았는데도 맞고 날아가는 건달


 - 국내에 퍼진 복사본은 2인 동시 플레이를 할 경우 엘리베이터가 내려오지 않아 진행이 불가능한 버그가 있다. 이 게임의 악명높은 버그인데 일각에서는 복사판의 범람을 막기 위한 의도적인 조작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아마 이 부분이었던 듯


 - 1스테이지 후반에 등장하는 우산은 1회용 아이템으로 얻으면 얻어맞거나 내던지지 않는 한 높은 곳으로 점프 후에 천천히 활공하며 내려오게 된다. 



 문제는 이것도 겹쳐 들기로 버그가 걸리는데... 우산을 하나 든 상태에서 다른 우산과 겹쳐 선 뒤 든 우산을 스페이스키로 날려보내고 바로 새 우산을 들던지, 아니면 위에서 설명한 상자 띄우기를 한 뒤 우산을 먹으면 우산의 활공효과가 계속 걸려있게 된다. 


우산은 하늘에 떠서 멈춰있고 엘우드는 활공 중


 1스테이지만 해도 버그가 이정도나 나오는지라... 게임 자체도 잘 만들었고 재미있지만 이런 버그가 더더욱 기억에 남는 게임이다. 



3) 돌아온 여우 (TITUS The Fox to Marrakech and Back) : 1992년





 선사시대와 블루스 브라더스에 이어 바로 다음해에 나온 문제작. 국내에도 불법복제본이 퍼지고 게임월드에서 공략을 소개해주어 상당히 널리 알려진 고전 도스게임 중의 하나이다. 


 원래는 프랑스의 유명 엔터테이너인 Vincent Lagaf의 곡 La Zoubida의 뮤직비디오를 소재로 제작된 Moktar라는 타이틀의 게임이었다. 





Lagaf의 캐릭터 Moktar 쇼


Moktar가 등장하는 La Zoubida의 뮤직비디오


 하지만 프랑스 국내에서만 유명했던 사람인지라, 해외 버전에서는 인지도 문제를 생각해 단순히 귀여운 여우로 캐릭터를 바꾸게 되었고, 심하게 어렵다고 지적된 난이도를 다소 낮추어서 발매된 것이 이 TITUS The Fox이다. (그럼에도 이 해외버전 자체도 어렵다고 평가받고 있으니...)


 널리 알려져 있는 버전은 도스/아미가/Amstrad CPC 버전인데, 이외에 게임보이/게임보이 컬러 버전도 나왔다. 원작의 스피디한 게임플레이와는 좀 거리가 있지만 게임성 자체는 그런대로 괜찮게 이식한 편.



게임보이 버전



게임보이 컬러 버전


 게임적으로는 더욱 깔끔해진 그래픽과 부드러운 애니메이션 및 스크롤을 보여주고 있으며, 총 14스테이지의 방대한 볼륨도 놀라운 작품. 가장 임팩트가 강한 것은 블루스 브라더스에서 도입되었던 아이템 '들기' 요소를 더욱 더 강화시킨 것인데, 이것이 근본적으로 게임플레이를 완전히 뒤바꿔 놓았다. 


 - 모든 아이템을 집어올려 들고 다니다가 원하는 곳에서 내려놓을 수 있다. 아이템은 밟고 올라설 수 있는 아이템과 그렇지 않은 아이템이 존재해, 맵에 존재하는 아이템을 들어다 운반하여 원하는 곳에 놓아서 지형을 극복하는 퍼즐 요소가 엄청나게 강화됐다. 특히나 이번엔 단순히 밟고 올라가는 것만이 아니라, 여러번 밟으면 탄력으로 플레이어를 점점 더 높게 뛰게 하는 스프링이나 고무공 같은 아이템도 등장하여 한층 더 공략의 폭이 넓어졌다. 게다가 일반적인 아이템은 높은 데서 내려놓으면 밑으로 떨어져 바닥에 떨궈지지만, 이런 스프링이나 고무공은 바닥에 떨어질 때에도 물리 엔진으로 튕기기 때문에 반동으로 아이템 위에 놓이거나 하는 다양한 경우의 수가 발생한다. 더 무서운 것은 이런 특성을 사용해 공략해야 하는 맵 퍼즐을 가득 만들어놓았다는 것. 이런 매니악한 게임성은 골수 유저들을 반하게 만들었지만 동시에 난이도도 무척이나 높아져 버려 일반 유저들이 거리감을 느끼게 만드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 아이템은 블루스 브라더스 시절과 마찬가지로 대개는 던지면 적에게 맞아 타격을 입히고 없어지거나, 적에게 맞지 않았다면 그냥 화면 밖으로 날아가 사라져 버린다. 하지만 이 작품부터는 적에게 맞아 타격을 입혀도 없어지지 않고 다시 주워 던질 수 있는 수레와 같은 아이템부터 시작해, 던지면 물리 연산으로 통통 튕겨다니다가 점점 움직임이 약해져 바닥에 정지하는 고무공, 던지면 공중에 떠있고 위에 점프해서 올라타면 날아가는 양탄자, 올라타면 전진하는 스케이트보드나 스쿠터 등 실로 다양한 종류의 아이템이 등장하고 활용 방법과 공략도 무궁무진하게 나온다. 



