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에 영화 감상을 쓰는 건 진짜 오랜만인 것 같다. 그만큼 뭔가 썰을 풀 만한, 팬심을 자극하는 그런 영화가 요즘은 적어졌다는 뜻도 되겠다. 물론 이게 요즘 영화들이 볼만하지 않다는 뜻은 절대 아니다. 하지만 원래 그냥 재미있는 영화와는 달리 뭔가 그 영화에 대해 자꾸 이런저런 썰을 풀고 싶어지는 영화가 있는 법이다.


 터미네이터 시리즈는 애증이다. 제임스 캐머런의 머릿속에서 태어난 이 이야기는 모두들 알고 있다시피 1, 2편이 워낙 넘사벽의 퀄리티를 자랑하는 데다, 내러티브적으로도 타임 패러독스를 다루고 있어 후속작을 만들기가 여간 까다롭지 않다. 많은 팬들이 아직도 이를 갈며 증오하는 3, 4편의 갈짓자 행보와 TV 시리즈 사라코너 연대기의 총체적 난국이 이 만만찮은 숙제의 난이도를 역설적으로 설명한다. 하지만 어쩌랴. 팬들은 다음 이야기를 보고 싶어하는 것을. 속편과 리부트가 난무하는 2015년의 여름, 그렇게 또 하나의 시리즈 속편이 우리에게 던져졌다. 과연 그 결과물은 어떤 것일까. 


 평론가들의 악평이 자자하지만, 웬걸. 나는 오랜만에 크게 만족했다. 본가, 아니 원작이라 불릴만한 1, 2편의 완성도를 넘어설 수는 없겠으나, 적어도 본가 시리즈의 정정당당한 속편이라 불릴 정도의 자격은 갖추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게다가 이 영화, 팬으로 하여금 정말 이것저것 얘기하고 싶게 만든다! 실로 오랜만에 포인트를 짚어가며 되새겨보고 싶어지는 바, 재미있게 영화를 보신 팬이라면 함께 그 되새김질에 참여해주시길 바라는 바이다.


(이하 스포일러 많습니다)



* 뭐니뭐니해도 가장 짚고 넘어가고 싶은 부분은 젊은 시절의 사라 코너 역을 맡은 에밀리아 클라크의 놀라운 싱크로율이다. 아마 팬들이라면 모두 동의하겠지만, 이 아가씨의 얼굴을 보고 있자면 큰 눈과 두터운 입술 등등, 사라 코너 역의 린다 해밀턴과 매우 닮았다! 이 정도로 이미지와 인상이 비슷한 배우라면 확실히 같은 캐릭터의 젊은 날이라고 해도 설득력이 배가되는 것은 당연한데 연기력과 액션도 받쳐주니 그야말로 금상첨화. 이 캐스팅은 과장을 좀 보태 신의 한 수라고 해도 될 정도.




* 한국인이라면 관심을 안 가질 수 없을 뵨사마(...)의 캐스팅도 아주 자연스럽고 좋았으나, 아쉽게도 배역의 비중이 썩 높지는 않다. 트레일러를 보며 G. I. Joe 때처럼 주지사님과 일대일 승부를 펼치는 뵨사마를 기대한 분들이 많았겠지만, 존재감을 충분히 어필한 것으로 만족해야 할 듯. 경찰 제복 차림의 이병헌이 아시아인임에도 불구하고 2편에서의 로버트 패트릭과 또한 매우 닮아보이는 것 또한 놀라운 일이다. 


* 1편 공개로부터 이미 21년이 지난 지금, 주연배우의 노화 역시도 자연스러운 속편을 만드는 데에 큰 장애물이 된 것이 사실. 본작은 이에 대해 '외피는 생체조직이니까 노화한다' 라는 아주 단순무식한 논법으로 해결을 시도했는데, 사실 제임스 캐머런의 본가 시리즈들부터가 '생체 외피로 둘러싼 기계인간'이라거나 '기계는 타임워프 장치를 통과할 수 없지만 생체 외피로 둘러싸면 가능하다'라는 상당히 초딩(...)스러운 발상의 산물이고 한술 더 떠 이것이 전체 내러티브를 지탱하는 주된 이론(...)이기에, 딱히 트집을 잡을 정도의 흠이 되지는 않는다. 밑에서 다시 이야기하겠지만, 본작에서의 T-800의 역할 부여를 위한 또 다른 장치로서 기능하고 있기도 하고.