 던져서 맞추면 없어지는 1회성 아이템도, 위로 점프하여 수직으로 위로 던져올리면 아래로 떨어지면서 밑에 깔리는 적에게 대미지를 준다. 이 방법을 사용하면 1회성 아이템도 없어지지 않는다! 이런 특성을 파악하면 아이템이 극도로 적게 배치된 부분에서도 편하게 적을 공략하며 나갈 수 있게 된다. 고작 1.2MB 2HD 디스켓 한장에 들어가는 90년대 도스 게임에 이 정도의 물리 계산과 치밀한 액션, 그리고 퍼즐 시스템이 들어가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 TITUS 게임의 전통인 숨겨진 요소가 더욱 더 강화되었다. 어떤 스테이지는 시작하자마자 천정에 뚫린 구멍에서 떨어지면서 시작하는데, 막 떨어지기 시작할 때 방향키를 오른쪽 위로 입력하고 있으면 복잡한 본 스테이지의 밖으로 뛰어나가 버리고 일직선으로 이동해 스테이지 클리어까지 갈 수 있다(...). 숨겨진 요소들에 대해 놀라울 정도로 자세한 공략을 한 국내 게이머가 있으니 참고삼아 읽어보기 바란다. 공격하는 적까지 들어올릴 수 있다는 것은 나도 이번에 이 블로그를 방문하면서 20여년만에 처음 알았다(...)


 - 스테이지가 늘고 게임의 볼륨이 길어졌지만 세이브 대신 스테이지별 패스워드를 제공해준다. 특이한 것은 시스템을 감지해서 같은 스테이지라고 해도 컴퓨터마다 패스워드가 전부 다르게 생성된다는 점. 덕분에 엔딩을 보려면 자신이 직접 게임에 도전해서 클리어해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하드웨어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던 TITUS였기에 가능했던 특징이라 할 것이다.


 - 해외의 어느 팬사이트(http://ttf.mine.nu/)에는 이 게임의 제작 배경과 게임플레이, 전체 맵, 숨겨진 요소, 트레이너를 사용한 커스텀 스테이지 제작 및 플레이 방법 등 다양한 요소를 소개하고 있다. 이 게임을 재미있게 플레이했던 게이머라면 꼭 한번쯤 들러 보길 바란다.

 


3. 서서히 저무는 TITUS의 황금기


 3작품이 연이어 유저들에게 인기를 끌며 기세를 올리고 있었던 TITUS지만, 새로운 도전보다는 시리즈물의 속편을 내고, 장르적으로도 플랫포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작품을 내기 시작하면서 점차 이들의 게임은 유저들로부터 외면받기 시작한다. 언뜻 보면 비슷비슷해 보이는 게임들이고 기술적으로는 더 나아졌지만 정작 중요한 '재미'가 없어졌다... 이것은 게임에 있어서 굉장히 미묘하지만 아주 중요한 문제이다. 히트한 작품과 8, 90%까지 비슷하게 만들었어도 나머지 1, 20%가 그 게임의 재미를 좌우해버린다. 그리고 이 문제는 오늘날의 대형 AAA급 게임들에 있어서도 변함없이 중요하고 민감한 문제이다.

 


1) Super Cauldron : 1992년




 TITUS 나름대로는 새로운 오리지널 게임을 만들려고 도전했던 작품. TITUS의 주특기인 횡스크롤 플랫포머의 카테고리에서 벗어나진 않았으나 주인공을 마법사로 설정, 다양한 마법을 사용해 게임을 풀어나가는 보다 RPG적인 요소를 많이 도입한 실험적인 작품. 하지만 역시나 액션으로서의 재미가 부족했던 탓인지, 크게 호응을 받지는 못했다.



2) 선사시대 2(Prehistorik 2) : 1993년


 TITUS The Fox로부터 바로 또 1년 뒤에 발표된 선사시대의 속편. 신작들을 만들며 쌓인 노하우 덕분에 1편에 비하면 월등히 나아진 기술적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작품. 슈퍼패미컴 버전은 패미통에서 40점 만점에 27점을 획득했다.




 다만 전작에 비해 많이 알려지지 못했고 인기를 끌지도 못했는데, 비슷한 스타일의 플랫포머 게임에 유저들이 좀 식상한 감도 있고, 무엇보다 퍼즐과 숨겨진 요소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액션의 재미가 많이 줄어든 것이 가장 큰 원인으로 꼽힌다. 위 플레이 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처음부터 보통 평범한 유저라면 도저히 있는지도 모를 숨겨진 아이템과 루트가 1스테이지부터 마구 튀어나오는 바람에 당황하게 되고, 게임의 진행이나 루트가 지나치게 장황해져서 목표의식을 잃게 만드는 구성에 문제가 좀 있다. 


 참고로 TITUS는 이 게임부터 허큘리스 그래픽 카드의 지원을 중지했는데, 덕분에 허큘리스 카드를 꽂은 286 PC를 가지고 있던 나는 당시 이 게임을 제대로 즐길 수가 없었다. 겨우 이 게임을 플레이해볼 수 있게 된 건 96년 대학에 들어가서 학교 컴퓨터실에 있던 펜티엄을 만지면서부터였다. 



2) 블루스 브라더스 2(The Blues Brothers 2 - The Jukebox Adventure) : 1993년

 



 TITUS의 도스 후기작들 중에서도 가장 문제가 많은 작품. 일단 위 플레이 영상에서부터 딱 감이 온다. 타이틀은 블루스 브라더스이지만 전혀 상관없는 분위기의 배경. 오히려 선사시대에 더 어울릴 것 같은 바위산과 나무들 사이를 뛰어다니는 제이크의 모습이 심히 어색하다. 기획의 안일함이 눈에 보이는 부분.


 원작에 대한 존중이 부족한 점도 문제이거니와, 블루스 브라더스 1과 TITUS The Fox에서 보여준 특유의 분위기와 미장센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 점도 큰 문제다. 특히 당시 TITUS의 장기는 지하철역, 하수도, 공사장 등 좀 허름한 도시 뒷골목의 배경을 굉장히 정감있게 묘사하는 것이었는데, 당시 플레이어들은 이 게임들을 즐기면서 한국, 일본, 대만 게임에서는 접하기 어렵던 독특한 배경과 미장센에 매료되었었다. 비록 256색의 투박한 도트 타일 그래픽이었지만, 플레이어가 그 세계에 실제로 들어간 것 같은 느낌을 전해주는 특유의 배경은 지금 봐도 유저를 끌어들이는 힘을 가지고 있다. 직접 플레이 영상을 보고 느껴보길 바란다.



블루스 브라더스 1의 4스테이지, 지하철역과 하수도



블루스 브라더스 1의 6스테이지. 콘서트 홀



3) 블루스 브라더스 2000 : 2000년


 세가새턴, 플레이스테이션, 닌텐도 64가 등장하고 콘솔게임이 득세하면서 TITUS도 콘솔 게임에 눈을 돌리게 된다. 하지만 새로이 대두된 3D 기술에서 TITUS는 방향을 제대로 잡지 못했고 과도기적인 미스를 연발한다. 물론 이것은 당시 처음 3D 게임을 대하는 많은 회사가 범하는 실수였고 특별히 TITUS만의 문제라고 볼 수는 없었지만, 시장은 냉정한 법이다. 


 영화 원작의 판권을 더 우려먹어보자는 생각이었는지, 아니면 전작의 성공을 콘솔에서도 재현하고 싶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TITUS는 2000년 블루스 브라더스의 신작을 닌텐도 64로 발매한다.




 문제는 플레이 영상에서 보듯, 예전 2D 시절에 보여줬던 정감있고 아기자기한 그래픽과 단순하면서도 경쾌한 조작감, 알기 쉽고 직관적인 게임플레이 등등 이전의 매력을 어느 하나도 제대로 살려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3D의 공간감과 입체적인 특성은 완전히 게임의 구성 요소를 바꿔놓는다. 소닉 시리즈도 3D화된 후 본질적인 게임성에서 길을 잃어버렸지만 마리오 64는 전혀 새로운 게임플레이의 패러다임을 제시해 살아남은 것을 보아도 이 문제는 중요하고 쉽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D가 됨으로써 비로소 가능한 재미가 무엇이 있는지, 게임에 그것이 잘 녹아들어 있는지 철저히 연구하지 않으면 언제나 그렇듯 비슷비슷하고 겉모습만 그럴듯한 게임이 되고 만다. TITUS는 이외에도 희대의 쿠소게임으로 유명해진 닌텐도 64용 Superman등을 발매하며 점점 신뢰를 잃고, 결국은 모두가 알고 있는 대로 파산해버리고 만다.


 바뀐 시대와 기술 그리고 트렌드에 현명하게 적응하지 못하고 도태되어 버렸지만, 그 시절 그토록 재미있는 게임을 만들어 수많은 게이머들과 예비 개발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던 TITUS의 게임들은 아마도 영원히 남을 것이다. 더불어 최근의 게임들이 갈수록 소홀히 하기 쉬워지는 게임의 본질적 재미가 어디에서 오는지도 우리에게 다시금 일깨워주고 있다.

체코의 게임개발사 Dreadlocks가 만든 2D 액션어드벤처게임 DEX. 기본 컨셉 자체도 흥미롭지만 플레이 시연 영상을 보면 구석구석 꼼꼼하게 구현된 기술력도 대단하다. 오브젝트 가려짐 등도 전부 반영하는 실시간 인식범위 계산이나 명암처리는 감탄스럽다. 90년대식 포인트앤클릭 어드벤처에 대담하게 격투액션과 슈팅요소까지 녹여낸 기획력도 놀랍고, 손으로 하나하나 그려낸 느와르 SF풍 배경과 인물 캐릭터들의 세밀한 움직임, 알파 레이어를 잔뜩 때려박아 2D임에도 풍부한 광원과 조명 등등 보면 볼수록 그 만듦새가 하나하나 범상치 않은 게임.

한국에서 이런 컨셉의 게임은 아마 만들 수 있는 날이 오질 않을 듯. 이런거 만들게 해주는 회사나 퍼블리셔도 없을 거고, 이런 세세한 실시간 인터랙션 구현해줄 프로그래머도 없을 테지. 


안드로이드 게임기 OUYA 버전 런칭 트레일러



시연영상


 그만두고 나온 G모사 도쿄스튜디오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중에 디자이너 T씨가 흥미있는 정보를 알려줬다. Patreon이라는 사이트가 있는데, 창작활동을 후원해준다는 것이었다. 자신은 아무래도 곧 회사를 그만두게 될 것 같은데, 그렇게 되면 이 사이트를 이용해 창작활동을 하면서 먹고살 생각을 진지하게 하고 있다고 한다. 신기한 이야기라, 사이트를 좀 둘러봤다.

 


http://www.patreon.com



 창작활동을 "후원"하는 사이트이다보니 저 이름은 혹시 '패트런'이라고 읽는 건가? 싶었는데 후원자라는 뜻의 패트런은 patron이라고 쓰는 모양이니 아마 저건 적당히 고쳐서 독자적인 이름을 만든 모양이다. 물론 뉘앙스야 따왔겠지만. 패트리언이라고 읽으면 되려나.


 이미 아마추어나 인디 창작 활동을 후원하는 사이트는 유명한 킥스타터를 비롯해 이런저런 사이트들이 있는데, 그런 기존의 후원 사이트들과 이 '패트리언'의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인가 하나의 목표를 정해놓고 그 목표를 완수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다. 아니, 굳이 말하자면 목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의 프로젝트 완수'라는 큰 덩어리를 목표로 정하지 않아도 된다. 예를 들어 그림이라면 한 장당 얼마씩을 받거나 하는 식으로 목표 기준을 세밀하고 보다 부담없게 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더 재미있는 건 'per month'이다. 이것은 자신의 창작 활동에 대해 '매 달마다 얼마'라는 식으로 후원을 받을 수 있다는 형태인데, 크리에이터 입장에서는 최적의 경우를 상정하면 회사에 들어가지 않아도 월급을 받는 것과 다를 바 없게 된다. 