* 본작에서 젊은 사라 코너는 T-800을 시종일관 '팝스'(pops)라고 부른다. 한국판의 자막에서는 이것을 무슨 고유명사처럼 그냥 '팝스'라고 써놓고 있고, 모 위키에서는 '2편에서의 밥 삼촌의 오마주' 운운하고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이건 모두 틀렸다고 본다. 사라는 그냥 T-800을 '아빠'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사라는 아주 어릴 적에 T-1000에게 습격당해 아버지를 잃었고 거기서 목숨을 구해준 것이 바로 이 T-800이었다. 이후 사라를 전사로서 키워내며 미래를 대비하게 해 주고, 이후로도 몇십년씩이나 홀로 남아 기다리면서 터미네이터가 되어 자신을 죽이러 온 존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주는 존재. 2편에서 T-800이 '존의 아버지를 대신할 존재'로서 자리매김했다면, 이번 작품에서는 사라의 아버지 역할을 맡게 된 셈이다. 사실 자세히 보면 이런 캐릭터성을 부여하기 위한 장면이 좀 심할 정도로 많이 들어가 있다. '너같은 놈한테 사라를 맡길 수 없다' 라던지 '우리 사라를 잘 부탁한다'라던지 서로 탄창 준비하면서 기싸움을 한다던지... 사라 역시도 T-800에게 강한 집착과 애정을 보이는만큼 이 'pops'라는 호칭은 '아빠'로 번역해야 맞다.


* 팬이라면 진짜 참을 수 없는 부분이 전작들에 대한 오마주이다. 상당수의 장면이 1, 2편의 명장면들을 거의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카일이 미래에 도착한 뒤 들어가는 옷가게라든가 T-800이 미래에서 처음 맞닥뜨리는 불량배 3인이라든가, T-1000의 카체이스 씬 등등. 특히 버스에서 내동댕이쳐진 T-800이 경찰차 앞 유리를 뚫고 들어간 뒤 타고 있던 경찰에게 내뱉는 한 마디는 그야말로 포복절도. 



 재미있는 것은 2017년으로 타임 슬립한 카일과 사라가 고속도로 한복판에 떨어지는데 이것은 사라코너 연대기의 타임 슬립 장면과 상당히 흡사하다. 



 한마디로 흑역사 3, 4편을 빼고는 전부 오마주하고 있다고 봐야 할 듯.


* 오랜 시간 지속되며 재창작이 거듭된 시리즈들의 경우 필연적으로 세계관에 모순과 빈틈이 생기고 설정 구멍이 나게 되는데, 대부분의 경우 평행 세계나 타임 루프 등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곤 한다. 사실상 복잡하고 골아픈 이론을 끌어다 대야 겨우 이어나갈 수 있을까 말까 한 이런 정공법보다 '사실은 돌고 도는 세계다' 라거나 '사실은 같은 세계가 몇 개씩이나 존재한다'라는 설명이 쉽고 간단한 건 당연하다. 문제는 이 식상함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하는 것. 터미네이터도 어쨌든 이러한 타임 루프물 대열에 들어서 버렸고, 앞으로 본작을 필두로 새로운 3부작이 등장하게 될 것인 바, 얼마나 뻔하지 않고 매력적인 이야기를 펼칠 수 있을 것인가가 관건이라 하겠다. 


* 스파이더맨의 조나 제임슨 편집장, J. K. 시몬스가 꽤나 재미있는 역할로 등장하는데 전체적인 비중이나 캐릭터의 포지셔닝으로 볼 때 전작들의 실버맨 박사의 위치에 해당하는 캐릭터로 보인다. 처음 공개됐을 때에는 아예 이 캐릭터가 실버맨 박사가 아닌가 하는 이야기도 나왔던 모양인데, 그 정도는 아닌 듯. 같은 캐릭터였다면 그건 그것대로 재미있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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