 패트리언에 가입하고 새 계정을 만들면 우선은 그냥 후원자 입장의 계정이 되는데, 중간에 자신의 계정을 크리에이터 계정으로 바꿀 수가 있다. 크리에이터 계정으로 설정하면 위와 같이 자신의 활동에 대해 세팅하는 페이지가 나오는데, 여기에서 주목할 부분은 세번째의 'What are you getting paid for?'(어떤 형태로 지급을 받을 것인가?)이다. 음악을 만드는 사람이라면 곡 한곡, 앨범, 영상을 만든다면 비디오 한편 만들때마다 돈을 받는 형태로 설정할 수 있다. 그리고 밑에 있는 Monthly campaign이 바로 매 달마다 자신의 활동에 대해 돈을 받는 옵션이다. 




 '매일, 혹은 매우 정기적으로 작품을 만드는 크리에이터들에게만 권장된다. 작업물 하나당 얼마가 아니라, 매달 한번씩 후원자들이 돈을 내주게 된다.' 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설정을 마치면 자신을 알리는 홍보 비디오와 후원자들에게 자신을 알리는 문구를 업로드할 수 있고,




 다음 단계로는 프로젝트 중간중간에 넣을 수 있는 Goal을 설정하게 된다. 이것은 설정하지 않아도 상관없지만, 크리에이터 자신도 좀 더 동기 부여를 하고 후원자들도 프로젝트가 진행되어 간다는 것을 보다 확실히 알 수 있게 된다. 




 마지막으로, 후원자들에게 돌아갈 보상을 설정하게 된다. 후원자들 덕분에 수입이 들어오면 그 후원자들에게 보상하는 금액, 그리고 감사의 메시지와 비디오 등을 설정하는 것. 이것도 역시 설정하지 않아도 되긴 한다.


 이상의 설정을 마치면 크리에이터로서의 등록이 완료된다. 


 패트리언 사이트는 후원자들이 낸 금액에서 5%를 수수료로 받고 나머지를 크리에이터에게 주며, 매달 5일에 자동이체를 해준다고 한다. 후원자들의 후원은 보통 신용카드나 PayPal 결제로 이뤄지며, 후원자로부터 카드 지불거절이나 취소 등의 이유로 입금이 되지 않을 경우 패트리언 사이트에서 확인하고 재차 지불하도록 요청하고, 성공적으로 지불이 되면 다음달의 이체 때에 연체된 금액을 포함시킨다. 즉 어떤 크리에이터의 후원자가 되면 자신의 카드로부터 매달 금액이 나가는 셈. 매달 돈을 받으려는 크리에이터라면 매달 일정한 금액이 빠져나갈 것이고, 한 작품당 돈을 받는 크리에이터라면 작품을 완성시킨 달에 작품 수만큼 돈이 나갈 것이다. 어떤 의미로 후원자는 조금 리스크를 안고 후원을 결정해야 하는 셈. 킥스타터같은 사이트보다는 보다 더 크리에이터 입장에서 만들어진 시스템이라 할 수 있다. 


 FAQ를 읽어보면 위에 쓴 기본 시스템 이외에도 다양한 사이트의 운영 원칙에 대해서 알 수 있다. 킥스타터보다 특히 한국 크리에이터들에게 좋은 점은, 국제적 지불수단(VISA 등의 국제 호환 카드나 PayPal 계좌)을 가지고 있다면 어느 나라 사람이든 이용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아직까지 국가 제한이 있어 한국인이 이용하기 힘든 킥스타터보다 월등한 장점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혼자 힘으로 하나의 프로젝트 결과물(그림이라면 아트북, 게임이라면 완성된 게임의 발매, 음악이라면 앨범 등등...)을 완성시키기 힘든 크리에이터 개인도 자신의 작업물을 평가받고 금전적인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시스템이라는 점에서는 매우 획기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http://www.patreon.com/creation?hid=1070951



 말은 좋지만 후원자들이 제대로 일해줄지도 모르는 크리에이터들을 믿고 과연 자신의 카드로부터 매달 돈을 내어줄까? 이런 의문이 드는 것도 당연할 지 모른다. 하지만 크리에이터가 애써서 만들어낸 창작물을 높이 사주고 대우해주는 서구인들답게, 사이트를 만든지 1년 반만에 12만 5천명 이상의 후원자가 생겼고, 이 후원자들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크리에이터들에게 매달 백만 달러 이상을 후원해주고 있다고 한다. 


 한국에서 이런 선순환 - 후원자들이 자신들이 보고 싶은 작품을 만드는 크리에이터를 보다 직접적으로 후원해주고 크리에이터들은 그런 후원에 힘입어 자유롭게 자신이 하고 싶은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는 - 구조가 나오지 못한 점은 한편으로 매우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 패트리언이라는 사이트의 존재와 개념은 매우 흥미롭다. 제대로 자신의 노력과 재능을 보상받지 못하고 있는 한국의 크리에이터들이, 이 사이트를 이용해 조금이라도 자유를 찾을 수 있다면 좋겠다. 나 역시도 이 사이트를 이용해 뭔가 해볼 생각으로 있다. 










 G라는 타이틀을 달고 나오는 확장판도 벌써 네번째다. 달라지는 게 없다고 떠난 플레이어들도 많다. 하지만 여전히 신작이 나오면 백만장 단위를 넘나드는 판매량을 기록하고 유저들은 들떠서 사냥을 나간다. 초대 몬헌에서부터 다져진 몬스터와의 액션 공방은 그만큼 즐겁고 완성도 높은 놀이이다. 점점 영악해져 가는 개발사와 퍼블리셔들은 갈수록 모험을 하려 들지 않고 '어디까지만 하면 그래도 팔린다'라는 라인을 확인하려 애쓰는 요즘, 그 라인은 갈수록 빈약해지고 있고, 덕분에 유저들이 진짜로 플레이하면서 '즐거워할 수 있는' 게임은 갈수록 적어지고 있다. 특히 액션 게임은 그 피해가 심각해, 수많은 게임들이 '손맛'과 '타격감'을 내세우며 등장하지만 진짜 액션게임을 좋아하는 유저들은 안다. 할만한 진짜배기 액션 게임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만만하지 않은 컨트롤과 조작을 요구하는 캡콤표 액션을 10년 이상 고집하고 있는 몬헌은 그 자체로 일본산 액션 게임의 마지막 보루라고도 할 수 있다. 아직도 몬헌을 즐기는 수많은 유저들은 그 점을 높이 평가하고 있을 터이다.


 그런데 최근의 몬헌에서는 점점 심각해지는 문제가 하나 있다. 그리고 금방 해결될 것 같지도 않다는 것이 더욱 걱정스럽다. 밀도 높은 액션을 포기했다거나 하는 알기 쉬운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몬헌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그것도 좋지 않은 방향으로.

 이 문제는 정확하게 말하자면 Tri부터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캡콤은 Tri 발매 당시 후속작이 나와도 크게 달라지는 점이 없던 시리즈를 대폭적으로 개혁하고자 했다. 물론 이런 노력 자체는 높이 평가할 일이지만, 문제는 이걸 '무리하게' 우겨넣었다는 점이다. 우선 Tri 시절부터 들어간 새로운 시스템들에는 몬스터의 피로도와 스태미너, 각종 보조아이템의 효과 내성치 등등이 있는데, 이것들은 게임 플레이를 더 복잡하게 하고 챙겨야 할 아이템과 확인해야 할 상황이 많아지게 만들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 사냥과 액션 자체를 즐겁게 만들어 주는 시스템이 아니다. 


 몬스터도 스태미너와 피로도를 가지고 있어 싸우다 지치면 약해진다. 일견 들으면 리얼하고 멋지게 들리는 개념이지만 실제로 게임플레이를 보자. 이전에는 그냥 싸우면 되고 그러다 체력이 약해지면 다리를 절면서 도망가 잠을 자고 휴식을 취하는 심플하고 알기 쉬운 개념이었지만, 이제는 기본적으로 아무리 난이도가 높아도 50분 내외인 몬헌의 퀘스트 내에서, '몬스터가 기운차게 공격' -> '지쳐서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게 됨'  -> '도망가서 먹이를 먹음 or 시간이 지나서 분노하며 회복' -> '다시 기운차게 공격'의 실로 다양한 상황이 나온다. 이건 사실상 50분의 퀘스트 내에 전부 순서대로 체험이 가능한 상황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상황을 다 구현하기 위해 무리하게 넣다 보니, 유저가 공방을 벌이면서 느낄 수 있는 몬스터의 반응은 리듬이 깨지고 납득이 가지 않는다. 체력과 공격력을 엄청나게 올리고 빈틈과 딜레이를 엄청나게 줄여놓은 괴악한 공격패턴 때문에 유저는 고전하고, 기를 쓰고 패턴을 파악하고 온갖 수를 동원해야 겨우 몇대 때리는 것이 고작인데 어느 순간 갑자기 몬스터는 혼자 침을 흘리며 지쳐버린다. 유저로서는 자신이 시원하게 때려서 적이 지치고 약해졌다는 쾌감을 느끼기보다, 괴악한 패턴으로 쌓인 스트레스 위에 더해서 이해할 수 없는 게임 밸런스에 농락당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런 비슷한 예가 예전에 하나 더 있었다. 텐가이나 스트라이커즈 1945 등으로 한때 게임센터를 풍미했던 제작사 사이쿄의 슈팅게임들이다. 대부분의 유저들은 열심히 플레이하느라 제대로 보지 못했겠지만, 사이쿄의 후기 슈팅게임에서 보스전은 한 마디로 사기에 가깝다. 유저가 열심히 샷을 쏴서 맞추든 안 맞추든 보스는 일정 시간이 되면 대미지를 받아 번쩍거리면서 사라져간다. 유저가 빠르게 샷을 잘 맞춘다고 해도 보스를 파격적으로 빨리 물리칠 수가 없다. 보스의 HP 설정이, 잘 맞추건 못 맞추건 제작사가 설정한 범위 내에서 움직이도록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게임 개발사들 - 특히 일본 - 의 가장 큰 문제점 중의 하나가 이것인데, 자신들의 게임에 의도하지 않은 플레이가 가능한 부분이나 밸런스가 안 맞는 부분을 용납하지 못하는 점, 그리고 유저의 움직임과 플레이를 자신들의 의도대로 제한하려 드는 점이다. 대부분의 일본제 게임들은 고정된 카메라로 자신들이 의도한 앵글의 장면만을 보여주는 데에 집착하며, 유저들이 무엇인가 시스템의 허점을 알아내 변칙적인 플레이를 즐기거나 하면 그것을 악착같이 고치려 든다. 하지만 일본 개발사들이 알아야 하는 점은 이러한 버그나 헛점도 게임 플레이를 붕괴시키지 않고 오히려 재미있게 이용된다면 좋은 게임의 개성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월하의 야상곡 달성도 버그 플레이는 이미 게임의 한 요소로 유저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있지 않은가? 이것이 유저들간의 밸런스가 매우 중요한 온라인 게임이라면 물론 이런 부분은 철저하게 고쳐나가야 하겠지만, 대부분의 일본 개발사들이 만드는 스탠드얼론 게임들, 그리고 몬헌은 "유저들간에 누가 더 강한가"가 중요한 게임이 아니다. 


 이런 Tri의 개선점이 유저들에게 호평을 받았다고 보았는지, 이때부터 캡콤은 시리즈가 거듭될수록 점점 더 유저를 제약하고 괴롭히는 방향으로 게임플레이를 바꿔나간다. 섬광이나 함정 등의 보조아이템은 쓰면 쓸수록 내성이 생겨 지속시간이 짧아지고 결과적으로는 사용되는 바로 그 순간 말고는 의미가 없는 수준이 된다. 사실상 1~2번 쓰면 바로 내성이 생긴다고 보면 된다. 역시나 최대 50분으로 제한된 퀘스트 안에 전부 무리하게 집어넣은 결과이다. 몬스터의 약점 부분에는 육질을 단단하게 설정해서 무기가 튕겨 공격하기 어렵게 하고 부위 파괴도 힘들게 만들거나, 몬스터들의 공격을 피해서 빈틈을 만들어도 몸을 돌리는 동작의 딜레이를 말도 안되게 줄여놓아 바로 얻어맞는다.


 가장 불쾌한 점은 이런 식으로 몬스터들이 강화되었음에도 플레이어 캐릭터의 움직임 딜레이는 바뀐게 없다는 점이다. 포션을 마신 뒤 의미없는 포즈를 취하며 강제로 경직시간을 주는 것은 시리즈 10년이 넘은 지금도 바뀌지 않았다. 캐릭터의 무거운 조작감과 관성치에 의한 느릿한 방향전환 역시도 마찬가지다. 몬스터들의 움직임은 미칠듯이 빨라졌고 플레이어를 속이는 - 이쪽으로 움직일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반대로 움직이거나, 이쪽으로 오는 것 같아도 그쪽을 노리면 때릴 수 없다거나 - 움직임도 늘었지만 플레이어는 그에 걸맞게 민첩하게 조작할 수 없다. 순간적으로 판단을 잘못해 한쪽으로 이동을 시작해 버렸다면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물론 이런 불평등한 게임 밸런스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각각의 상황을 대처할 수 있는 장비 고유의 스킬들이 있기는 하다. 포션의 딜레이는 빨리먹기, 말도 안되는 판정의 공격에는 회피강화, 튕김에는 튕김무시 등등. 하지만 이것은 비정상적으로 몬스터를 강하게 만드는 현재의 게임 플레이 밸런스를 근본적으로 진화시키는 해결책이라고 할 수 없다. 유저에 따라서는 그런 스킬들을 사용하지 않고서 자신의 고유 장비와 스킬들로 퀘스트를 클리어해나가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한 가지 상황에서 다소의 유불리가 있더라도 여러가지 작전과 전술로 다양한 파해법이 나올 수 있는 게임이 좋은 게임이다. 하지만 현재의 몬헌은 갈수록 이 상황에서는 이 스킬, 이 장비로 돌파해라라는 모범 답안을 강요하는 게임이 되어가고 있다. 그 스킬, 그 장비를 사용하지 않으면 거의 퀘스트를 클리어할 수 없거나, 클리어한다 해도 엄청나게 스트레스를 받고 반사신경을 혹사당해 지쳐 버리게 되는 경우가 다반사다. 이건 결코 좋지 않다.


 캡콤의 좋지 않은 고집을 엿볼 수 있는 또 하나의 부분은 온라인 플레이에 대한 이상한 집착이다. 거치형 콘솔용 시리즈들은 대대로 온라인 플레이에서만 게임의 진짜 컨텐츠를 제대로 즐길 수 있게 해놓은 이상한 설계로 욕을 먹어온 역사가 있다. 온라인 접속을 하지 못하거나 사람들과 파티 맺는걸 번거롭게 느끼는 유저들은, 고레벨 퀘스트와 그것으로 만들 수 있는 장비들을 즐길 수 없었다. 제 값을 내고 게임을 샀는데도 반쪽짜리 게임을 즐겨야 했던 것이다. 


 PSP로 옮겨온 시리즈가 대박을 내고, 그나마 싱글 플레이로도 집회소 퀘스트를 할 수 있게 되면서 이런 어이없는 제한은 다소 완화되긴 했다. 그럼에도 캡콤의 좋지 못한 버릇은 다시금 되살아나고 있는 듯 하다. 아예 게임을 할 수 없는 상황은 없어졌지만, 싱글로는 클리어가 지독하게 어려운, 혹은 불가능한 퀘스트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어이없는 밸런스를 대놓고 유저에게 강요하기 시작한 것이 3DS의 Tri G다. 명해룡이나 월신룡, 점프 옥랑룡 등의 퀘는 지금도 유저들에게 악명이 높은데, 그래도 이것들은 게임이 발매되고 한참 후에 해금되어 거의 부록 쯤의 취급을 받았으므로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갈 수 있었다. 문제는 이후에 한참 기대를 모으면서 발매된 4, 그리고 4G다.

 

 4부터 시작된 괴이한 밸런스의 퀘스트들은 다 열거하기도 어렵다. 첫 등장때부터 패턴이 더럽기로 유명했던 브라키디오스는 4와 4G를 거치면서 점점 더 지랄맞게 변해가고 있고, 앵화/금화의 돌진 후 회전화염이나 공중에 뜬 후 풍압과 함께 나오는 유도비행>썸머솔트 패턴은 욕이 안 나올래야 안 나올 수가 없을 지경이다. 분명히 아무것도 없는 허공인데 그 어딘가에 거미줄을 걸고 2단, 3단 점프로 날아다니는 네르스큐라 아종, 아무때나 풍선이 됐다가 아무때나 물을 내뿜고 그나마도 뿜자마자 딜레이도 없이 다시 달려드는 자보아자길 아종, 대쉬 공격, 점프 후 몸 떨구기 공격 등 아무때나 뇌광충을 날려대는 뇌랑룡, 가로로 왔다갔다하는 회오리를 만드는 쿠샬 등등.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저들은 어떻게든 클리어를 해내곤 있지만, 갈수록 점점 솔로 클리어가 가능한 퀘스트가 줄어들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런 제작진의 횡포가 4G에서 아주 단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 G급 3성 마지막 퀘스트인 고그마지오스다. 이 녀석의 공격패턴 디자인은 그냥 유저를 대놓고 엿먹이겠다는 심산이 제대로 드러나는데, 산만한 덩치 주제에 샤갈마가라 골격이라 팔다리나 하반신 외에는 근접무기로 공격할 곳이 마땅치 않은데 시도때도 없이 미친듯이 움직여대는 지랄같은 패턴이 유저의 신경을 긁는다. 어떻게든 패턴을 익혀서 따라붙어 보려고 하면 온 몸에서 흘려대는 기름덩어리 때문에 붙들려 못 움직이게 되고, 이 기름을 피하려다 처맞고 기름에 붙들려서 처맞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이걸 악착같이 다 피하면서 때리려고 하면 이번엔 50분의 퀘스트 제한시간이 모자라서 시간 제한으로 실패해 버리고 만다. 터무니없이 높게 설정한 HP 때문이다. 


 이렇게까지 솔로 클리어를 막는 이유는 무엇일까. 보통 거론되는 이유는 다인 플레이시의 하메나 야리코미로 인해 몬스터가 걸려들어 아무 것도 못하고 맥없이 쉽게 죽는 것을 막기 위해 난이도를 상향시킨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위에서도 말했듯이 이러한 하메나 패턴파악 전술도 하나의 즐거움이자 게임을 즐기는 방법이며, 어느 정도 충분히 게임을 알고 파고들어 즐기는 사람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애초에 언제나 함께 할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유저들이 있다 하더라도 마음이 맞는 사람과 함께 멀티를 즐길 수 있게 되는 상황은 많지 않다. 좋은 친구들이 있다 하더라도 시간을 맞추고 게임기를 준비하고 온라인에 접속해 함께 즐기기까지는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 개발진은 온라인 멀티플레이만이 제대로 몬헌을 즐기는 것, 이것이 몬헌의 본편이라는 발상을 버려야 한다. 


 실시간 액션을 철저하게 구현하고 있는 몬헌인 이상, 솔로 플레이보다 다인 플레이가 쉬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이를 위해 다인 플레이시의 난이도를 높이는 것은 좋다. 다만 그 방법에 있어서는 좀 더 섬세하고 정교하게 연구를 할 필요가 있다. 애초에 집회소 자체도 방을 만들고 들어가는 온라인 접속과 오프라인 집회소가 따로 있고 이걸 구별할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온라인으로 다인 퀘스트가 됐을 때 참가자 수에 비례해서 체력과 공격, 방어력을 올린다든지, 맵에 함정이 하나 설치되었을 때는 다른 플레이어는 함정을 못 깔게 한다든지, 조금 더 신경써서 고민해 보면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그냥 집회소 고레벨 퀘스트는 무조건 패턴을 더럽게 해서 깨기 어렵게 만들면 된다는 안이한 발상으로 게임 밸런스를 디자인해버리니까 이런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갈수록 좋은 IP들이 쇠락해가고 좋은 액션 게임들이 줄어들고 있는 이 시점에 몬헌의 존재는 매우 귀중하다. 그만큼 아직까지 애착을 가지고 있는 많은 유저들이 있다. 바이오 해저드나 다른 주옥같은 IP들을 말아먹고 있는 캡콤으로서도 몬헌은 아주 중요한 브랜드이다. 그러니만큼 유저들의 기대에 보다 제대로 보답해 주었으면 한다. 정말 유저들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 유저들이 즐겁게 게임을 즐기기 위해서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좀 더 진지한 고민을 해주길 바란다.


 마지막으로 스트리트 파이터 2가 히트하면서 불러온 캡콤 대전격투 게임의 전성기가 어떻게 끝나갔는지 한번 되새겨보자. 갈수록 타이밍과 조작은 복잡해지고 어려워졌으며, 초보자들과 일반적인 유저들은 따라갈 수 없을 정도의 매니악한 시스템과 컨트롤이 요구되었고 컴퓨터의 AI도 쓸데없이 높아졌다. 스파 2X의 말도 안되는 CPU의 AI와 공격패턴을 보고 있으면 딱 지금의 몬헌이 겹쳐보인다. 회사에 틀어박혀 날마다 계속 몬헌만 들여다보면서 게임을 만들어온 개발진들의 기분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열심히 만든 몬스터들을 농락하며 하메 같은 걸로 쉽게 깨버리거나 하는 유저들을 보고 있으면 괘씸한 기분도 들 것이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초심을 잃지 않아 주길 바란다. 유저들이 공감할 수 없는 밸런스와 기획으로 유저를 제압하려 드는 것이 당신들의 할 일은 아니다. 돈을 내고 시간을 내어 게임을 사고 즐겨주는 유저들을 즐겁게 해 주는 것이야말로 개발진들이 해야 할 일이다. 지금의 몬헌은 그렇게 유저들을 즐겁게 해주는 길로 가고 있는가?



개인적으로 좀 관심을 갖고 있어서 몇몇 글들을 스크랩함.


http://ppss.kr/archives/18339

http://www.amazon.omwww.workingus.com/v2/gnu/bbs/board.php?bo_table=job&wr_id=13202&page=511

http://jung9nee.blogspot.jp/2013/11/blog-post.html

http://liveandventure.com/2012/12/21/rank/





한자와 나오키의 명대사 「倍返しだ!」(배로 되갚는다!)

드라마의 히트에 힘입어 2013년 일본 유행어 대상에 선정되기도 한 임팩트있는 대사.

 

2013년 홍백가합전에 나온 칸쟈니 8의 마루야마가 이를 흉내냈는데 

표정도 목소리도 상당히 비슷해서 다들 감탄함...


 버라이어티 방송이 넘쳐나는 일본 TV의 특성상 비슷비슷한 방송도 많고 그 와중에 눈에 띄게 하기 위해 무리한 설정이나 진행을 하는 방송도 많다. 그러다보니 진짜 볼만하다 싶은 방송은 손에 꼽을 정도가 되는데 개인적으로 재미있었던 방송 몇 가지를 꼽아본다.



1. 크림 퀴즈 미라클 9 (TV 아사히, 매주 수요일 오후 8시)






 개그콤비 크림스튜 우에다가 진행하는 퀴즈방송. 한때 상식 개그맨 캐릭터로 어필했던 우에다가 그 이미지를 살려 진행을 맡고 있다. 콤비임에도 파트너 아리타는 패널로서 퀴즈에 참가하는 게 특징. 기본적으로 연예인 9명씩으로 이루어진 두 팀이 퀴즈로 대결을 펼치는데, 멤버들을 3x3 패널에 대응시켜서 빙고게임과 비슷한 룰을 적용하거나 특정 시간 내에 릴레이로 퀴즈를 풀게 하는 등 일본다운 참신한 퀴즈 룰이 인상적. 다만 결과적으로는 대체로 아리타 팀이 진다. 고정 멤버 중에 거의 맨날 틀리거나 삽질하는 멤버가 끼어있어서...



2. 행복 봄비 걸 (닛테레, 매주 화요일 저녁 10시)




 아직까지 낡고 오래된 집들이 많이 남아있는 일본. 경제 불황으로 젊은 층의 생계가 불안해지고 있는 것은 일본 역시 마찬가지인데, 그 덕분에 어딘가 문제가 있거나 요즘 기준으로 살기에 썩 쾌적하지 않은 대신 집세가 싼 "와케아리붓켄"(訳あり物件)에서 사는 젊은이들도 늘고 있다. 이런 사람들의 집에 찾아가 집안과 생활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방송. 레귤러 멤버들이 각각 맡아 진행하는 몇 가지의 고정 코너가 있는데 가장 재미있는 것은 스즈키 사와(鈴木砂羽) 아줌마와 DAIGO가 진행하는 탐방. 


 참고로 제목의 봄비(본비)는 일본어로 가난뱅이를 의미하는 빈보(貧乏)라는 단어를 살짝 바꾼 말장난인데, 생각보다 역사가 오래된 말장난 단어로서 90년대에 인기있었던 도태랑전철 게임에서도 플레이어 캐릭터에게 가난과 불행을 안겨주는 NPC 캐릭터로 등장한 적이 있다. 올드게이머라면 아하! 싶을 단어.





 이 아줌마가 스즈키 사와. 본업은 배우로서 왕년에는 "사랑의 신세계" 등에서 파격적인 노출 연기로 화제를 모으기도 했던 분. 지금은 조금 촐랑거리는 아줌마 탤런트 캐릭터로 어필 중인데 그 매력이 제일 잘 살아나는 것이 이 "봄비 걸"이라고 하겠다.





 대체로 이 방송에서 찾아가는 집들이 낡고 구조가 골때리는 경우가 많다보니 화장실이나 욕실 등도 애매한 구조가 많고, 그걸 보여줄때마다 이 아줌마는 꼭 이런 요상한 몸개그를 선보인다(...).




 오른쪽이 DAIGO. 본업은 록밴드 가수이지만 한국에선 아마 버라이어티 탤런트로 더 널리 알려져 있을 듯(...). 보통은 약간 나사 빠진 듯한 캐릭터이지만 그런 DAIGO가 멀쩡해 보일 정도로 비상식적인 집과 거주자가 나오는 방송이라 그 갭을 보는 것이 재미. 대체로 이 방송에 출연하는 사람들은 수입도 엄청나게 적은 경우가 보통이라 식생활도 일반인의 상식과는 거리가 먼 경우가 많은데(예: 하루에 센베이 한개, 참치캔 하나를 활용한 말도안되는 요리 바리에이션, 직접 잡은 물고기 말림 등등...), 이런 음식들을 제작진의 반 강요로 인해 일일이 먹어보는 DAIGO의 반응도 꽤나 재미있다. 




1인분 199엔의 요리(...)




두부 위에 우마이봉을 부숴서 끼얹어 토핑(...)



참치캔 부침개. 재료비 72엔(...)


 이외에도 외딴 외지 섬에서 폐가를 개조해 혼자 사는 기획이나, 모리 이즈미가 방을 자기 맘대로 개조하는 기획 등등이 있는데 위 두 코너에 비하면 그다지 재미없으므로 비추천.



3. 츠루베의 가족에게 건배(NHK, 매주 월요일 저녁 8시)



 만담가 출신 탤런트인 쇼후쿠테이 츠루베(笑福亭鶴瓶)가 지방을 돌아다니며 시골 사람들과 어울리는 방송. 단순히 일본의 각지를 소개하는 방송은 일본 TV에 널리고 널렸지만, 츠루베 영감님 본인의 느긋하고 넉살좋은 캐릭터로 인해 맛깔나는 방송이 된다. 흔히 리포터를 맡는 개그맨들처럼 개그나 말장난에 의존하지도 않고, 무리하게 토크를 끌어내기 위한 장난이나 연출 등도 없다. 오로지 츠루베 본인의 연륜에서 묻어나는 구수한 진행이 일품. 진솔하게 각지에서 만나는 가족들의 생활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이 프로그램의 가장 큰 장점. 언뜻 보면 정말 이런 프로그램 어디서나 볼 수 있지 않나 싶지만, 가만히 보고 있자면 눈요기와 농담, 가벼운 진행으로 가득한 타 방송들과는 질이 다르다. 



 아마 한국에선 이 영감님을 대체로 타이거&드래곤의 야쿠자 보스로 처음 알게 되는 경우가 많다고 보는데, 2009년 12월 방송에서는 바로 그 타이거&드래곤의 니시다 토시유키 영감님이 게스트로 등장, 팬으로서는 감동의 캐스팅이 되었다.


 

 생각나면 다음에 또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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